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3. 근현대사의 아픔을 묻는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3. 근현대사의 아픔을 묻는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3.05.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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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종도 구읍뱃터
고층빌딩이 세워진 구읍뱃터
고층빌딩이 세워진 구읍뱃터

[현대해양] “그래 맞아, 섬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지.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월미도 선착장에서 오토바이를 줄지어 세워두고 영종도로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는 중년 사내들의 말이다. 영종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뱃길을 이용해야 한다. 육로는 자동차전용도로이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도로다. 목적지는 구읍뱃터다. 섬처럼 잘록한 목이 거북머리를 닮아 생긴 지명이다. 영종도에서 예단포와 함께 구읍은 서울과 인천으로 오가는 나들목이었다. 하루에 10여 차례 월미도와 영종도를 오가는 뱃길엔 주민들보다는 여행객들이 더 많다. 특히 주말이면 구읍뱃터에서 섬의 정취를 느끼며 횟집에서 술을 한잔하려는 사람과 배를 타고 걷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북적댄다. 또 자전거나 오토바이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이용한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에는 영종도를 중심으로 용유도, 삼목도, 무의도, 소무의도 등이 있었다. 북쪽으로 장봉도, 모도, 시도, 신도가 있었다. 이중 영종도, 용유도, 삼목도는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막고 매립과 간척을 해서 인천국제공항을 조성했다. 이후 무의도와 용유도는 연도교가 놓였고, 또 신도와 잇는 다리도 건설하고 있다.

구읍뱃터에서 본 물치도
구읍뱃터에서 본 물치도

 

영종도, 이렇게 지명이 붙여졌다

영종도는 자연도라 불렸던 인천도호부에 속한 섬이다. 영종이라는 이름은 효종 4년(1652) 경기도 남양부 양종포에 설치되었던 영종진이 강화수로의 요충지인 자연도로 옮겨 오면서다. 강화수로는 조운선의 뱃길만 아니라 경강을 통해 도성의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군사적인 요충지로 중요성이 커지면서 지명도 영종도라 바뀌었다. 당시 경기수영(경기도 화성 소재)에 영종진, 제물진 등 6진이 있었다. 경기도 화성에 있던 영종진을 인천부 소속의 자연도로 옮겨오면서 영종도라 불렀다. 조선 중기다. 역사적으로 자연도는 유배지이자 해상방어 요충지였고, 유사시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할 때 뱃길이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자연도 동쪽으로 작은 섬 영종과 물치가 표기되어 있다. 이 영종에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구읍뱃터 옆에 경원정이라는 객사가 있었다. 그리고 자연도와 잇는 다리(만세교)가 만들어졌다. 조운선을 포함한 교통로와 해안방어 측면에서 영종도가 중요해지면서 영종진은 자연도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 경원정에서 환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경원정은 구읍뱃터 근처 하늘도시(30호 공원 일대)로 추정한다. 이곳은 군산정(선유도), 안흥정(마도), 경원정(영종도), 벽란정(벽란도) 등과 함께 송나라 사신을 맞는 곳이다. 모두 수군진이 설치된 곳이다. 경원정 주변에 초가가 10채가 있었다고 했다. 경원정의 경원 인천이 중시되었던 고려시대 외가처가 7대어향, 인주라 했다. 이후 경원부로 승격되는데 경원정은 그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서긍은 경원정에 들르기 전 인근 사찰 제물사에서 송밀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오늘날 제물포의 지명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일제강점기 영종도는 송산, 구읍, 대비, 신읍 등 4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인을 앞세워 영종도 땅과 갯벌을 개간한다는 이름으로 수탈하려고 했지만 섬 주민의 강한 저항으로 실패하기도 했다. 이들은 조정에는 영종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며, 나무도 없는 황무지요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허위 보고를 하고 개간 허락을 받았다. 6.25 전쟁 중에 영종도 송산과 모래부리산에 미군 고사포부대, 카투사 등이 주둔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 속의 자연도와 물치
대동여지도 속의 자연도와 물치

물치도의 기억

월미도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영종도의 고층 아파트를 등대 삼아 강화도 방향으로 올라간다. 영종대교에 이르지 못해 작은 무인도를 앞에 두고 키를 왼쪽으로 돌려 구읍뱃터에 접안을 한다. 그 무인도가 작약도다. 조선 시대에는 ‘물치도(勿淄島)’, ‘무치’라고 불렀다. 청구도, 대동지지,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는 물치도라 기록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지도에는 ‘작약도’라고 적었다. 일본인 화가가 섬을 사들인 후 섬의 생김새가 ‘작약꽃 봉우리’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물치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지만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두루 지켜본 섬이다.

