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4. 행궁에서 식민지 파라다이스로,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4. 행궁에서 식민지 파라다이스로,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
  • 김준 박사
  • 승인 2023.06.15 09: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 월미도 (1)
월미산에 복원 설치된 예포

[현대해양]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 숙소를 찾기 위해 도착한 월미도는 밤이 아니었다. 화려한 불빛과 젊은이들의 웃음과 몸짓이 생기가 넘친다. 지척인 인천 구도심과 너무 다르다.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월미공원을 산책하기 위해 다시 본 그 거리는 지난밤 그 거리가 아니다. 한산하기보다는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월미산에 오르면서는 또한번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침 운동을 나온 활기찬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낮과 밤이 다른 얼굴인가. 월미도는 곧 월미산이며, 월미공원이다.

월미도는 ‘어울미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지금처럼 ‘달꼬리섬’인 ‘월미도’가 아니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어을미도(魚乙味島)’, ‘비변사등록’에는 ‘어을미도(於乙味島)’와 ‘어미도(於味島), ‘해동지도’에는 ‘얼미도(孼尾島)’와 ‘월미도(月尾島)’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제물도(濟物島)라고도 했다. 부르기 좋고 의미도 좋은 오늘의 월미도(月尾島)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월미도는 해안선 4킬로미터의 작은 섬으로 해발 105미터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이웃한 영종도와 함께 뱃길로 한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또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로 한강이 아닌 월미도와 자연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에 머물 거처로 행궁을 만들기도 했다.

월미도는 옛 이름이나 지금의 지명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섬은 골골이 아픔으로 가득하다. 가장 큰 슬픔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불바다로 변했던 것과 섬사람들의 기억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섬 주민들은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전쟁 후에는 섬을 떠나 70여 년을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월미공원 반환기념비

월미도에 행궁이 있었다?

‘해동지도(1750)’에는 월미도라는 명칭과 함께 행궁(幸宮)이 표기되어 있다. 또 인천부에서 발행한 ‘해동지도’에도 행궁(行宮)이 자연도(영종도), 용유목장지처(용유도), 무의목장지처(무의도), 팔미도 등이 그려져 있다. 또 여지도서(1760년대)에도 행궁과 함께 월미도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다만 그림은 조금씩 다르다.

영종진도(규장각), 월미도에 '돈대'가 표기되어 있으며, 물치도에도 토성이 있다.
영종진도(규장각), 월미도에 '돈대'가 표기되어 있으며, 물치도에도 토성이 있다.

행궁은 왕이 나들이할 때 머무는 임시거처를 말한다. 월미도의 행궁은 왕이 유사 시 영종진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침입으로 강화도 갑곶으로 피신하려다 길을 막히자 남한산성에 들었다가 항복했던 ‘삼전도 굴욕(1637, 인조 15)’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왕이 월미도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다.

행궁에 이어 주목해야 할 부분이 돈대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물이다. 월미산으로 오르는 길에 복원한 돈대를 만날 수 있다. 돈대로 유명한 곳은 강화도다. 해안을 따라 능선이나 언덕이나 해안가에 돌이나 흙을 쌓아 설치한다. ‘영종진지도’를 보면 월미도 남서쪽 4부 능선에 둥근 원형의 돈대가 표시되어 있다.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설치한 강화도 돈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조선 고종조에 제물포 인근에 이양선이 출몰하자 화도진, 연희진 등 여러 곳에 포대를 축조했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 극동함대에서 제작한 해도에도 월미도가 등장한다.

월미도의 역할은 자연도와 함께 살펴야 한다. 청의 침입에 대비해 남양에 있던 영종진을 자연도에 딸린 작은 섬(太平巖)으로 옮기고, 자연도라는 이름도 영종도로 바꾸었다. 그만큼 해안방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무엇보다 유사시 강화도라는 요새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 확보가 중요했다. 그 길목에 월미도가 자리한 것이다.

동아일보(1937.6.15.) 해상용궁각 기사

열강은 왜 월미도를 탐냈을까

인천은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그래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곳곳에 붙어 있다. 그 처음의 배후에는 월미도가 있다.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 낯선 문화가 곧바로 뭍에 상륙하기보다는 정치나 권력의 관심이 적고 힘이 미치지 않거나 약한 고리가 섬이었다. 그 틈새에서 권리는 물론이고 인권마저도 무시되고 고통을 받는 것은 섬사람이다.

