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대기자 남달성의 회상3. 지상낙원 팔라우서 가다랑어를 잡다
수산대기자 남달성의 회상3. 지상낙원 팔라우서 가다랑어를 잡다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3.16 07: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참치 채낚기

[현대해양] 1975년 4월 기자가 취재현장으로 달려간 그때 팔라우에는 130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국제원양’과 ‘유창산업’ 소속 어선원 80명, 소시오(대표 정병욱 괌도 교민회장) 건설단원 50명, 중앙산업과 조선기술자 등. 이들은 어떤 직종이든 평균 35~36℃를 오르내리는 숨막히는 뙤약볕 더위를 감내하면서 달러를 버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국제원양 소속 어선원 55명은 자사 소유의 어선 3척에 나눠 타고 가다랑어잡이에 나서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가다랑어는 1970년대 중반만 해도 팔라우 지역의 달러박스였다. 어선 한 척이 잘만 하면 하루에 4~5t 어획은 거뜬히 할 수 있어 달러 가치가 높았던 그 시절에도 하루 1,000~1,300 달러를 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가다랑어는 그물로 잡는 방법도 있으나 그땐 미늘 없는 낚시로 채 낚는 게 대세였다. 

 

대양에 떠다니는 유목. 길이 10여미터, 직경 0.8미터 안팎의 유목 아래엔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군이 항상 몰린다.
대양에 떠다니는 유목. 길이 10여미터, 직경 0.8미터 안팎의 유목 아래엔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군이 항상 몰린다.

유목을 찾아라! 

취재에 열중하던 기자는 어느 날 가다랑어잡이 어선 오레김호(38t, 선장 남영택)를 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오레김호는 밤 9시쯤 팔라우 제1의 항구 코롤항을 떠났다. 우선 가다랑어가 즐겨 먹는 활멸치를 잡기 위해 산호초가 많은 해역을 찾아 아주 작은 그물코로 3시간 이상 작업했다. 어창에는 등줄기가 검은색을 띤 몸길이 5~6cm 짜리 멸치가 LED 등불에 반사돼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오레김호 어선원은 모두 16명. 하지만 어군이 대량으로 몰려올 땐 조타실에 타수 한 명과 기관실에 기관원 한 명 등 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가다랑어 잡이에 나선다. 그들은 선수 앞부분이나 선미 쪽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 미늘이 없는 속임 낚시로 가다랑어를 채 낚아 데크 위에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글라스맨(망지기)들의 역할이 지대하다. 각자 사방으로 방향을 잡은 4명의 글라스맨들은 동이 틀 무렵부터 상갑판 위에 올라가 가다랑어 어군을 찾는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글라스맨들은 물속 깊숙이 있는 가다랑어 어군을 볼 수 없어 하늘에서 떼 지어 맴도는 갈매기 떼를 직접 찾거나 아니면 대양을 떠다니는 나무토막(流木)을 찾아 나서는 게 일상입니다. 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아래 위로 질서 있게 움직이면 반드시 그 바닷속엔 가다랑어 대군(大群)을 만날 수 있지요. 그렇지 않고 새치나 잡어 떼가 있는 수면 위에서는 갈매기 떼가 궤도를 벗어난 채 무질서하게 움직이지요. 또 바다 위를 오래 떠다니는 길이 15~20m, 지름 1~1.5m 정도의 유목은 하나의 어초 또는 어부림 역할을 해 어군이 몰려들게 마련입니다”라고 글라스맨 김경남 씨(36)는 설명했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에선 해마다 5,000개 이상의 원목을 바다에 띄워 가다랑어 어업을 육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기자는 할 말을 잊었다. 오전 11시쯤 김 씨의 망원경에 유목 한 개가 포착됐다.

 

데크에 쌓이는 가다랑어

“풀 스피드!” 

