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대기자 남달성의 회상1. 사할린 연어 이야기
수산대기자 남달성의 회상1. 사할린 연어 이야기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1.1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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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달성 대기자
남달성 대기자

기자생활 45년 중 수산 전문기자로 30년을 뛴 ‘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코너를 시작한다. 남 대기자는 1975년 수산과학원 소속 태백산호에 승선, 35일간 중서부 태평양 마이크로네시아 상어 시험조업 현장 취재, 1978~1979년 91일간 남북수산 소속 남북호에 승선해 국내 최초이자 세계 8번째 남방양 크릴 시험조업 취재, 1988년 30일간 고려원양 개척호에 승선해 북태평양 명태 조업 취재 등 수산 현장을 누볐고 한국수산신문과 한국수산경제신문에서 사설과 칼럼을 쓰는 등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수산 분야 대기자이다. 그의 취재수첩에 기록된 수산 주요 장면을 12회에 걸쳐 연재키로 한다. <편집자주>

크레인으로 강물 속 연어를 잡고 있었다. (출처_대양에 선 개척자들, 남달성 저)
크레인으로 강물 속 연어를 잡고 있었다. (출처_대양에 선 개척자들, 남달성 저)

[현대해양]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보다. 그해 따라 유난히 더웠고, 잡풀도 무성히 자랐다. 한낮에 더운것은 어쩔 수 없다고하지만 밤에도 여전히 후끈거렸다. 자연 저녁을 먹고 동네 어르신들은 물론 내 또래들도 길바닥에 멍석을 깔고 앉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연신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가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바람 없는 날이면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또 모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깃불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모깃불이 잘 일지 않으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눈물만 자꾸 흘리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내 또래들은 맑은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자리를 찾거나 별자리 숫자가 늘어나면 동요를 부르기도 했다.

어른들은 집안 얘기와 함께 시국에 대한 견해를 서로 나누었는데, 때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유난히 가난했다. 1950년, 당시만 해도 선풍기 하나 없었고 요즘같은 효과좋은 모기 살충제 역시 찾기 힘들었다. 그래도 하루 세끼 밥만 제대로 먹으면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유난히 가난했다. 축구를 워낙 좋아했던지라 어슴프레하게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하다가 집으로 가노라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떨구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놀이가 시들해지자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할배한테 재미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댔다. 할배는 긴 담뱃대에 연초를 꾸욱꾸욱 눌러 담고 한 모금 빨아댄다.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할배가 천천히 “옛날 옛적에” 하고 입을 떼자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운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멸치다, 멸치!” 라며 밖에서 큰 소리를 내른다. 멸치 주워담기를 알리는 것이다. 동네 아낙들은 물론 어른들도, 아이들도 멸치를 담을 소쿠리나 양푼이를 들고 바닷가로 내달린다. 거리래야 불과 15~20m 안팎.

산란기를 맞아 대군을 이룬 멸치 떼는 바닷가 자갈밭이나 큰 바위에 부딪혀 산란한다. 파닥파닥거리는 그 소리가 워낙 커 동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기자는 난생처음으로 멸치를 주워 담아 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 한 번도 멸치 떼가 몰려온 적이 없었다. 멸치 자원이 그만큼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멸치를 주 어획 대상으로 하는 멸치권현망수협에 따르면 옛날과 달리 요즘엔 육지에서 50~70마일은 나가야 겨우 그런 멸치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체장 8~10cm, 체중 15~20g 안팎의 이 멸치는 젓갈용으로 쓰이거나 엑기스를 뽑아내 김장철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멸치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 사할린의 연어잡이 생각이 떠오른다. 얘기가 다소 궤도를 벗어났지만…

1991년 8월 20일 지미필름사(대표 김지미)가 영화 ‘명자, 아키코, 쏘냐’를 찍기 위해 국내 영화사상 처음으로 전세 비행기를 타고 구소련 사할린 현지로케를 떠났다. 당시 나는 동아일보 기자였다. 기자 6명을 포함, 촬영팀 64명을 태운 이 비행기는 김포공항을 이륙해 3시간 10분만에 수도 유지노 사할린스크에 도착했다. 인구 17만 명의 유지노 사할린스크는 때마침 고르바초프 실격과 관련, 소련 정변 발생 2일째를 맞아 혼란과 침울로 뒤덮인 분위기였다.

