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1. 벌교 꼬막인심, 다시 돌아올까(2)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1. 벌교 꼬막인심, 다시 돌아올까(2)
  • 김준 박사
  • 승인 2023.03.15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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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홍교의 모습(일부 훼손되어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음)
1986년 홍교의 모습(일부 훼손되어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음)

[현대해양] “시장에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제. 사람이 그라고 많았어.” 

꼬막이 가장 맛이 좋을 때라는 정월, 벌교시장에서 꼬막전에서 만난 주인이 하는 말이다. 물론 옛날 말이다. 지나다가 막걸리 한 잔에 꼬막 안주 쉽게 얻어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다. 이렇게 사람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다와 갯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벌교는 산과 들이 만나 바다로 나가는 나들목에 있다. 순천 조계산과 낙안벌과 여자만이 만난 곳이다. 수탈의 눈으로 조선을 훑어보던 일본 상인의 눈으로 보면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 뒤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무소불위의 약탈자가 된다. 지금도 다를 바 없다. 근대교통체계가 뱃길에서 철도로 바뀌면서 벌교는 더욱 주목받았다. 그리고 1930년 송정리와 부전리를 잇는 경전선이 생기고, 국도가 만들어지면서 고흥과 보성의 농수산의 물산을 수탈하는 통로가 되었다. 

2018년의 홍교, 복원되어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2018년의 홍교, 복원되어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갯벌다리, 벌교읍이 되다

역사적으로 보면 벌교는 낙안군의 치소로, 여말선초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낙안면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기 까지 ‘낙안포’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벌교’라는 지명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조선조 초기에는 벌교(伐橋)라 하고, 이후는 벌교(筏橋)라 했다. 다른 한자를 사용했지만 ‘벌다리’에서 왔다고 해석한다. 갯벌에 놓인 다리라 주민들은 ‘뻘다리’, ‘벌개다리’라고 불렀다. 또 홍수나 큰물이 들면 다리가 자주 끊어져 ‘끊긴다리’ 즉 ‘단교(斷橋)’로 표기하기도 했다. 

1958년 홍교의 모습과 장터에 모인 사람들
1958년 홍교의 모습과 장터에 모인 사람들
홍교중수비 - 홍교의 역사를 기록한 석비
홍교중수비 - 홍교의 역사를 기록한 석비

옛 지명을 보면 다리는 ‘물을 건너는 시설’ 외에도 ‘배가 닿는 곳’을 일컫기도 했다. 그래서 배가 닿는 포구를 배다리라 했다. 그곳이 지금 홍교(虹橋, 보물 제304호)가 있는 곳이다. 나무다리가 자주 훼손되고 끊어지자 모후산(화순 소재) 대광사의 초안대사의 설계로 1705년(숙종 31) 만들어지고, 이후 중수를 거듭했다. 홍교 옆에는 다리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들이 있다. 보성출신 성리학자 청광자 박시형(1635~1706)이 지은 ‘낙안군단교비문’에는 ‘낙안읍에서 보성흥양순천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나루터에 대광사 초안대사에 의해 다리가 세워졌다’고 기록했다. 또 ‘다리 주변에 상선이 많이 정박하고, 현지인들은 시장을 개설해 장사로 생업을 했다’고 한다. <해동지도>나 <여지도서> 등 옛지도에 다리가 그려져 있다. 

1872, 낙안읍성과 벌교다리가 표시된 낙안군지도 일부
1872, 낙안읍성과 벌교다리가 표시된 낙안군지도 일부

이후 벌교는 1908년 낙안군이 폐군되며 보성군에 편입되었다. 1915년 고상면과 남면이 합해져 벌교면이 되고, 1937년 벌교읍으로 승격되었다. 여자만 동쪽으로 장도를 끝으로 여수와 북쪽으로는 순천과, 남쪽으로는 고흥과 경계하고 있다. 또 조계산(산)과 낙안들(들)이, 벌교천(강)과 여자만(바다)이 만나는 곳이다. 지금처럼 도로와 철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남해에서 광주와 화순으로 이어지는 뱃길의 중심이었다. 이곳에 해방후까지 윗장터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한국수산지> 3권에는 ‘남해안에 위치한 시장 중에서 하동읍 시장과 함께 가장 큰 규모’라고 했다. 당시 벌교천은 ‘홍강(虹江)’이라 불렀다. 이후 다리의 이름은 지명이 되어 벌교리가 되었다.

벌교가 이렇게 상업과 교통의 중심이었던 까닭에 보성읍과 미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벌교사람, 벌교꼬막, 벌교갯벌, 우리는 벌교제 보성이 아니어’라는 자존심을 벌교시장에 만날 수 있다. 1930년대 경전선이 개통되고, 동서로 2번 국도와 광주와 고흥을 잇는 15번 국도가 교차하는 중심에 벌교가 있다.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1925년대 인구로 볼 때, 목포(2만 6,718명)와 광주(2만 3,734명)에 이어 벌교(1만 6,500명)로 인근 여수와 순천보다 큰 도시였다. 이렇게 면적이나 인구로 볼 때 보성군청이 있는 보성읍보다 2배나 크고, 유일하게 바다와 섬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게다가 생활권도 오래전부터 낙안군에 속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교통과 거리에서도 광주와 가까웠다. 