남선장의 명령에 따라 우리 배는 대양의 물결을 가르고 앞으로 힘차게 항진했다. 선미에선 오레김호가 항적을 표시할 양으로 흰 포말(泡沫)을 연신 뿜어댔다. 그러나 그 포말은 오래가지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우리 배가 최고속력으로 달릴 때 어느 틈에 유목을 보았는지 일본어선이 나타났나 했더니 또 다른 한쪽에선 같은 한국어선인 게림디오호(38t)가 숨차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유목을 향해 세 척의 어선은 전쟁을 치르 듯 마구 달렸다. 40분쯤 지났을까? 어선 세 척이 거의 동시에 유목 500m 가까이에 다다르자 선원들은 미리 준비해 온 활멸치를 살수(撒水)와 함께 뿌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수심 200m 물밑에 있던 가다랑어가 멸치 냄새를 맡고 거의 수면 위로 올라와 던져준 활멸치를 잡아먹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타실의 키잡이와 기관실의 기관원 한 사람을 제외한 14명의 선원 모두가 뱃머리와 꼬리 쪽에서 속임낚시가 달린 길이 2m가량의 대나무로 가다랑어를 채낚는다. 은빛 가다랑어가 낚싯줄에 걸린 채 공중으로 획 날다간 데크 위에 툭 떨어지곤 한다. 툭! 툭! 투우욱! 숨 쉴 사이 없이 데크에 떨어지자 제법 소복이 쌓인다. 1분, 2분, 3분... 5분쯤 지났을 무렵, 데크 위에는 2t 가량의 가다랑어가 쌓였다. 

기자는 이 현장을 흥미진진하게 구경만하다가 남 선장의 권유에 따라 낚시대를 흔들어 20마리 이상을 잡았다. 한 마리 무게는 작은 놈이 3kg, 큰 놈은 5kg 짜리도 적지 않았다. 오레김호는 귀항길에 또 한 차례의 어군을 만나 모두 5t 가량의 가다랑어를 낚았다. 팔라우에 기지를 삼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를 비롯, 일본 및 팔라우 등 3개국이고 조업어선이래야 모두 13척에 불과하다.

지난 3월 유창산업 배 2척이 이곳에 온 것을 포함, 한국이 5척이고 같은 어장에서 낚시질 하는 일본이 5척이었다. 현지 주민 소유는 3척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선원들은 현지 주민이나 일본 선원들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취업하고 있긴 하지만 한결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가다랑어 어업은 겨우 5년 안팎에 불과합니다. 일본의 30년에 비하면 풋내기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이제 척당 한 달 평균 90t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지요. 장비와 기술이 앞선 일본의 1백t에 바짝 다가서고 있습니다.”

오레김호 서옥석 항해사(29)의 숨김없는 얘기였다. 잡은 가다랑어는 판로가 제 각각이다. 우리나라는 주로 통조림으로 가공, 수출하거나 국내 시판에 나서는데 2000년대까지 소비량이 증가했으나 그 이후론 일정량을 유지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일본은 전량 자국에 들여와 통조림과 함께 사시미(생선회)로 대량 소비한다. 

생선회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 일본은 생선회로 소비하는 물량이 1975년 당시 연간 37만~38만t을 헤아리고 있었다. 요즘은 그 소비량이 전보다 늘었으면 늘었지 줄진 않았을 것이란 게 기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가다랑어는 횟감용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참다랑어가 그 첫째다. 그 만큼 값도 비싸다. 1979년 8월 일본 동경 어느 참치 횟집에서 선배 한 분과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선배는 4조각만 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나는 너무 맛이 있어서 더 먹고 싶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조각에 380엔(한화 3,800원)으로 엄청나게 비싼 편이었다. 당시 환율은 180대 1이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비싼 회 한 조각을 놓고 세 번 먹는다고 한다. “우선 고급 생선회가 식탁에 올라오면 눈으로 먹고, 두 번째는 손으로 만져 그 촉감으로 맛을 본다. 그리고 마지막엔 혀로 맛을 음미한다”는 것이다.

