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9. 명태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9. 명태는 돌아오지 않았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3.01.1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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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군 거진리
백암도 주변에서 물질하는 해녀들
백암도 주변에서 물질하는 해녀들

“저곳이 북한입니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의 하나인 구선봉입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 고성은 금강산을 오가는 관문으로 호황을 누렸다. 명태파시 이후 이처럼 지역이 들썩였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그 길은 막혀 있다. 고성에는 모두 14개의 항구가 있고, 그중 가장 큰 포구는 거진항이다. 그중 대진항, 거진항, 공현진항, 아야진항 등 4개의 국가어항이 있고, 대진항에 이어 최북단에 위치한 거진항은 오일장까지 열리는 곳이다. 한때 명태잡이의 전진기지였으며, 명태덕장이 아름다웠던 곳이다. 거진이라는 지명만 들어도 아픔과 설렘이 교차하는 실향민들도 있다. 거진은 이름처럼 큰 나루라는 의미이다. 1930년대 120호의 작은 어촌은 1970년대는 인구 2만 5,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겨울에는 명태, 여름에는 오징어, 가을에는 멸치를 잡는 어촌이었다. 해방 전에는 정어리가 많이 잡혀 일본사람들이 정어리 공장을 세 개나 설립하기도 했다. 지금은 명태 대신에 도루묵, 도치, 곰치, 문어를 잡고, 전복과 해삼과 미역을 따고 있다.

거진항과 거진읍
거진항과 거진읍

고성명태는 행운입니다

 

감푸른 바다 바닷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던 원산(元山)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王)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쨔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어시장의 새벽 경매를 보고 나서 곧바로 거진등대가 있는 해맞이공원에 올랐다. 굵직한 목소리가 반긴다. 양영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국민가곡 ‘명태’다. 매일매일 그렇게 애타도록 불렀건만 명태는 고성바다를 찾지 않았다. 우리 동해로 오지 않았다. 수산정책은 남획이 원인이라며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인공양식에 이르고 방류까지 했지만 오지 않았다. 반면에 소수지만 기후위기와 수온의 변화가 원인이라며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전문가도 있다(정석근, 되짚어 보는 수산학, 베토, 2022 참조).

거진등대는 1965년 불을 밝혔다. 당시 최북단의 등대였다. 그 뒤로 더 북쪽 대진항에 등대가 만들어졌다. 거진등대는 36마일까지 빛을 보내는 30만 촉광의 등과 무 신호기를 비치하고 어로작업과 초계경비를 도울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등대로 가는 길에 ‘고성명태는 행운입니다’라는 큰 글씨가 반긴다. 계단을 오르면 성황당 옆에 명태축제비가 있다. 명태가 고성사람들에게 선물한 것을 생각하면 어느 분 동상만큼 크게 세워도 부족하겠지만 조형물이 크지 않아서 좋다. 거진항 어느 구석에서 만난 노인이라도 명태바리 이야기만 나오면 실타래가 풀리듯 끝이 없다. 서해에서 조기잡이를 어부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한국전쟁 후 1970년대까지 배고픈 시절에 고성의 바다 마을 사람들은 명태로 먹고살았다. 봄부터 여름까지 조업하지 못할 때는 식량을 빌려다가 먹다가,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명태잡이나 명태덕장에서 일해서 갚았다.

지구온난화라지만 고성은 고성이다. 겨울은 춥고 매섭다. 찬 바람을 뚫고 등대공원에 오른 사내가 명태 소리에 맞춰 공원을 몇 바퀴 돌더니 국민체조를 한다. 사내를 따라 어정쩡한 모습으로 몇 바퀴 돌았다. 추울수록 허기가 크다 했던가. 따뜻한 국물을 찾아 시장 골목으로 내려왔다.

켜켜이 쌓아 걸어 놓은 명태덕장은 없지만, 명태 몇 마리를 걸어놓은 모습은 간혹 볼 수 있다
켜켜이 쌓아 걸어 놓은 명태덕장은 없지만, 명태 몇 마리를 걸어놓은 모습은 간혹 볼 수 있다

명태 자리를 누가 차지했을까

거진항을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여름이었다. 이른 새벽에 남쪽에서 한반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해가 진 후에야 화진포에 도착했다. 솔숲을 헤집고 들어가 가족들을 만나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이른 새벽에 거진항으로 향했다. 동해 특산물인 싱싱한 오징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새벽 5시 무렵, 밤새 오징어잡이를 마친 배들이 들어오자 거진항은 오징어 파시가 형성되었다. 배에서 내리고, 경매가 끝나면 곧바로 상인들 손을 거쳐 판매가 이루어진다. 당시 살아 있는 오징어는 12마리에 만 원, 죽었지만 횟감으로 먹을 수 있는 물 좋은 오징어 20마리가 만 원이었다. 손질해서 회로 썰어주는 값이 4,000원이었다. 화진포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오징어만 먹고도 남아서 집으로 가져왔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경이다. 그때 거진항의 인상이 너무 강했다. 이후 오징어 어획량이 줄고 값이 오르면서 오징어가 금징어가 되었다.

