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4. 남극해 크릴 조업에 나서다
수산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4. 남극해 크릴 조업에 나서다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4.18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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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8번째 경사
크릴 어획물 양망 모습
크릴 어획물 양망 모습

[현대해양]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그것도 전쟁으로 절반으로 갈라진 나라. 그러한 대한민국이 세계 8번째 남극해 크릴 조업 국가로 나섰다. 1978년 12월 7일 오후 5시, 남북수산 소속 남북호(5,549t, 선장 이문기)는 정부 대행으로 국내 제1의 항구도시 부산항 제1 부두에서 배웅 나온 친지들을 뒤로한 채 닻을 걷어 올려 부산 외항까지 서서히 운항했다.

외항은 파도가 3m가 넘어 다소 거칠었지만 남북호는 전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수를 남으로 돌려 시속 18노트의 전속으로 항진했다. 초겨울이어서 그런지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남극해 크릴은 학자의 견해에 따라 잠재 자원량이 천차만별이다. 혹자는 크릴 자원량을 최대 60억t으로 추산하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10억t으로 잠정 집계하기도 한다. 물론 양쪽의 주장이 틀렸다 하더라도 세계 160여 연안국들의 연간 어획량이 1억 4,000만t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크릴 자원량이 얼마나 많은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고래는 수중에서 입을 최대한 벌려 물과 함께 크릴을 빨아들인 후 크릴만 삼키는데 하루에 50~60t짜리 고래의 경우 약 3t을 먹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대다수 해양학자들은 크릴이 ‘인류 미래의 식량자원’이 될 것임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크릴은 연안국들의 200해리 경제수역이 선포되면서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은 크릴 어체에서 혈관 개선을 돕는 물질을 추출하지만 머지않아 크릴의 식량화가 눈 앞에 펼쳐지리라 확신한다.

실제로 식량이 부족한 구 소련은 1960년대 ‘페이스트’란 식품을 만들었으나 국민 선호도가 낮아 생산을 중단한 것이다. 크릴이란 어원은 18세기 중엽 노르웨이인들이 남극해에 진출, 고래사냥을 하면서 ‘고래의 먹이’란 뜻으로 이름 지은 것이다.

남북호
남북호

3개월간의 항해

기자의 남극해 진출에 대한 꿈은 그리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해 9월 신태영 신임 수산청장이 초도순시차 부산에 내려와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시내 7개 수협 조합장들과 부산 수산계에 대한 현안 브리핑을 하고 있을 때 신 청장에 대한 특별면담을 요청했다.

회장실에는 조합장들과 수행공무원, 비서관 등 10여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신 청장이 기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왜 다리를 다쳤어?”라며 기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때 기자는 사내 축구대회에서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다녔다.

기자는 즉석에서 “남극해에 보내주십시오”라며 간청했다. 그러나 “다리가 아픈데 갈 수 있겠어?” 라고 되물었다. “예 그때까진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화는 이 정도로 끝났지만 문제는 본사와의 관계가 남아 있었다.

당시 박원근 동아일보 지방부장은 “3개월은 너무 길다. 50일쯤 취재하고 돌아올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이는 선박에 대한 개념을 너무 몰랐다고나 할까. 어쩔 수 없이 사정 얘기를 했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허락은 해주었지만 기분 좋은 내색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기자인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적도제를 지내고

날이 밝아 온다. 고요한 바다, 그리고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가 이어진다. 수평선 멀리서 드문드문 스콜이 쏟아지고 머리 위에 걸린 해가 뙤약볕 열기를 내려 쏟던 1978년 12월 25일 오후 5시 31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길게 꼬리를 잇는다.

“지금 본선은 적도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사이렌은 남북호가 적도를 완전 통과한 25초 동안 계속됐다. 곧이어 적도제가 치러졌다. 잘 삶은 돼지머리 3개, 청주와 과일, 떡으로 제사상을 차렸다. 그리고 허종수 조사단장과 사관급 선원들이 제주가 돼 해신 포세이돈에게 안전항해와 풍어를 비는 의식을 치렀다.

제사가 끝나자 맥주와 소주가 전 선원과 승객들에게 나뉘어져 모처럼 선상파티가 벌어진다. 흥겨운 노래 소리와 엉덩이춤이 절로 나온다. 적도제 기념 선상 바둑 장기 윷놀이 대회도 열렸다.