 

팔라우 석호
팔라우 석호

신들의 낙원

참다랑어는 미국과 캐나다 사이 뉴파운드랜드 근해와 하와이 북동쪽, 그리고 호주 남쪽 바다 및 지중해 연안에서 나지만 생산지역에 따라 값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참치류는 먼 바다 즉 원양에서 대부분 잡기 때문에 영하 60℃ 이상의 저온에서 저장한다. 그러나 팔라우에서 잡은 가다랑어는 그대로 일본으로 공수되기 때문에 선호도가 꽤 높은 편이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소유권자인 독일로부터 팔라우를 사들였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야욕이 있었는가에 대해선 물음표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전쟁 전에는 농수산업 경영과 전기와 수도시설을 갖추는데 전력을 쏟았다. 그래서 태평양 함대사령부를 설치한 것 같기도 하다. 

실로 팔라우를 여행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신들의 낙원’으로 표현한다. 혹자는 ‘지상천국’ 또는 ‘남태평양의 숨겨진 보석’이라고도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팔라우는 졸망졸망한 섬 사이에 산호초로 일궈진 석호(潟湖, 일명 Lagoon)도 유명하지만 그 석호에 부딪히는 쪽빛 바다 물결과 백색 파도가 어우러져 더 아름다워 보인다. 또 다이빙의 천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전통가옥인 ‘바이’도 멋스럽다. 그러나 우리와는 슬픈 지난날을 잊을 수 없다.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팔라우의 코롤항 선창가에서 구성진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혼자서 부르는 게 아니라 여럿이 부르고 있었다. ‘아리랑’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심심찮게 부르곤 한다. 혹시 한국인이나 2세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곳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노래를 썩 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 사람들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 이곳에 온 징용인은 8,000명이 넘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이판과 티니안까지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2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주로 농장에서 코프라를 생산하거나 광산에서 인산염을 채굴하다가 일이 너무 힘에 겨우면 ‘아이고 죽겠다’를 되뇌었다고 현지 주민들은 귀띔했다. 이 곳 어느 지역에 징용된 334명 가운데 151명이 현지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고 다리’

팔라우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 경기도 이천시와 비슷한 459㎢, 340개의 섬으로 구성된 국가다. 그러나 인구는 2만 1,500여 명 안팎이다. 그럼에도 2021년 기준, 국민 1인당 GDP는 1만 달러. 이 가운데 관광수입이 전체의 50%에 육박한다. 지난 1994년 11월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팔라우는 자연환경 보존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코로나 확진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공항 관리와 외지인에 대한 검사가 철저하다. 

독립 이전에는 미국의 자치보호령이었다. 그들은 주로 망고와 다비오카 파파야 등 열대성 과일을 주식으로 하고 약간의 환각작용을 하는 비틀너트 열매와 산호를 으깨 만든 라임가루를 섞어 씹는 것을 즐긴다. 재미있는 사실은 주민이나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음주허가증 없이는 술을 마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 때는 5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다. 또 이들에게 술을 판 술집은 한 달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는다. 

이같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것은 마이크로네시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곳 청소년 범죄가 말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만 20세가 넘은 성인에 한해 음주허가증을 발급한다. 유효기간이 1년이면 10달러, 한달 짜리는 2달러만 주면 된다. 

주목할 것은 최근 우리나라와 팔라우간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생겨나고 있다. 지구 온난화에 따라 해수면이 높아지자 수랑겔 휩스 팔라우 대통령은 지난해 5월 18일 자국을 한국의 제주도에 예속시키겠다고 폭탄선언을 함으로써 세계가 주목하게 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해양 플란트공법이 가장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돼 고초를 겪은 역사적 사실을 팔라우 주민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우호적이다. 지금 그곳에 있는 코롤과 응게가페상섬, 코롤과 말라카섬, 코롤과 바벨탑섬을 잇는 연육공사를 한국인들과 현지주민들이 건설했다. 교량명은 ‘아이고 다리’다. 한국인 희생자 추모공원이 있고, 팔라우 비경에 반해 그곳에 정착한 한국인들도 있다.

 

아이고 다리
아이고 다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