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6.촌지(寸志)와 기자
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6.촌지(寸志)와 기자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6.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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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기사와 관련 없는 연출 이미지임

[현대해양] 50년도 더 지난 일이다. 1971년 돼지해를 맞은 1월 어느 날, 햇병아리 기자 시절 몸담고 있던 중앙일간지 S신문 담당데스크로부터 긴급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관할 시 군의 살림살이를 취재, 모레까지 송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기자는 경남 마산에 주재하며, 마산을 비롯한 인근 시와 군을 맡으면서 시시각각으로 터지는 사건과 사고는 물론 주민복지와 관련, 하루도 쉼 없이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초년병 기자의 출장 취재는 언제나 재미있을 것이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산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창녕으로 떠났다.

그러나 당초 예정한 1시간 여 남짓보다 50여 분 늦게 도착했다. 군 공보실에서 이런 저런 자료를 챙긴 후 “때가 됐으니 점심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공보실장의 제의에 따라 함께 된장국으로 허기를 채웠다. 곧바로 마산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버스터미널에 이르자 공보실 직원이 봉투 하나를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그때만 해도 촌지(寸志)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기자로서 때 묻지 않은 터여서 그런지 벌써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이윽고 버스 안내양이 비좁은 차내를 오가면서 차비를 걷고 있었다. 기자는 조금 전의 그 봉투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봉투 속엔 200원밖에 없었다.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비를 제한 거스름돈은 30원. 물론 지갑 속엔 비상금이 있었지만 기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자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때 시장 군수가 베푸는 촌지는 5,000원~1만 원이었다. K 군수한테 촌지 200원에 대한 소회(所懷)를 띄웠더니 “정말 몰랐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회신을 받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기자한테 굳이 촌지를 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서재필과 독립신문

하기야 그때만 해도 기자의 공적(公的) 기능이 크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가 기자를 겸하기도 했었기에 어딜 가나 숙식을 제공하고 노자(路資)까지 주던 관행(?)이 있었던 것은 숨김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독립운동가와 기자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그럼 서재필(徐載弼) 박사의 면모는 어땠는가.

서재필과 독립신문
서재필과 독립신문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갖은 고생 끝에 의대를 나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2년 만에 귀국한 서 박사는 1896년 미국의 민주주의를 몸소 익혀 한글과 영어로 발행되는 독립신문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다.

그는 근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앞장섰고 정부 요인들과 지식인들을 규합, 새로운 정치단체 독립협회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모금을 통해 모은 돈 3,825원으로 독립문을 건립했다. 설계는 그때 서울에 살던 러시아인 사바틴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독립정신과 민주사상 고취를 위한 집회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당시로선 희귀한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루한 보수파의 책동으로 독립협회는 해산이란 비운을 맞았다. 다만 독립협회서 활약한 새로운 지식인들이 훗날 민족 자강운동의 주류세력으로 등장한다.

장편소설 무정(無情)으로 신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평북 정주(定州)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돌아가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일주일 후에 숨졌다. 그 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됐고 관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서울로 상경했다. 이듬해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渡日), 1907년 메이지대학 중학부에 편입했다. 소설 시문학 수필 희곡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문필가로 명성을 떨쳤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 1933년에는 편집국장으로 승진했다. 그 후 조선일보 부사장에 올랐다.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1920년 단편소설 ‘희생화’를 개벽지에 발표, 문단에 등단했다. 그의 소설은 체험소설, 현실고발소설, 역사소설 3가지로 창작과정을 보여준다.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문단에서 인정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다. 소설 ‘운수 좋은날’은 제목이 완전 반전이다. 내용은 비참하고 처량하다. 일제강점기에 힘든 하층민의 삶을 노골적, 완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동아일보 주필 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낭인의 봄’으로 등단한 김소월(金素月)은 동아일보 정주(定州)지국을 경영했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일제강점기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썼다. 주요작품으로는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접동새’ ‘산유화’ 등. 2살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병자가 되는 불운을 겪었다. 1925년에 발표된 ‘가는 길’은 이별의 경험을 통해 정처없이 떠도는 시인의 쓸쓸한 마음과 고독한 내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을 탔다.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를 쓴 시인이다. 그는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고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최은희는 옥고를 치른 후 조선일보 기자로 뛰었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인정받고 있다. 또 영남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장덕조도 여걸 중의 한 사람이다. 이에 앞서 조선 불교 유심론을 감옥에서 쓴 만해 한용운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를 뺄 수 없다.

그럼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번 살펴봤다. 외국의 경우도 봉투 폐습은 없지만 다른 형태로 보답을 하기도 한다. 미국은 사회 공헌도에 따라 기자를 최고 수준의 사교모임에 초대하기도 하고, 일본은 명절 때 소품이나마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광복과 더불어 정부 수립과정의 사회 혼란기를 틈타 서울과 지방 할 것 없이 언론의 횡포 특히 기자사회의 비리가 싹튼 것으로 본다. 바로 이게 오늘날 비뚤어진 촌지관행으로 변질된 것 같다.

