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다시 4.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한국 바다시 4.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 · 고신대 석좌교수
  • 승인 2023.05.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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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현대해양]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는 75수에 달하는 적지 않은 시조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시조는 「어부사시사」이다. 전체 40수로 이뤄진 「어부사시사」는 윤선도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해남과 보길도를 오가며 생활하던 윤선도는 효종이 즉위(1649년)한 이후, 왕명에 의해 관직에 다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을 하고 있던 서인들의 거듭되는 견제와 비방으로 인해,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650년에 마침내 귀향하여 보길도의 부용동에 은거했는데, 「어부사시사」는 보길도에 머물면서 65세 때인 1651년 가을에 자신을 어부에 비겨 창작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부사시사」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별로 각 10수씩으로 구성되었다. 전래해 오던 「어부사」와 농암 이현보의 연시조 「어부단가」를 참조하여, 윤선도는 각 계절마다 10수씩으로 구성된 자신만의 새로운 「어부사시사」를 완성했다.

주지하듯이 「어부사시사」는 기존의 ‘어부사’ 계열 작품들의 내용과 표현 등을 취해서, 윤선도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고산이 남긴 다양한 시조들에서는 강호자연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족감과 그로 인한 고양된 흥취가 적절히 발현되고 있는데, 바로 이런 면모가 윤선도를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든 요인이라 하겠다. 계절별로 10수씩 전체 40수에 달하는 「어부사시사」에 나타난 사계절의 양상과 자연 인식의 구체적인 면모의 형상화는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각 계절의 특성을 적절히 취해 하루의 일과로 축약하여 이상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작품 곳곳에 다양한 고사(故事)가 제시되어 있는 바, 이러한 시적 형상을 통해 작가가 표출하고자 한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어부사시사」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매 작품마다 덧붙은 ‘후렴’과 전체 작품을 종결짓는 역할을 하는 ‘어부사 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렴’은 병렬적으로 제시된 계절별 10수씩의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유기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부사 여음’은 「어부사시사」 40수를 통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연군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바, 이를 통해 작자가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의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화자는 자연에서의 자족적인 삶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자신이 떠나 온 정치 현실에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윤선도와 「어부사시사」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으며, 작품의 형식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심도 있는 연구 성과가 이뤄졌다.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어부가’의 전승 과정과 「어부사시사」의 관계를 통하여 그 위상을 살펴보기도 했으며, 작품의 미학적 의미를 탐구한 연구 성과도 많다. 또한 「어부사시사」의 형식적 특징과 갈래에 대한 논의를 펼친 연구 성과들도 있으며, 최근에는 문집의 번역과 시조 작품 해설서 및 윤선도의 일생을 재구성한 평전도 출간된 바 있다.

윤선도가 주로 활동했던 17세기는 대내·외적으로 격변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사림의 분열로 당쟁이 심했으며,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 두 차례의 전란은 당시의 국가체계를 뒤흔들 정도로 심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격렬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던 조선 전기의 정치 판도는, 선조(宣祖) 연간(1567~1608)에 이르러 사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후 사림파 세력들은 견해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다.

윤선도 집안의 당파는 동인 계열의 남인에 속했는데, 그 자신이 이러한 정치적 위상에 걸맞은 활동을 펼쳤기에 생애 내내 험한 세월을 살아야 했다. 윤선도는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여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로 진출했으며,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왕자들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활동하였다. 47세 때인 1633년(인조11)에는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성산현감을 역임한 후 사임하면서 다시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그의 나이 65세이던 1651년에는 보길도의 부용동에 거처하면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으며, 다음 해인 1652년(66세)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지만, 다시 탄핵을 받고 사직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에 의해 관직이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지만, 당시 조정의 권력자였던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린 이후 관직을 삭탈당하여 해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어부사시사」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한 수 한 수는 각각의 단위 안에서 시상을 완결하지 않고 일련의 경물(景物)과 흥(興)을 노래하는 지속적 맥락에 따라 나아간다. 아울러 이 작품에는 보길도에서의 각 계절별 특징이 적절히 형상화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작자가 자신의 체험과 주변의 경물들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각 계절별로 구성된 10수의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짜여 있지는 않다. 화자의 행적과 계절에 대한 감상을 그저 10수씩 병렬적으로 제시해 놓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병렬된 작품들을 하루 일과의 시간적 흐름에 맞춰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지시하는 후렴구의 역할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부사시사」에서 후렴의 존재는 작품의 유기적인 면모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흥을 돋구는 근원적 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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