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7. 아픔을 감싸고, 상처를 치료하는 정원의 섬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7. 아픔을 감싸고, 상처를 치료하는 정원의 섬
  • 김준 박사
  • 승인 2022.11.1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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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손죽도
손죽도 전경
손죽도 전경

[현대해양] 섬에 있는 학교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손죽도도 마찬가지이다. 1923년 개양서당으로 문을 열었다. 마을 유지들이 목돈을 마련해 서당 문을 열자 배움에 목말랐던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1932년에는 4년제 사립 보통학교로, 1936년에는 6년제 사립 손죽심상소학교로 인정받았고, 1943년 6년제 손죽학교가 됐다. 해방 후 1946년 손죽국민학교로 인가된 후, 소거문도 분교(1953년), 평도분교(1960), 광도분교(1964)를 두었다. 모두 손죽열도에 있는 작은 섬들이다. 그리고 2021년 문을 닫았다.

손죽열도는 거문도, 초도, 소거문도, 평도, 광도 등 유인도와 반초섬, 나무여, 북여, 용섬, 질마섬 등 무인도를 포함한다. 소거문도, 평도, 광도를 하삼도라 했다. 그 중심에 손죽도가 있다. 마을이 정원이고, 주민들이 모두 마을정원사인 섬이다. 한때 360여 가구의 안강망 중심 섬이였다. 봄에는 칠산바다로 가을에는 추자도로 갈치잡이, 거제로 대구잡이, 울릉도로 오징어잡이까지 동해, 서해, 남해, 제주 바다를 넘나들었던 사람들이 사는 섬이다.

 

마을신 ‘이대원 장군’

손죽도는 1587년 조선왕조실록(선조20. 2월)에 이대원 장군의 사망 기록과 함께 등장한다. 임진왜란 5년 전이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큰 인물을 잃었다며 손대도(損大島)라 했다. ‘댓머리’ 선창에 도착하면 마을주민들이 장군을 추모하며 세운 동상을 볼 수 있다. 가장 젊은 나이에 만호가 되어 22살에 1588년 ‘손죽도대전’에서 순국했다. 선조 20년(1587) <난중잡록> 1권 2월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왜적이 흥양(興陽) 경내에 있는 손대도[損竹島]를 침범했는데, 녹도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元)이 싸우다가 패하여 죽다. 이에 앞서 소수의 왜적이 탄 수 척의 배가 본도(本道)의 바다를 지났는데, 이대원은 일이 다급했기 때문에 미처 전령을 보내 보고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잡았었다. 좌수사(左水使) 심암(沈嵒)이 그 일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손대도에 와서 정박하는 왜적의 배가 무척 많아지자 심암은 이대원을 척후로 내세워 앞장서서 교전하게 하고 자기는 수군을 거느리고 관망하다가 구원해 주지 않고 퇴각해 버리니, 이대원은 고군(孤軍)으로 역전(力戰)하다가 죽은 것이다. 심암은 군법을 어겼음을 스스로 알고, 왜적의 세력이 치열하게 뻗어나므로 내지(內地)의 군사를 징발해야 한다고 거짓 장계를 내다. 조정에서 심암의 실상(實狀)을 듣고 체포하여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고 뭇사람들에게 보이다.

이대원 장군은 정운 장군과 함께 고흥군 녹동읍에 위치한 쌍충사에 모셨다. 쌍충사는 손죽도 대전에서 이대원 장군이 순국하자 그를 제사하는 이대원 사당으로 세워졌다. 그 후 임진난이 일어나고 그해 9월 녹도 만호 정운장군이 충무공과 함께 부산해전에 참가했다가 몰운대 밑에서 전사하자 충무공이 장계를 올려 이대원 사당에 모셨다. 숙종 때 쌍충사로 사액을 받았다. 손죽도 마을주민들은 섬 안에 있는 충렬사에 이대원 장군을 모시고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