 

벌교 선진공원에 세워진 의병장 안규홍 동상
벌교 선진공원에 세워진 의병장 안규홍 동상

주먹보다 꼬막 인심이었는데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벌교에서 주먹은 일제에 저항하는 주먹이라는 항변이다. ‘벌교선근공원’에 가면 오른 주먹을 불끈 쥔 ‘주먹 조형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한 일본 순사를 때려눕힌 담살이(머슴) 안규홍 의병장의 주먹이다. 

이보다 앞서 왜구들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자 남해안 일대에 해안방어기지가 구축됐는데, 낙안군 수군선소는 지금의 진석리에 설치되었다. 조선후기 ‘진석포’라 불렸는데, 주민들은 ‘선수’라 부른다.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해역에 출병할 때 낙안수군의 박영남, 김봉수 장군 등이 참여하여 연승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정유재란시에는 낙안사람들의 해상의병활동도 주목할만하다. 이후 벌교포 장터를 중심으로 항일의병투쟁이 끊이질 않았고, 낙안군 폐군 직전에는 일본 헌병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1908년경 벌교장터에서 ‘안대장’이라 불리던 젊은 장사가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을 때려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의병장 안규홍이었다. 벌교 주민들도 안대장처럼 용감했다. 주민들은 벌교의 자존심인 홍교를 훼철하고 일본 천황이 연호인 소화다리를 놓는다는 결정에 전남도청을 방문해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경전선 철도개설공사 도중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자귀질로 중상을 입힌 사건(중외일보, 1930.5.23.)으로 벌교 읍내에서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후 벌교의 항일민족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벌교장에서 만난 꼬막 파는 상인은 벌교의 자랑은 인심이라 했다. 특히 ‘꼬막인심’을 으뜸으로 꼽았다. 벌교장은 오가는 사람에게 막걸리 한 사발에 꼬막은 그냥 내놓는 곳이라고 했다. 겨울철 산더미처럼 꼬막을 쌓아두고 일하다가 오가는 사람에게 한 됫박 담아주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었다. 20년쯤 되었을까. 여자만의 장도주민들을 따라 겨울철 꼬막 채취에 나섰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삶아 먹으라며 꼬막 한 자루를 선물로 건네주었다. 20킬로그램쯤 되는 양이다. 꼬막 인심이 그랬다. 평생 먹은 꼬막 중에 제일 맛있게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곳간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 참꼬막이 자취를 감추니 인심도 사라졌다는 것. 벌교사람들에게 곳간은 갯벌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

벌교대포리 당제, 선창에서 당제를 준비하는 벌교읍 대포리 주민들
벌교대포리 당제, 선창에서 당제를 준비하는 벌교읍 대포리 주민들

갯벌이 잉태한 공동체성, 어찌될까

바다를 끼고 있는 어촌, 특히 상업이 활발하거나 어업 활동이 활발한 마을이나 지역에서는 정월이면 당산제나 풍어제 등이 활발하다. 벌교도 그중 하나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건을 겪은 후 망자나 지역주민의 해원을 담은 것도 중요한 이유다. 여기에 벌교 꼬막축제 등 지역축제와 연결되면서 마을 의례나 굿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옛날같지 않지만 대포리 당산제, 장좌리 당산제 등이 유명하다. 대포리는 고흥과 경계에 있는 전형적인 바다 마을이며, 장좌리는 벌교 읍내에 위치한 마을이다. 

2008, 벌교 장좌리기맞이별신굿 중 벌교에서 고흥으로 이어지는 선근교 무사운행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고사
2008, 벌교 장좌리기맞이별신굿 중 벌교에서 고흥으로 이어지는 선근교 무사운행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고사
벌교 장좌리 별신당제를 지내는 당집
벌교 장좌리 별신당제를 지내는 당집

대포리 당산제에는 당할머니 외에 갯귀신제에게도 제물을 올리고 평안과 풍어를 기원한다. 정월 날을 받아 새벽에 당제를 지내고 다음날 새벽 당제를 지낸 음식을 조금씩 뜯어 담은 헌식꺼랭이를 가지고 갯벌로 가서 갯귀신제를 지낸다. 바다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갯귀신을 달래는 의례다. 장좌리 당산제 중에는 ‘원님놀이’가 있다. 그중 죄를 지은 사람을 잡아다 다스리는 놀이(치죄)가 있다. 마을에서 불효나 공동체 질서를 어긴 사람을 잡아다 죄를 묻는 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을 잡아다 치죄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풍습이라 그들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벌교는 여순사건의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은 소설 태백산맥을 낳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꼬막 축제에서는 희생자와 가족의 원을 푸는 해원굿을 펼치기도 했다. 이제 그 갯벌을 인간중심이 아니라 생명과 생태계 중심으로 내려놓아야 할 때다.

2009, 벌교역 광장에서 펼쳐진 좌우익 희생자 해원굿
2009, 벌교역 광장에서 펼쳐진 좌우익 희생자 해원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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