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54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54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11.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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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부산문단과 향파의 《문학시대》(7)

《문학시대》 7호는 1967년 12월 25일 발행되었다. 6호가 1967년 5월 15일 발행된 점을 생각하면 반 년이 훨씬 지난 후의 발행이란 점에서 잡지 발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전체 구성은 시, 소설, 수필 등 이전의 편집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열면, 계속되는 <작가수첩> 란에는 오영수 작가의 사진과 글이 실려 있다. 오영수 작가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서 그 기록을 여기에 남겨둔다.

홍 여사가 좀 이른 봄나들이를 왔기에 그의 아이들과 함께 南向 벤취에서 해바라기를 한다. 아직도 바람끝이 매우나 담장에 삐뚜럼히 기대선 벚나무 가지에 봉오리가 조금 부푼 것을 보면 봄은 바로 코 앞에 다가선 것이 분명하다

이 봄에는 지긋지긋한 투병도 그만 끝장이 나고 쓰고 싶은 작품도 한 두 편 썼으면- 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소슬한 가을 바람과 함께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

위 글을 통해 오영수 작가가 당시 투병 중이었으며 작품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문학시대》 7호의 권두언에 해당되는 <사상의 아침>이란 글이 나온다. 아마 이글은 주간을 맡았던 향파 이주홍 선생의 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학시대》 마지막 호에 실린 글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자의로 쓸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남에게까지도 빌려줄 수 있는 풍족한 우리의 말과 글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세계에 어엿이 외칠 자격을 갖는다. 참으로 남의 말글에 붙이어 사는 겨레들의 고통을 상상할 때 우리가 고통 속에 끼어 있지 않고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그 다행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서 보다 정열적으로 우리의 말글을 지켜나가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런 사정에서 우리같은 작가들은 스스로 영광스러운 전초부대로서 자부한다 해도 조금도 어색해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명념해 두어야 할 것은 창작 활동에서 얻어진 영롱한 사상의 창조가 없어선, 그 말글이 온전히 지켜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럼으로 해서 또 어엿이 세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도 박탈당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글이 《문학시대》의 종간사 역할을 한 셈이다. 이 7호가 《문학시대》의 종간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문학시대》의 주간으로서 문예지를 만드는 편집자이면서도 작가였던 향파 선생의 우리 말글에 대한 자부심과 문학작품은 영롱한 사상을 창조해내어야 한다는 작가의 사명을 피력해두고 있는 장면이다. 말글을 통한 사상의 창조가 작가들에게 지워진 시대적 소명이란 것이다

종간호여서 그런지 계속되어 오던 시와 소설 교실은 빠지고, 학생들의 <장편 리레>는 마지막 회로 남성여고의 강혜숙의 「저 하늘에 깃발을」이 실려있고, 강은파의 장편 연재 소설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특집으로는 <창작 12인집>으로 12명의 소설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김정한의 「입대」, 김송의 「제로(0)」, 최인욱의 「삼등 유원지」, 오영수의 「閑日」, 손동인의 「백지의 반란」, 이광숙의 「강물과 삼십오원과」, 오유권의 「말뼈다귀」, 백인무의 「펜 클럽 회장」, 김의정의 「자매들의 대화」, 유현종의 「터무니 없는 오해」, 박태순의 「입이 작은 사람의 분노」, 박해준의 「부자」 등이다. 이렇게 한 권의 문예지에 12편이나 되는 소설을 싣고 있는 문예지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12편의 소설특집이 마련됨으로써 7호의 전체 125페이지 중 60% 이상이 소설로 채워졌다. 여기에다 염기용의 꽁트 「환승」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잡지의 기획력에 따른 원고 수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집의 하나는 청마의 미발표 유작 2편이 소개되고 있다. 그 유작은 수필 「나팔」과 시 「산도화」이다.

유치환의 수필 「나팔」은 “작금에 와서 귀청이 따갑도록 떠들어 대는 밝은 생활운동이니 일하는 해니 하는 구호인즉 한편으로 제 아무리 손발이 닳도록 일을 하고 또한 일을 하려도 붙어서 일 할 곳이 없어서 헐벗고 굶주려 항상 가난에 악마처럼 쫓기는 무수한 사람들에겐 한갓 장난의 수작이든 영문 모를 북치고 나팔 부는 구경거리 밖에 아님에 틀림없을 것이다”는 1960년대 당시 서민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현실 비판적인 목소리로 전달해주고 있다. 시 「산도화」는 “첫 나들이인가요?//봄길 저만치//누구인지 부르는 기척에//홱 돌아다보는//산도화의 깜찍스런 얼굴!”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사실 <편집 후기>를 보면, “특집 관계로 이번호엔 쉬었으나 <소설교실>과 <시작교실>은 앞으로도 계속 연재될 것이다. 끝으로 이번 호를 나오게 한 것도 편집 동인 秋盛龜 사장의 희생적 발분의 덕인 것은 물론 특히 평소부터 이 일을 걱정해 나온 金琪俊 선생의 큰 도움의 결과였음을 잊을 길 없다. 좁게는 우리 고장을 위해서, 넓게는 우리 문단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이분들의 빛나는 정성의 길이 헛되지 않을 것을 믿고 또 믿는다.”라고 후기를 남겨놓음으로써 《문학시대》는 계속 이어져 갈 것으로 밝혀두고 있다

그러나 《문학시대》는 종간사도 없이 7호에서 종간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의욕적으로 시작된 부산에서의 본격 종합문예지는 결국 출판 재정의 원활한 확보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7호로 종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창작과 비평》이 1966년 1월 15일에 계간지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당시 지역출판문화 생산의 토대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종합문예지를 따라 이를 부산지역 문화판에 정착시켜보려고 한 열정은 굉장했지만, 잡지의 성격을 새롭게 살려가지 못한 부분은 지역문학사의 역사적 교훈으로 남는다.

당시 한국문학의 중심매체 중의 하나였던 《현대문학》이 서울에서 출판됐다는 지역적 여건도 작용했지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조연현이 실천해간 5개항의 편집노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단의 총체적인 표현지가 되어야 한다. 2)문학상의 일 경향이나 혹은 특수한 유형을 초월한 정통적인 위치를 엄수해야 한다. 3)고전에 대한 정당한 계승과 새로운 세계문학에 대한 정당한 흡수 4)문학적인 가치평가에 대한 엄정한 태도 5)역량있는 신인의 양성 등이었다. 특히 신인의 양성을 위한 신인추천제도는 《현대문학》이 폭넓은 문단적 입지 구축의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시대》도 처음부터 월간지라는 부담을 줄이고 반년간지 혹은 계간지로 출발하면서 단계적으로 토대를 구축해 나갈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문학시대》가 부산지역에서 1960년대에 창간과 종간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것은 7,80년대를 지나 지금의 부산지역 문학 매체가 새롭게 탄생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당시로서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문인들의 작품을 실어 전국문예지로서의 발돋음을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것은 향파 선생이 가진 한국문단에 대한 영향력과 역량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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