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55(마지막회)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55(마지막회)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12.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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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파 이주홍 선생의 삶과 문학을 다시 생각하다

향파 선생에 대한 기억

필자가 향파 선생님을 처음 직접 뵈었던 때는 1980년대 초였다. 지산간호보건전문대학(현 부산가톨릭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이 학교에 양재목 학장님이 계셨는데, 이 양 학장님은 수산대학(현 부경대학)에 오랫동안 계시다가 이 전문대학 학장으로 부임해 오셨다. 그런데 이 양 학장님과 향파 이주홍 선생님은 수산대학에 계실 때, 참으로 절친한 관계여서 학교를 옮기신 이후에도 자주 온천장에서 만나셨다. 이미 그때 향파 선생님은 정년을 맞이하시고, 명예교수로서 수산대학에 일주일에 하루 정도 출강하고 계셨다.

봄 학기가 막 시작한 어느 오후, 양 학장님이 향파 선생님 뵈러 가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온천장 금강공원 입구 가까이 있는 한식 음식점이었다. 그 집에 들어서니 온천장에 집이 있었던 향파 선생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향파 선생님은 식사보다는 맥주에 더 관심이 많으셨다. 각자 앞에 놓인 잔이 비면 거기에 술을 부어 잔을 채워주는 주법으로 맥주를 드셨다. 내 앞에 놓인 잔이 비워질 기색이 없자, 향파 선생님은 젊은 사람이 술을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셨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술을 많이 할 수 없다고 하자 더 강요는 하지 않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술 대신 안주만 축내며 향파 선생님이 주도하는 이야기 듣기에 바빴다.

비워진 맥주병이 열 병이 훨씬 넘고 나자, 향파 선생님이 주인 마담을 불렀다. 그리고 그 주인에게 오늘은 내가 선물을 하나 준다며, 손수건 한 장을 건네었다. 주인 마담은 그것을 받아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손수건에는 향파 선생님이 직접 그린 수를 놓은 듯한 그림이 한 폭 그려져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밤늦도록 향파 선생님이 쏟아놓으시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야담과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 양 학장님과 함께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1985년에 나는 수산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를 옮기고 연구실을 배정받았는데, 그 방이 향파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방이었다. 그때까지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 강의하러 나오시면 그 방을 사용하셨다. 당시 연구실이 부족하여 한 방을 같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방에는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책상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한 일 년 정도 지나서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하여 계속 강의하시기가 힘들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뵙는 것도 힘들게 된 것이다. 댁으로 찾아가 한 번씩 뵙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국어과 교수들에게 병중에도 한 편씩 글씨를 써주시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결국, 선생님은 1987년 1월에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오래 모시지는 않았지만, 향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강한 인상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늘 자신을 추스르시며 남에게 무엇인가 베풀려는 삶의 자세를 보이셨다는 점이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나의 마음에 진하게 남아 선생님의 체취를 옆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떠나시고 난 뒤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나무 책걸상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내가 부임하면서 받은 새 철제 책상 대신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구실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상해 흔들거리는 그 나무 책상을 무슨 보물단지처럼 끌고 다녔다. 그 책걸상을 20여 년 사용하다가 향파 탄생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향파문학관으로 옮겼다. 그런데 합천에 향파 아동문학관이 생겨 이 책상은 다시 합천으로 옮겨졌다. 잘 보관이 되어 오래오래 유품으로 남겨졌으면 한다.

 

향파와 문학매체들

문학 활동은 매체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문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문학매체를 생산하려 한다. 문인의 존재성을 지키는 바탕이 매체이기 때문이다. 향파 선생 역시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직접 잡지를 만드는 일들을 즐겁게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관여한 매체가 동인지인 「갈숲」, 「윤좌」 등이 있지만, 부산문학사로 보아 의미 있는 작업은 『문학시대』를 주도적으로 창간하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60년대란 서울 지역에 있는 몇 개의 문예지도 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던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때 부산 지역에서 문예 잡지를 창간하여 운영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1966년 3월 1일 창간하여 통권 7호로 막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부산문단은 이 『문학시대』를 통해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을 살펴보면, 당시 전국에 있는 문인들을 필자로 확보함으로써 잡지의 질을 한 차원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지 창간을 시작으로 해서 문학 강연회를 지속함으로써 부산의 문단 분위기를 바꾸는 활력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의 일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문학 잡지를 창간하여 운영한다는 것은 귀찮고도 힘든 일이고,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출판재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서 하는 고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잡지경영은 고역 중의 고역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감히 잡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기를 주저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향파 선생이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비록 잡지가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그때 뿌려진 씨들이 오늘의 부산문단의 문예잡지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향파의 죽음에 대한 자세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양하다. 그 중 중요한 하나의 잣대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이 거쳐야 할 마지막 통과제의이면서, 한 인간의 전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향파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자신이 직접 편집한 동인지 『갈숲』(23朶)에 발표한 「새벽길」이란 시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계셨다.

인제는 슬슬/일어설 때가 됐구나/자리 비기를 기다려/列 지어 서 있는/저 무수한 새 얼굴들/뭐 한 가지 해놓은 것도 없이/신세를 지고 떠나게 되다니/그래도 뒤가 허전해 돌아보면/빠뜨려져 있는 건/아무 것도 없고/자리값이라도 놓고 가야/체면이 서는 건데/땀이 저린 부채 한 자루 뿐/돈 대신 될만한 물건 한 가지나/똑똑히 가진 게 있어야지/가진 게 없으면 말이라도 한 마디/남겨놓고 가라 전하나/남에게 얹혀서만 살아온 내게/남 아니한 말인들 있을 거라구/떠나는 이 마당서 하는 實吐지만/너무나도 빈 껍질로 살아온 길/정말 부끄럽구려//지금 와서 후회한들 미칠 것인가/漠漠한 天地 사이/아버지 어머니와의 만남이/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던가/그러면서도 제대로 한 가지/받들어 올린 게 없는 이 不肖/바람 속의 깃羽처럼/허공만 헤매다 돌아와/내 지금 이 자리에/이 꼴로 서 있음이여//인연 있으면 또 만나질까/나를 아껴준 정든 그대들/잘들 있게나/저는跛 나귀에 매질을 가하긴가/빚지고 떠남을 알고 업신여겨/未練과 餘恨도 나를 외면하네/招魂소리만큼이나 섬뜩한/저 城門 열리는 소리/닭아 이젠 그만 울려므나/다시 알려진 또 하나의/旅路 위에/나는 어둠을 헤치며/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리

죽음의 문 앞에 서서, 이 길을 혼자 걸어가야 한다고 담담히 고백하고 있는 한 인간의 정신의 높이를 본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인문정신의 높이라면, 향파 선생은 이를 문학으로, 몸으로 실천한 자가 아닌가? 우리가 그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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