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 과학으로 넓히는 대한민국 외교 지평
극지 과학으로 넓히는 대한민국 외교 지평
  • 서원상 국제법평론회 회장/극지연구소 전략기획부장
  • 승인 2023.03.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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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상 국제법평론회 회장/극지연구소 전략기획부장

오늘, 과학외교의 시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통합적 접근은 어느새 거스르기 어려운 시대적인 흐름이 되었다. 2018년 자연과학의 국제학술연합회의(ICSU)와 사회과학의 국제사회과학협의회(ISSC)가 하나로 뭉쳐 국제과학협의회(ISC)로 단일화된 것이 상징적인 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접목에 현장성을 더하면 ‘과학외교’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과학외교는 과학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외교의 역할, 외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역할을 모두 담고 있는 쌍방향 개념이다.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보편성과 객관성이라는 가치가 국가의 과학기술력으로 전환되면 국제사회의 외교현장에서 자국의 주장에 설득력을 배가하는 소위 ‘소프트 파워’로 작용되기 마련이다.

21세기의 외교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보존, 해수면상승, 보건, 에너지문제 등 인류의 공동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국제 규범의 채택 과정에서 과학적 정보와 지식에 의지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UNFCCC) 체제를 통해 과학과 외교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전 세계 과학자가 참여하여 발간하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평가보고서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와 정책방향을 제시하였고, 기후변화 이슈에 관한 정부간 교섭의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1990년 제1차 평가보고서 발표에 이은 1992년 기후변화협약 채택, 1995년 제2차 평가보고서 발표에 이은 1997년 교토의정서 채택, 2014년 제5차 평가보고서 발표에 이은 2015년 파리협정 채택의 예만 보더라도 다자간 외교와 국제 규범 형성에 앞서 과학이 선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21세기의 과학은 소위 ‘과학기술 패권경쟁’ 속에서 외교의 도움을 받거나 외교의 수단 또는 무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최근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의 주도권을 두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반도체나 배터리 분야에서 나름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국제시장의 큰 손 사이에서 신중한 전략적 선택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과학기술과 산업이 시장의 영역을 벗어나 국가 안보와 외교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극지, 과학외교의 현장
남극대륙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특정 국가에게 영유권이 부여된 적이 없는 육지이고, 중앙 북극해 공해(CAO)는 아직까지 인간의 손에 의해 개발되지 않은 소중한 청정 해역이다. 동시에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에 따라 가장 빨리 영향을 받은 지역인 남극과 북극은 육상과 바다의 얼음을 녹여 전 지구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또한 남극과 북극에는 추위에 특화된 생명체의 비밀이 숨어있고, 그 지하와 해저에는 정확한 양을 추산하지 못할 정도의 에너지·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이처럼 극지는 지정학적으로, 환경적으로, 경제적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국제외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극지의 외교에는 어김없이 ‘과학’이 등장한다.

아문센, 스콧, 섀클턴과 같은 유럽 탐험가들의 영웅담으로 알려졌던 남극대륙도 20세기 들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활동이 가능해지자, 영국, 뉴질랜드, 프랑스, 호주, 노르웨이, 칠레, 아르헨티나 등 총 7개국의 영유권 주장이 교차하는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57~1958년의 국제지구물리의 해(IGY)를 맞아 전 세계 과학자들이 국적의 벽을 허물고 협력적인 과학연구 활동을 경험함으로써, 1959년 남극대륙에서 다수 국가의 평화로운 공존을 약속하는 남극조약(Antarctic Treaty)을 견인할 수 있었다. 남극조약은 남극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동결하고 남극대륙이 평화적 목적으로만 이용되어야 한다면서도, 남극에서 과학적 조사의 자유와 이를 위한 협력이 계속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비핵, 비무장의 남극평화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회원국 간의 소통 수단으로 과학 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1996년 오타와 선언을 계기로 창설된 정부간 협의체인 북극이사회(Arctic Council)는 북극의 환경보호와 발전을 위하여 북극환경오염물질조치, 북극모니터링평가, 북극동식물보전, 비상사태예방준비대응, 북극해환경보호, 지속가능발전에 관한 워킹그룹을 운영하고 있으며, 각 워킹그룹은 과학 활동 및 협력에 기반을 두어 운영되고 있다. 특히 2017년에 채택되어 2018년에 발효된 ‘국제북극과학협력증진협정’은 북극의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보호가 협력적 과학연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철학 아래 데이터 수집을 위한 연구대상지역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과학 데이터 공유, 학생과 신진과학자들의 교육 및 경력개발을 지원하는 내용을 국제조약으로 채택하고 있다. 남극과 마찬가지로 북극에서도 환경보존을 위한 다자 외교 채널에 과학을 핵심으로 두고 있고, 그 과학적 협력체계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국제조약이라는 외교적 방식을 택하였다.