거진항 새벽경매
거진항 새벽경매

 

30, 40여 년 전 지금 그 자리에는 필시 명태덕장이 있었을 것이다. 진부령을 넘어 강릉으로 오는 길에 볼 수 있는 황태마을의 덕장이 그곳에서 있었을 것이다. 거진 사람들에게 명태는 한 해 농사였다. 배가 없으면 뱃사람이 되고, 그도 어려운 사람들은 그물에 건져온 명태를 떼어 내고, 덕장에 말리는 일을 했다. 일당을 받아 식량을 사고, 얻어온 아가미와 내장으로는 젓갈을 담고 시원한 국을 끓여 주린 배를 채웠다.

오늘의 거진항을 있게 한 것이 명태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1920년대 어항축조를 계획했지만, 자금 사정이 어려워 1930년대 말 거진항이 축조된다. 1950년대 전쟁 이후에는 대진항과 거진항은 동해 최북단의 어항으로 명태 조업의 전진기지였다. 남북관계가 불안했지만 거진항에 어선들이 모였고, 안정기에는 대진항이 중심이 되기도 했다. 명태 경제를 기반으로 거진은 1973년 읍으로 승격했다. 명태가 동해를 떠난 후에는 오징어와 문어가 지키고 있다. 거진항의 바다 농사도 겨울 농사에서 문어가 많이 나는 봄 농사로 바뀌었다.

대문어
대문어

꽁꽁 언 바다로 뛰어들다

1960년대 한 무리의 해녀들이 거진으로 들어왔다. 등대 아래 후미진 곳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물질을 시작했다. 그곳이 ‘해녀마을’이다. 이곳만이 아니다. 묵호에도 속초에도 어디에나 크든 작든 비슷한 마을이 있다. 이제는 물질을 어려운 나이가 되었거나 고인이 되었다. 남은 몇 명과 1세대 제주 해녀들에게 물질을 배운 사람들이 대를 잇고 있다. 이들도 이제 고령이다. 부산 영도에서 시작해 포항, 삼척, 강릉, 속초를 지나 북상해 머문 곳이 거진항이다. 이들은 성게(알)를 채취해 일본으로 수출했고, 미역을 뜯어서 팔았다. 이외에도 문어, 멍게, 해삼 등을 채취했다.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전복과 섭(홍합)을 따고, 봄에는 미역, 고리메 등 해조류를 채취한다. 명태가 많이 났던 시절에는 해녀들은 물질 대신 명태를 그물에서 따고 갈무리해 건조하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민
그물을 손질하는 어민

백암도 주변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을 만났다. 해맞이공원 아래에 있는 바위섬이다. 가마우지들이 좋아하는 쉼터다. 주변에 갯바위가 많고 미역 등 해초가 많아 전복이나 해삼이 많아 해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지금은 보행교를 만들어 ‘백섬해상전망대’를 조성했다. 해녀나 물새들만이 갈 수 있었던 그곳도 이제 여행객이 더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몹시 춥던 어느 해 겨울, 그곳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만났다. 얼추 헤아려도 예닐곱 명은 될 것 같았다. 지금은 산책로를 만들어 여행객들이 오갈 수 있는 갯바위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가마우지나 해녀들만이 주변에 갈 수 있었다. 이런 추위에 바닷물로 첨벙첨벙 뛰어든다. 그리고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시 노란 배가 선회해서 돌아왔다. 해녀들이 하나둘 물에서 나와 배로 모여들었다. 좌현으로 오르는 모습이 힘겹다. 먼저 오른 해녀가 뒤따라 오는 해녀를 올려준다. 그래서 벗이다. 해녀는 벗이 있어 저승과 이승을 오갈 수 있다. 배에는 선장이 불을 태우고 솥에 물을 데워 놓았다. 꽁꽁 언 손을 따뜻한 물에 담가 녹이고, 물 한 바가지 퍼서 고무옷 안으로 밀어 넣는다. 어떤 기분일까. 선착장에서 만난 해녀들은 대부분 고령이었다. 바다밭에서 채취한 해삼과 전복은 수집상에게 넘기고 함지박에는 도치 한 마리가 자리를 잡았다. 겨울 날씨는 물질하는 시간을 짧게 한다.

어느 해 겨울 거진항에서 처음 맛보았던 도치알탕을 잊을 수 없다. 연탄불에 구워 먹었던 도루묵도 겨울철이면 떠오른다. 항구를 몇 바퀴 돌다가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장날이 아니라서 한적했지만, 시장은 시장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식당에서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집에서 옛날 맛을 찾아 도치알탕을 주문했다. 시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열리는 재래시장이다. 1965년 문을 열었다. 명태잡이가 한창일 때는 고성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이었다. 

거진시장에서 만난 도치알탕
거진시장에서 만난 도치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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