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다시 5.노계 박인로의 「선상탄」
한국 바다시 5.노계 박인로의 「선상탄」
  •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 · 고신대 석좌교수
  • 승인 2023.06.20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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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탄_1605년(선조 38)박인로가 지은 가사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산탄_1605년(선조 38)박인로가 지은 가사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해양] 노계 박인로(1561년~1642년)는 무인이었지만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독특한 문사였다. 13세 때에 「대승음」(戴勝吟)이란 한시를 지었고, 가사문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활약했다. 38세 때에 경상도 좌병사(左兵使)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때 성윤문(成允文)의 명에 의하여 「태평사 太平詞」를 지었다. 39세 때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 선전관(宣傳官)을 잠깐 지낸 뒤 조라포(助羅浦) 만호(萬戶)가 되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42세 때에 통주사(統舟師)가 되어 부산으로 가서 적들을 막고 「선상탄」(船上歎)을 지었다. 그가 지은 「선상탄」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노계집(蘆溪集)』에 실려 있는 「선상탄」은 전문 68절 144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사는 앞선 시대의 어부가나 어부사시사와는 다른 차원의 노래이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상황이 아니라 박인로가 통주사(統舟師)로 부산에 부임해 전선(戰船)에서 전쟁의 비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사에서 특이한 점은 만리 밖의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온 백성이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된 것은 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여, 배를 처음 만들었다는 황제를 원망하고 있다. 그리고 더 생각해보니 불사약을 구하려고 서불(徐巿) 등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과 더불어 동해로 보내 마침내 바다 가운데 모든 섬에 물리치기 어려운 도적을 낳게 한 진시황이 더 원망스럽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배만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배로 인하여 생기는 흥취와 풍류를 노래하기도 한다.

옛날의 배는 술자리가 어지러운 흥취 있는 배였다. 그런데 지금 지은이가 탄 배는 같은 배로되 술상 대신 큰 검과 긴 창뿐인 판옥선(板屋船: 널빤지로 위를 덮은, 옛날 싸움배의 하나)이다. 바람을 쏘이며 달을 읊어도 전혀 흥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당시의 삭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시 속에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으나, 국운이 불행하여서 왜구로부터 씻지 못할 수치를 받았고, 자신은 미약하고 병들었지만 나라 위한 정성과 장한 기개를 가졌음을 노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왜구들에게 항복할 것을 재촉하고, 평화를 되찾아 태평시절이 돌아오면 전선을 고깃배로 바꾸어 타고 풍월을 노래하고자 하는 소망을 읊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선상탄」(船上歎)은 무부(武夫)였던 지은이의 패기와 우국단심(憂國丹心)이 잘 드러나고 있어, 이전의 어부사와는 다른 차원의 뱃노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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