일찍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같은 방법으로 조선의 개방을 요청했다. 일본만 아니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국적의 이양선출현이 그 징후이다. 이들은 대부분 인천항을 기웃거렸다. 한양으로 들어가는 한강수로의 나들목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곧바로 제물포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월미도를 교두보로 이용했다.

월미산 정상에서 본 영종도, 강화도(뒷쪽 흐릿한 섬), 물치도(가운데 작은 섬), 영종대교와 인천

일찍 조선을 넘본 일본이나 청나라는 무단으로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짓거나 지으려 했다. 당시 석탄은 군함을 움직이는 동력원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월미도에 아예 군수물자 창고를 짓는다.

당시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도 월미도의 토지를 임대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곳에 석탄창고만 아니라 병원,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타운센드 회사도 월미도에 석유 저장고를 구축해 조선의 석유공급권을 차지했다.

1895년(고종 32) 1월부터 8월까지 감영, 감리서 등 지방 관서에서 보내온 첩보를 필사해 엮은 ‘첩보전안’(牒報存案, 1895, 규장각 자료)을 보면, ‘인천항 월미도 등에 미·영·일·러·프 병선’이 자주 출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 정부에 공공연하게 월미도 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일본의 ‘租借月尾島地基約單(1891)’, ‘美海軍의 月尾島 小砲鍊習承認要請(1893)’, 러시아의 ‘政府에 月尾島西南址段을 租借하는 契約書(1986)’ 등이다.

인천항구도, 월미도에 일본해군석탄고가 표기되어 있다

일제, 월미도에 아방궁을 짓다

월미도 건너편이 제물포다. 그 사이에서 치러진 제물포해전(1904)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승리한 일본은 월미도를 군사지역으로 지정하고 인천과 월미도를 잇는 군용철도를 만든다.

인천세관 잔교에서 바라본 월미도 사진엽서 (출처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인천항이 개발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월미도는 군사나 물류수송의 병참기지보다는 경인철도와 연결해 경인지역 일본인을 위한 관광지로 조성을 계획한다.

월미도가 인천과 연결된 것은 1906년이다. 이에 일제는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고, 인천역과 섬을 잇던 철도를 도로 바꾸었다.

1918년에는 북성지구에서 월미도로 왕복2차선 제방둑길이 만들어졌다. 지역의 유력자본을 끌어들여 1923년 ‘월미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탕 ‘월미도 조탕’과 해수풀장을 운영했다. 그리고 여관, 별장, 호텔, 해수욕장, 보트장, 용궁각(요정) 등을 갖춘다. 월미산 자락에는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해학교(1923)를 설립해 일본애국부인회 인천위원부와 독지간호부인회 인천지부가 일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영, 운동, 오락 등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일본 관리들에 의해 식민사관에 근거해 발간됐던, 인천 역사서인 「인천부사(1933)」에는 월미산 정상에 아타고신사(愛宕神社)가 있다고 기록됐다. 아타고 신사는 인천신사의 경외신사로 1908년 세워졌고, 1929년 9월에 개축했다.

아타고신사는 교토시의 애탕산 위에 있는 신사로 일본 신사의 근본사로 전쟁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다. 신사 입구에는 청일전쟁 때 사망한 일본군을 추모하는 충혼비가 있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는 영종도와 인천을 잇는 영종대교와 강화도로 이어지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가운데 작은 섬이 물치도다. 열강의 외양선들이 출몰했던 현장이다.

월미산 정상 맞은편 언덕에는 예식용 대포인 예포가 복원·설치되었다. 예포는 국가 부대 함정을 공식방문하는 내외국의 국가원수나 고위관리 등이 도착하거나, 군함이 외국항구에 입항하는 등 각종 의례 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군대나 군함이 공포탄을 발하는 예식절차다.

기록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각국 대사를 맞이하는 포대를 월미도에 설치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월미도는 열강의 다툼 속에 일제가 병참기지로 만들었다가 이후 경인지역 일본인을 위한 유원지로 조성되었다. 

월미도 놀이공원
영종도 갯벌에서 본 월미도
월미도 여객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