팀은 갑판부와 기관부 조사단과 보도진 등 네 팀이었다. 선미 데크에 텐트를 치고 일진일퇴하는 바둑과 장기의 겨룸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도 아랑곳없다. 마지막 결승 윷놀이 대회가 열렸다. 갑판부와 조사단팀이 결승에 나선 것이다. 이때 선미 쪽에서 분장을 한 젊은 선원들이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고 선단 측 응원에 나섰다.

누더기 옷을 걸친 이들은 기가 막힌 모습으로 연기(?)를 해낸다. 결국 응원의 보람도 없이 승리는 조사단 측으로 넘어갔다. 선상파티는 밤 12시 넘도록 부서별로 진행됐다. 그 사이 배는 남으로 항진한다. 스웰이 한 번씩 선저를 치고 훑어 나간다. 하늘까지 치솟는 파도, 그 파두(波頭)에서 흩날리는 물방울이 꼭 살아 있는 것만 같다. 날이 갈수록 육지와 멀어지는 남북호는 오직 육지 교신수단으로 통신시설 밖에 없다. 남북호에는 12MHz(메가헤르츠)를 비롯 16.22MHz 등 세 대의 통신기를 보유하고 있다.

선상에서 방금 잡힌 크릴 새우의 생태와 이용가치 등을 연구하는 조사단원들
선상에서 방금 잡힌 크릴 새우의 생태와 이용가치 등을 연구하는 조사단원들

“야, 패치(Patch)다!”

남극수렴선을 통과하면서부터 보도진들은 이들 통신기의 신세를 톡톡히 졌다. 대기전리층을 이용, 전파를 발사한다는 이 통신은 처음 남극해에서 한국까지 통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가 교신시간. 날씨가 안 좋을 땐 이틀 또는 사흘 동안 교신이 안 돼 교신량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부산을 떠난 지 만 40일, 8,700 해리를 쉬지 않고 달려온 남북호는 남극해에 이르러 너울거리는 대양에 다소 흔들리면서도 피로한 기색 없이 3번 마스트 굴뚝으로부터 잿빛 연기를 내뿜고 있다.

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새벽녘부터 내린 싸라기눈이 갑판 위에 제법 쌓였다. 부근엔 높이 40~50m, 길이 200~300m의 빙산이 빽빽이 둘러싸고 있다. “야, 패치(Patch)다!” 편광 글라스를 끼고 어군을 찾던 당직 항해사가 오랜 조타실의 침묵을 깬다. 아니나 다를까 선수 좌현 30도 방향 반경 100여m가 여느 바다와는 달리 다갈색으로 물들여져 있다. “저, 저기에도 보입니다.” 견시원들도 너나없이 선수 정면과 우현쪽 크릴을 보고 외친다. 1979년 1월 17일 오후 2시 남위 64도 42분 3, 동경 111도 32분 8에 다다른 남북호 선상.

어군이 나타났다는 얘기가 순식간에 퍼지자 선원들은 일제히 갑판 위로 뛰어나왔다. 저마다의 눈초리에는 ‘저걸 잡아야 한다’는 사나이들의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갑판원 올 스탠바이!” 이윽고 박형관 어로장(52)은 조업 개시를 명령한다. 대망의 첫 어로다. 체격 좋은 갑판원 8명이 선미 양쪽으로 갈라서자 투망명령이 떨어졌다. 크나큰 각설탕 모양의 빙산이 사방을 에워싼 그 속을 남북호는 2노트 속력으로 서서히 항진한다. ‘찌르륵 찌르륵’ 어군탐지기가 계속 크릴 분포상황을 그라프지에 그린다. 그럴 때마다 그물 입구에 장치된 발신기는 어망 속으로 들어가는 반사체(크릴떼)를 푸른 빛으로 기록지에 보내준다. 현재 기록지에 나타난 크릴은 수심 60m 층에서 떼 지어 회유하고 있다. 약 20m 그물을 더 깊이 넣어야 한다.

남극 크릴
남극 크릴

“투망개시!”