이대원 장군 동상
이대원 장군 동상

수산과 해운에 눈뜬 사람들

손죽도는 흥양군에 속했다. 설 명절이 지나면 조기 어장이 시작됐다. 오색기를 달고 풍어제를 지낸 후 중선배를 타고 조기잡이에 나섰다. 어장이 아랫역 ‘흥양바다’에서 이루어질 때는 섬으로 곧 돌아왔지만 ‘웃역’으로 출어할 때는 몇 개월씩 바다에 머물러야 했다. 흥양은 고흥의 옛 이름이다. 조기 이동에 따라 칠산바다와 연평바다로 이어지는 어장을 웃역이라 한다. 조기 어장을 마치면 보리 등 식량과 생필품을 사서 음력 6월, 7월에 손죽도로 돌아왔다. 여름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가을 어장을 준비했다. 조도, 추자도, 가덕도 등으로 가 갈치를 잡았다. 겨울에도 대구를 잡으러 거제도를 드나들었다. 옛날 중선배는 7명이 타고 조업했다. 지금처럼 외국인 선원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배를 탔기에 조업 중 풍랑을 만나 같은 날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아 동네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중선배 선주들이 어구의 공동구입과 상부상조를 위해 선주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손죽도 어업조합이 결성될 때까지 그물, 목제, 대나무 등을 구입하고, 어업허가를 낼 때도 큰 역할을 했다. 중선배를 이어 도입된 것은 안강망이었다. 손죽도에 안강망이 도입된 것은 1920년대로 알려져 있다. 전라북도 위도 출신 최 씨가 안강망 배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확산됐다. 해방을 전후해 중선배는 55척에 달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손죽도만 아니라 여수에서 안강망 어업을 이어갔다. 1980년대에는 여수에 선적을 두고 동지나해에서 조업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근해 어장과 동지나 어장의 어족자원이 감소하면서 이어지지 못했다. 1960년대 근해 안강망 어업조합 창설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손죽도 출신 중 부산의 상선이나 원양어선으로 진출한 사람들도 다수 있다.

일본인 이주어촌이 만들어진 거문도에선 1918년 어업조합을 만들었다. 손죽도에서는 1925년에 어업조합이 창설됐고, 1961년 거문도 어업조합에 흡수됐다. 흡수되기 전까지는 주로 본섬과 손죽열도에서 채취한 해초류 위탁판매와 안강망 관련 상권이 중심이었다. 거문도 어업조합은 1962년 수협법이 제정되면서 ‘거문도어업협동조합’을 거쳐 1977년 ‘거문도수산업협동조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작은 섬 손죽도가 여수는 물론 우리 어업사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수산업사의 획을 그었던 손죽도 뱃사람들이 이용했을 옛 선창
수산업사의 획을 그었던 손죽도 뱃사람들이 이용했을 옛 선창
갯바위에서 채취한 돌김
갯바위에서 채취한 돌김

 

바다 위 정원 박물관, 손죽도

돌담길과 당산나무
돌담길과 당산나무

손죽도는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돼 ‘마을가꾸기’가 추진되고 있다. 주민과 행정이 함께 진행하는 사업이다. 손죽도가 지향하는 사업의 방향은 ‘바다 위 정원 박물관’이다. 손죽도는 섬 자체가 정원이다. 오래전부터 마을주민들이 가꾸어온 정원이다. 돌담을 쌓아 만든 골목과 심은 나무, 집 안 구석구석 돌 하나 풀 한 포기가 어우러져 섬 정원을 이루었다. 인위적으로 지붕에 색을 칠하고 큰 예산을 들여 조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켜켜이 시간이 만들고 바람과 파도가 가꾸어온 것들이다. 그래서 편안하고 아늑하다. 삼각산, 깃대봉, 봉화산이 팔을 벌려 마을을 품고 있다. 마을 앞에는 모래해수욕장과 몽돌해변이 펼쳐지고 바깥 바다와 접한 곳은 갯바위로 이뤄져 있다. 큰여, 쪽바끝, 치끝, 큰너부너리, 큰개, 송곳여, 서들바 등 100여 개의 갯바위에서 미역, 김, 가사리, 소라, 전복 등 해산물을 채취하고 땅에서 고구마를 얻어 살아 온 섬이다. 주민들이 직접 지게를 지고 돌과 모래를 날라 지은 학교는 지난해 폐교되었지만 새로운 삶을 준비 중이다. 문을 닫은 교실 출입문에는 마지막 학생 은송이와 은율이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깔깔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어나올 것 같다.

손죽도를 떠나 도시로 갔다가 건강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대부분 건강을 회복했다. 섬마을 정원과 섬 밥상이 주는 치유 덕분이다.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고 손죽도에 들어와 한 달만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김영란 씨는 10여 년 째 섬살이를 하고 있다. 김 씨 부부만 아니다. 옥금 씨, 영자 씨, 영순 씨, 옥심 씨도 고향이 그리워 돌아온 사람들이다. 다른 섬에 비해 손죽도에 유독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기억의 장소가 잘 가꾸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지매 고개에서 봄철에 놀던 화전놀이도 그중 하나다. 섬살이의 아픔을 삭이며 가꾼 꽃과 나무와 마을이 그리워서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남도 갯가 밥상의 ‘개미’가 생각나서 일 것이다. 섬이 고향인 사람을 만나면 늙어서 섬으로 간단다. 이제 아내도 남편도 섬살이에 익숙해져 뭍에 나가서 이틀 밤 자기 힘들단다. 지긋지긋한 섬살이가 그리워서다.

손죽분교 교정
손죽분교 교정
주민들이 직접 가꾼 꽃밭
주민들이 직접 가꾼 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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