영화 ‘명자, 아키코, 쏘냐’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한 여인의 일대기를 통해 2차대전 당시 얼어붙은 땅 사할린에 징용으로 끌려간 교포 1세들의 통한의 삶과 망향의 한을 그린 작품이었다. 주로 로케 현장은 한인 징용자들이 건설한 비행장과 철도가 놓인 유지노 사할린스크와 징용관원들이 드나들어 귀국선의 애환이 서린 코르사코프 항구 및 탄광촌 부이코 등 이었다. 이장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에는 김지미, 이혜영, 이영하, 김명곤 등 국내 톱스타들이 출연, 연기 대결을 벌였다.

사할린 취재 여운이 지금까지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새하얀 피부와 늘씬한 몸매를 지닌 백러시아계의 젊은 여성들이 반겨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볼셰비키 혁명(1917년) 이후 긴 긴 세월 동안 어둡고 폐쇄된 사회에서도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과 상냥함을 간직했었고 깍쟁이 같은 서구 여성들과는 달리 순진성과 소리 없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취재진들은 현지 로케 영화 촬영 취재와 함께 그곳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런 와중에도 망중한이 있었다.

그중 잊을 수 없는 것이 연어 소상 하천 탐방이었다. 유지노 사할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꺼리’를 찾던 중 어느 교포로부터 올해는 예년보다 연어가 많이 올라와 건설 장비인 ‘크레인’으로 강물 속의 연어를 끌어모은다는 말을 들었다. 주 취재가 영화였지만 25년간 수산전담 취재를 해온 기자로서 이 얘길 놓칠 수가 없었다. ‘그 곳이 어디냐’로부터 묻기 시작해 거리와 교통편을 주선, 취재 첫날(8월 21일) 오후 3시 반 경 만사를 제치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취재진 일행 6명이 찾아간 곳은 유지노 사할린스크 동쪽 60km 지점의 유어치푸하강이었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멀리 안개 속의 바다가 보이는 강하구에 다다랐다. 강쪽 20m 안팎의 크지 않은 유어치푸하강 주변으로 레스또예프 어촌이 형성돼 있었다. 8월 초순부터 연어 떼가 올라온다는 강하구엔 8톤 트럭 30여 대가 대열을 이뤘고 대형크레인으로 강물 속의 연어를 가득 채우자마자 트럭에 옮겨 싣는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흥분한 취재진이 더 가까이 가서 보자 등을 수면 위로 드러내 보일 정도로 연어 떼가 우글거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진을 찍고 현장 분위기도 메모했으나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동료가 없어 더 많은 취재를 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취재진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유지노사할린스크 인근의 오체프 강에서 몽둥이로 연어를 잡는 저자. 몽둥이로 강물을 내리치면 그 울림에 의해 연어가 뒤집혀지면 손으로 움켜잡는다.(출처_대양에 선 개척자들, 남달성 저)
유지노사할린스크 인근의 오체프 강에서 몽둥이로 연어를 잡는 저자. 몽둥이로 강물을 내리치면 그 울림에 의해 연어가 뒤집혀지면 손으로 움켜잡는다.(출처_대양에 선 개척자들, 남달성 저)

우리나라 동해안의 남대헌과 오십헌 망피천에는 해마다 10~11월이 되면 방류된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한다. 하지만 가장 어획이 많았던 1990년의 경우 겨우 10만 4,000마리(312톤)였고 1991년엔 되려 줄어 10만 2,000마리(305톤)에 불과했다. 대형크레인으로 한 차례 뜨는 연어는 대략 600kg.