남극해의 크릴 조업은 1961년 당시 소련의 시험조사선 아카데믹 니포비치호(3,165t)가 모자라는 자국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처음으로 웨델과 스코티아 연안으로 가서 조업했다. 일본 역시 같은 해에 동경수산대학 실습선 해응환(1,250t)을 엔더비 연안으로 보낸 이후 출어 척수는 해마다 늘어 1978년엔 349t급 자선 10척이 붙은 모선 선단과 2,000~3,000t급 트롤선 9척을 파견, 4만 1,600t을 목표로 조업하고 있다.

조타실 위 망루에는 태극기가 동남풍을 타고 힘차게 펄럭인다. 2시간이 지났다. 조타실에 양망 지시가 내려진다. ‘툭 투욱’ 어망을 끌어 올리는 직경 34mm의 와이어로프가 그물과 바닷물의 장력 때문에 꽤 힘겹게 윈치에 감긴다.

“어획이 많을 땐 이 로프에 튕겨 바다에 빠지는 어부들도 적지 않지요.” 갑판장의 얘기다. 드디어 그물 끝부분이 올라온다. 마치 서해안 젓새우와 같은 크릴이 갑판 위에 쏟아진다. 첫 투망에 2.6t을 잡았다. 한 움큼씩 쥐어본다. 모두 환희에 차있다. “맛있다.” 날 것 그대로 먹어 본 어느 선원을 따라 다른 사람들도 입에 대본다.

어군을 찾는 항진이 계속된다. 저녁놀이 물들려는 오후 11시 반 남북호는 유빙 속을 뚫고 나간다.

남빙양 크릴 새우 개척단들. (앞줄 왼쪽부터) 박형관 어로장, 허종수 조사단장, 이문기 사장, 뒷줄 왼쪽 세번째가 남달성 기자
남빙양 크릴 새우 개척단들. (앞줄 왼쪽부터) 박형관 어로장, 허종수 조사단장, 이문기 사장, 뒷줄 왼쪽 세번째가 남달성 기자

유빙을 뚫고

지구 축의 경사 현상으로 남극해는 여름철이 계속되는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밤이 거의 없다. 오후 8시만 되면 어둠이 깃드는 우리나라 여름철과는 달리 해가 진 이후에도 동틀 무렵의 새벽녘과 같은 박명(薄明)이 계속된다. 칠흑 같은 어둠은 찾아볼 수 없다. 놀이 막 수평선 너머로 빠지려 할 때 유빙 속을 항해하는 기분은 어디에도 비길 바 없다.

눈송이처럼 곱게 핀(?) 얼음조각들이 선체 양현을 스친다. “꽝!” 어느 틈에 유빙이 좌우현에 부딪힌다. 얼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선체 밑바닥에서 검붉은 녹물이 바닷물에 퍼진다.

선수 정면에서는 계속 곰이나 낙타 모양을 한 것들이 매섭게 돌진해 온다. 남북호가 엔더비 어장으로 이동할 때 선수 좌현과 선미 쪽에서도 무리 지은 고래들이 연신 심호흡을 위해 새까만 몸뚱이를 수면 위로 드러내 보인다. 저 멀리 이들 고래를 쫓는 포경선의 마스트가 가물거린다.

“투망개시!” 조금 전부터 탐지기를 작동하던 조타실에선 불쑥 나타난 어군을 보고 또 투망을 지시한다. 부근 빙산에서 떼 지은 갈매기들이 대양을 가로 지른다. 불과 30분 만에 그물을 끄집어 올린다. 19.65t이나 잡혔다. 수온은 영하 0도선. 엄청난 어획이다.

 

다양한 조업

크릴은 명태나 도미 오징어 등의 저서 어족과는 달리 반드시 탐지기에 의해서만 잡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 어군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고래나 펭귄, 바다표범 중 크릴을 주식으로 하는 제2의 동물을 보고 얼마든지 그물을 던져도 된다. 수직회유를 하는 크릴은 낮에는 수심 200m로 내려갔다가 밤에는 거의 표층까지 올라오는 습성을 이용, 갈매기가 쉬고 있는 빙산을 찾는 것도 좋은 어획 방법의 하나다.

이 같은 방법으로 어장 도착 이후 1979년 2월 13일까지 27일(실조업 일수 17일)동안 102회 투망, 총 510t의 크릴을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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