특정기사와 관련 없는 연출 이미지임

기자 역시 공갈 아닌 수법을 불가피하게 쓴 적이 있다. 1980년 11월 언론 통폐합 직전 D일보 기자시절 부도를 낸 2년 후배로부터 채권관계가 있는 업체의 돈을 받아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수산업을 경영하다가 부도가 나자 거래처에서 당시로선 꽤 큰 3,000만 원을 주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지명수배 중이어서 직접 나설 수 없다고 입장을 털어놨다. 어쩔 수 없이 상대를 만나 기자의 본분을 벗어나 겁(?)도 주고 온갖 회유를 한 결과 며칠 지나 3,000만 원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만날 것을 요청해 점심을 함께 먹었다.

대화 막바지에 100만 원이란 거금을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랄까. 외려 기자가 겁이 났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그 일식집은 설령 돈을 받는다고 해도 큰 탈은 안날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그 돈을 거절했다. 일주일 후 다시 찾아온 상대는 200만 원을 가져왔다. 부산시 중구 중앙동 B호텔 커피숍에서 탁자 아래로 돈 봉투가 왔다 갔다한 지 무려 1시간 반. 결국 이 돈 가운데 50만 원을 받았다. 그 후 한 달이 채 안 돼 언론통폐합과 함께 기자 숙청작업이 진행됐다. 어쨌든 소속 신문사 숙청 대상자 58명 가운데 기자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그때처럼 고민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때 200만 원을 모두 챙겼더라면 50년이 흐른 지금까지 기자라는 자랑스러운 직업을 계속 누릴 수 있었을까 큰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어업이민 취재 때

또 기억을 되살려 보면 잊을 수 없는 촌지를 받은 적이 있다. 1986년 2월 한성기업의 아르헨티나 어업이민을 취재하러 갈 때의 얘기다. 어렵사리 회사에서 2주일 출장허가는 났지만 난생 처음 가는 남미 취재여서 욕심을 부렸다. 말하자면 출장일수를 한 달간 연장을 한 것이다. 그만큼 취재비가 모자랐다. 할 수 없이 당시 한국원양협회장을 만났다.

“남미 취재갑니다. 힘이 돼 주십시오.” 간단한 이 한 마디에 회장은 “알았소” 딱 이 한 마디뿐이었다. 약속한 날짜에 원양협회를 찾아갔더니 500만 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일이 순순히 풀린 것은 회장 밑에 있는 K 전무가 뒷바라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K 전무는 우리나라 초대 여성 대법관이었으며 ‘김영란법’을 제정 계기가 된 김영란 씨의 친부(親父)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미를 여행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항로가 너무 길고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참고로 기자의 여행길은 서울에서 미국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를 거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은 무려 24시간으로 기억된다. 지금이야 비행시간이 빨라졌겠지만. 그러나 어업이민을 태운 배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1,400km 떨어진 프에르트 마드린항이었다. 인구 8만 명의 조용한 항구에 한성기업이 사운을 걸고 우리 어업이민 120명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곳에 이민 간 우리 어업인들이 살 주택과 초등학교 냉동창고 등을 지었으나 4~5년이 지나자 하나 둘 날이 갈수록 큰 도시로 빠져나갔다. 결국 어업이민은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자는 개인적으로 가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마젤란 해협을 끼고도는 우스아이야에 가고 싶었다. 그 섬에 사는 문명근(당시 63)씨를 만나는 게 큰 희망이었다. 그는 황해도 연백농고를 나와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이민길에 오른 것이다. 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채소가 쇠고기보다 5배나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남위 50도 선상의 이곳은 기후가 나빠 부에노스 아이레스 농대학장이 불모의 땅으로 선언한 곳이다. 그러나 그는 길섶에 민들레가 피어있는 것을 보고 배추와 무 상추 등을 거둬 남극 대륙 아르헨티나 해군기지에 납품하고 있었다.

취재중인 기자들. 특정기사와 관련 없음.
취재중인 기자들. 특정기사와 관련 없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기자가 1986년 3월 그곳을 찾았을 땐 붉은 장미와 노란색 장미를 한껏 꽃 피우고 있었다. 이처럼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고 분초를 다투며 항상 특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기자는 영일(寧日: 일 없이 평화스러운 날)이 없다. 간혹 기자실이나 다방에서 휴식을 즐기는 기자들을 보고 혹자는 비꼬기도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를 보라. 1960년 4월 11일 낮 불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수면 위에 떠오른 김주열(金朱烈)군의 시체를 특종 보도한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許鍾) 기자 역시 시내 외교다방에서 들은 정보를 단초로 삼았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잭 제임스 서울 특파원은 무초 주한 미국 대사의 말 한마디에 한국전쟁 발발을 UPI통신에 실어 전 세계에 타전했다. 영국 로이터통신이 첫 보도한 것 보다 불과 20분밖에 빠르지 않았지만 이것은 세계적인 특종이었다. 그만큼 특종 경쟁은 치열하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때 취재 경쟁에 뛰어든 기자 350명 가운데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흔히 인간은 창조를 가장 값진 것으로 여긴다. 지구상에 없던 가장 아름다운 소리와 빛깔을 창조하는 예술가, 또 가장 아름다운 건물과 다리를 만든 건축가들이 존경 받는 이유는 곧 이 때문이다.

기자 또한 특종을 통해 창조한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살라”고 읊은 로마의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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