‘우리도 연어를 잡자’ 어느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맨 먼저 J일보 L기자가 바짓가랑이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맨발로 강바닥에 뛰어들었다. 곧이어 C일보 K기자도 연어잡이에 나섰다. 별다른 어획기술이 없던 기자들은 깊이 30cm 안팎의 강바닥에 헤엄쳐 다니는 연어의 아가미 부분을 손으로 꽉 잡아채는 방법을 활용했다.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잡은 연어가 15마리나 됐다. 그러나 이를 갖고 갈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러시아 트럭 운전사에게 말보르 담배 한 갑을 건네주고 얻은 비닐포대 속에 넣어 숙소로 돌아왔다.

취재진이 잡은 언어를 보이자 김지미 씨가 주방으로 달려가 횟감용으로 포를 떴다. 그날 저녁 4명 식탁에 김지미 씨가 손수 준비한 연어회와 초고추장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취재진이 자리한 식탁에는 김지미 씨가 직접 3접시의 연어회를 갖다 주며 잡은 공로(?)를 인정해 주었다. 이 때문에 취재진의 연어잡이 성공담은 촬영팀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었고 이장호 감독은 취재진이 귀국하기 전 한 번 더 가기로 결정했다.

바로 8월 25일이었다. 취재진과 함께 촬영팀 중 40여 명이 2대의 중형버스에 나눠 타고 야유회 겸 연어잡이에 나섰다.

동료들이 잡은 연어를 다듬어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연어에서 알을 제외, 탕을 끓이기 위해 육질을 다시 손질하고 있다. (출처_대양에 선 개척자들, 남달성 저)
동료들이 잡은 연어를 다듬어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연어에서 알을 제외, 탕을 끓이기 위해 육질을 다시 손질하고 있다. (출처_대양에 선 개척자들, 남달성 저)

우리 일행이 간 곳은 오체프강이었다. 버스 운행시간으로 미뤄 전번에 갔던 유어치푸하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체프강은 유어치푸하강과 달리 강폭이 40여m나 되는데다 수심(40cm)도 약간 깊어 맨손으로 잡기에는 힘들었다. 궁리 끝에 나무막대기로 강물을 내리쳐 그 반동으로 연어가 뒤집힐 때 손으로 움켜잡는 방법을 썼다. 한쪽에선 준비된 릴낚시로 연어를 낚기도 했다. 일행 중 여자들도 이 같은 흥겨운 분위기에 휘말려 바지를 둥둥 걷은 채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글처럼 우거진 계곡의 밀림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오체프강. 그 강심을 따라 연어잡이에 나선 일행들의 모습은 국내에선 볼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 시간여 지나자 80여 마리가 쌓였다. 단위 노력당 어획량은 전번보다 못했다. 연어잡이에 나서지 않았던 동료와 여성들이 칼로 자르고 씻은 후 살은 횟감으로 머리와 꼬리 부분은 매운탕으로 끓였다. 맛 또한 끝내주었다. 우리 일행이 진을 친 바로 옆 한인교포 2세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선 연어가 워낙 흔한 것이어서 육질은 사료용으로 쓰고 채란만 해 술안주나 밥반찬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2세들은 연어에서 빼낸 알을 장작개비로 지핀 끓는 물에 살짝 담근 후 삼베 조각에 얹어 흔들면 잡티 제거와 함께 비린내를 제거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기자는 토스트 크기로 조각낸 흘래버 빵에 두 숟갈 정도의 연어 알을 발라 먹었다. 맛은 일품이었다. 국내산 성게 알이나 해삼 창자 맛도 좋지만 연어 알도 결코 이에 못지않았다. 캐비어 알과 대적할 만하다고 할까?

연어의 국별 생산 동향은 일본이 15만톤으로 가장 많고 미국 6만톤, 캐나다 3만톤, 구소련 2만 5,000톤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같은 어획을 위해 한국을 비롯한 이들 국가가 저마다 방류사업을 늘려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한국은 여건이 이들과 비교할 때 크게 불리한 편이다. 그러나 새끼 연어 방류마저 늘리지 않으면 연어 소상은 기대할 수 없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자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자원 빈국이 부국으로 치닫는 길은 오로지 모천 회귀성 어족의 방류량 확대와 정부의 확고한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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