한국, 극지과학의 외교적 가치와 미래
과학외교(Science Diplomacy)에 대한 확립된 정의는 없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2010년 영국 왕립학회가 펴낸 「과학외교의 새 지평」이라는 보고서를 인용하여 과학을 위한 외교, 외교 속의 과학, 외교를 위한 과학 등으로 과학외교의 개념을 소개한다. 
첫째 과학을 위한 외교(Diplomacy for Science)란 과학의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외교를 뜻하며, 과학 자체가 목적이 되고 외교는 과학기술을 위한 통로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둘째 외교 속의 과학(Science in Diplomacy)이란 다자간 외교의 틀 안에서 과학적 활동이 보장되고 과학적 지식이 활용되는 유형으로, 과학적 자문에 근거하여 국제사회의 외교적 이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셋째 외교를 위한 과학(Science for Diplomacy)이란 국가의 대외정책 목표달성 및 국가 간의 관계 증진을 위한 과학을 뜻하며, 과학기술이 외교의 기반을 제공하고 과학을 통해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형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극지과학은 어떠한 형태로 과학외교를 수행하고 있을까.

해양수산부의 극지R&D 중에는 과학외교적 가치에 주목할 만한 사업이 꽤 있다. 우리나라는  남극에서 조업과정의 문제로 두 차례나 예비불법어업국가로 지정되었다가 해제된 바 있다. 그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친환경적 의지를 보여준 계기가 ‘로스해 해양보호구역의 해양생태계 연구’ 사업이었다. 남극해양생물자원보존위원회(CCAMLR)에서 로스해 해양보호구역을 선포한 이듬해에 착수한 이 과제를 통해 남극해양생태계 보존을 위한 국제협력을 제안하여 회원국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일신하고 외교적 호평을 얻을 수 있었다.

올해 착수하는 ‘남극 빙상용융에 따른 해수면상승 예측기술 개발’ 사업은 제7차 IPCC 평가보고서 작성과정에 참여하여 기후변화협약 체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나라 해안침식에 대한 데이터를 조속히 확보하여 한반도 재난대응에 기여함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수면 상승은 육지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섬을 가라앉게 할 것이기에 저 멀리 적도부근 섬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주변의 한·중·일 해양문제에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즉 우리 연구진이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수면 상승을 예측하는가에 따라,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는 물론 한반도 주변 해역에 대한 선제적 외교 전략 수립이 가능해진다.

‘중앙북극해공해 비규제어업 방지협정’은 우리나라가 북극 거버넌스에서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조약이다. 이 조약은 사전주의적 접근(precautionary approach)을 원칙으로 16년간 과학 조사를 거쳐 미래 북극해의 조업 가능성을 타진하게 되는데, 첫 당사국 총회가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우리 정부와 전문가 그룹의 적극적인 활동에 기인한 것이지만, ‘북극해 온난화-해양생태계 변화연구’ 사업과 같이 아라온호를 활용한 북극해 국제공동연구가 북극권 국가와의 신뢰 확보에 밑거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개의 R&D 사업은 ‘외교 속의 과학’에 가깝다. 국제규범이라는 외교적 틀이 과학적 정보를 요청하고, 이러한 과학적 정보의 제공과 국제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에 기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리더가 되려면 ‘외교 속의 과학’으로부터 ‘외교를 위한 과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국가 과학 역량이 외교적 이슈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만큼 압도적인 힘이 되어줄 때, 과학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에서 선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극지활동진흥기본계획에 따르면 2027년에 차세대쇄빙연구선이 취항하여 아라온호와 함께 남·북극 결빙해역을 누비고, 2033년이면 북극의 육상(환북극관측거점)-해상(차세대쇄빙연구선)-항공(위성)으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북극종합관측망이 완성될 것이다. 또한 남극내륙진출로(K-Route)를 기반으로 연구거점을 확보하여 세계 7번째로 내륙기지를 운영하는 국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극지인프라의 구축은 목표가 아니라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의 이동수단이다. 차세대쇄빙연구선 건조사업이 예타를 통과한 배경에는 국내 산·학·연의 104건의 연구수요가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그 모든 연구수요가 기후변화, 생태계보존 등 국제 현안의 해결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또한 우리가 남극내륙으로 진출하는 이유도 현재의 기후변화 현상과 가장 유사했던 100만 년 전의 기록을 담은 심부빙하를 찾기 위함이고, 우주 진출에 필요한 테스트 베드로서 남극내륙이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극지과학이 ‘외교 속의 과학’으로부터 ‘외교를 위한 과학’으로 나아가려면, 연구인프라의 확보와 함께 그 인프라를 활용하여 외교문제를 해결할 정도의 압도적인 과학기술을 확보하기 위하여 어떤 주제의 과학연구에 투자해야 할 지 중장기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다. 동시에 이들 자연과학 연구자와 함께 과학의 외교적 가치를 극대화시킬 과학을 이해하는 국제법 전문인력의 양성도 병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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