물치도는 영종진 관할에 있었던 섬으로 숲이 좋아 영종방어영에 땔감을 공급했던 섬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소라양식장을 운영했고, 625전쟁 기에는 고원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전쟁 후 영종면의회가 유원지로 개발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한때 인천 근교 유원지로 송도, 팔미도와 함께 사랑을 받기도 했던 섬이다. 물치도는 섬의 이용만큼 이름도 많이 바뀌었다. 신미양요 때는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의 이름을 따서 보아제(Borsie)섬,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가 나무가 많다 하여 우디 아일랜드(woody island)라 하기도 했다. 원래 물치도는 거친 바닷물이 섬에 받친다고 해서 물치도라 했다는 지명유래가 있다. 작약도보다 물치도가 더 섬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작약도는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에 거친 강화해협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영종도 앞바다는 19세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열강 이양선의 출몰이 잦았다. 겉으로는 탐험과 측량을 내세웠지만, 이면에는 통상을 통한 이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과정에 천주교의 도입과 박해가 이어졌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이 그것이다. 고종 3년(1869) 8월 15일 구읍뱃터 앞 물치도에 프랑스 함대가 도착했다. 초지진까지 진출해 정찰한 이들은 한 달여 후 요코하마에 주둔 중인 해병대 병력까지 더해서 강화성을 함락시키고 대포, 화승총, 금은괴 그리고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해 갔다. 또 10월에는 정족산성으로 들어왔지만, 관군과 의용군에 패해 물러갔다. 이를 병인양요라 부른다. 신미양요(1871)는 미국함대가 물치도에 배를 정박시키고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하며 통상을 요청한 사건이다. 운양호 사건(1875)은 일본의 통상요구였다. 강화도에 상륙하려다 수심도 낮고 초지진에서 포를 쏘자 상륙을 포기하고 영종진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이렇게 열강들과 전투에서 희생된 영종도민를 위로하는 추모탑이 영종진공원에 세워져 있다.

영종진 공원에 세워진 영종진전몰영령추모비
영종진 공원에 세워진 영종진전몰영령추모비

 

수도권에 조개를 공급했던 갯벌은?

인천에는 모두 58개의 어촌계가 있다. 옹진군(27), 강화도(13)를 제외하면 영종도가 포함된 중구(13)가 가장 많다. 영종도에는 구읍, 송산, 운북, 신불 어촌계가 있다. 용유도에도 남북, 을왕, 덕교, 마시안 어촌계가 있고, 무의도에 큰무리, 포내, 소무의, 광명에 어촌계가 있다. 인천어시장, 소래어시장, 북성포구, 화수부두 등에 공급되는 어패류가 중구 일대의 바다와 어촌에서 공급되는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영종도에는 1990년대 공항개발 전에는 35개의 염전이 있어, 2만 5,000여 톤의 소금을 생산했다. 지금도 몇 개의 염전이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영종도에서는 갯벌에서 굴, 바지락, 가무락, 파래, 낙지, 동죽, 등을 채취하고 있다. 인천공항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갯벌이 매립되고 신도심이 만들어지면서 어촌계나 어장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도 가장 활발한 어촌계는 구읍어촌계다. 이곳은 회센터가 만들어지면서 관광어촌 형태로 바뀌었다. 신불어촌계는 북도면 섬으로 들어가는 나들목을 중심으로 역시 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은 운서지역으로 신도심으로 바뀌고 거주지도 도심 복판이 되었다. 이곳과 송산지역은 어촌계원이지만 개별적으로 채취하고 판매하는 형태다.

영종도에 남아 있는 염전
영종도에 남아 있는 염전
카페로 바뀐 염전
카페로 바뀐 염전

간척과 매립은 갯벌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산과 언덕이 함께 사라진다. 이들이 있어 갯벌이 지속될 수 있었기에 일차적인 갯벌 자원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 정화작용과 생물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외해의 어패류 자원 감소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해당 섬 주변의 문제만 아니라 인천 바다는 물론 경기만 일대에도 영향을 준다. 그나마 남은 영종도 남측 해안도로 갯벌, 용유해변, 잠진포 입구갯벌, 마장포갯벌, 무의도갯벌 등 보전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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