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도정책과 이순신의 제해권
조선의 공도정책과 이순신의 제해권
  • 이부경 (사)이순신포럼 이사장
  • 승인 2022.10.1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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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경 (사)이순신포럼 이사장
이부경 (사)이순신포럼 이사장

[현대해양] 조선은 왜구들의 창궐로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섬을 비운다는 것은 바다를 버린다는 것으로 바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뿐더러 육지만 조선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공도정책은 이순신 제독과 조선 수군의 활약에 힘입어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완화되었다가 고종 임금 때에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삼면이 바다인 조선이 바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단면을 보고 있다.

그에 비해 이순신 제독의 바다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선조 임금은 육지만 우리의 영토로 생각하여 12척의 배로 무엇을 하겠는가 육지로 올라와 권율과 힘을 합하여 싸우라는 명령을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하며 바다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제해권(制海權)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왜적들이 더 이상 침략을 확대하지 못하고 물러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순신 제독은 한산대첩을 통하여 우리 바다의 제해권을 지키며 왜적들이 견내량을 넘어올 수 없도록 한산도에 진을 옮기고 밤낮으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의 수륙병진 작전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명량대첩은 또 어떠하였는가?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들어오는 바닷길을 막고 칠천량해전에서 무너진 조선수군의 재건을 알리는 당당한 대장정은 어떠하였는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1597년 9월 17일(甲辰). 맑다. 어외도(於外島: 무안군 지도면(智島面))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3백여 척이나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대승한 줄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致賀)하며 말(斗), 섬으로 양식들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주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중

어외도는 울돌목에서 직선 거리로 40km 이상 되는 곳인데 17일에 도착한 것을 보면 16일 전투가 끝난 직후 곧바로 움직였다는 것이 된다. 밤을 이용하여 이동한 것으로 보아 함대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전투에서 이긴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미리 사전계획을 마련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8일에는 그냥 어외도에서 머물지만 19일에는 법성포 도착, 20일에는 위도, 21일에는 고군산도까지 서해안의 대장정을, 그리고 나서야 23일에 승첩 장계의 초안을 수정하는 일을 하였으니 말이다.왜적들이 서해안을 돌아 북진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면서 하루빨리 조선 수군의 재건을 이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고군산도까지 올라간 이순신의 차기 전략과 바다, 제해권에 대한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섬을 비우고 사실상 바다를 포기하겠다는 육지 중심의 사고에 빠졌던 조선의 임금들과 달리 바다를 지켜야 국토가 산다는 것을 몸소 목숨을 내걸고 실천적으로 보여준 이순신 제독의 현명한 판단이 오늘날 우리나라가 대륙국가에 머물지 않고 해양국가로 나아가는 DNA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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