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4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다, ‘사난 살았주’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4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다, ‘사난 살았주’
  • 김준 박사
  • 승인 2022.08.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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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북촌마을
함덕에서 본 서우봉
함덕에서 본 서우봉

[현대해양] 폭염이 내리쪼이는 너븐숭이 고팡밭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찾아왔다. 선생님의 안내로 순이삼촌을 만나고 애기무덤 앞을 한참 서성였다. 광주에서 왔다는 한 분이 주민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공원을 둘러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가며 귀동냥을 했다. 주민해설사는 북촌포구, 4・3사건, 아이고사건 등 마을에서 벌어진 근현대사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북촌에 살았다는 제일동포도 만났다. 뜨거운 여름날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북촌은 본동, 해동, 억수동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600여 가구, 1,500여 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북쪽은 바다와 접하고 서쪽은 해수욕장이 아름다운 함덕리와 서우봉을 사이에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람사르습지를 보유한 유네스코 습지도시의 중심마을인 선흘리가 동쪽은 서핑 등 해양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김녕리와 접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뒤 또는 북쪽에 있는 포구마을이라는 의미로 ‘뒷개’라고 부른다. 해안은 암석해안으로 이뤄져 있고 포구 앞 바위섬 다려도 일대 ‘바당’에서 소라, 톳,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고, 해발이 높지 않아 곶자왈을 일궈 밭농사로 생계를 잇는다. 하늬바람이 부는 탓에 귤농사도 잘 되지 않는 곳이다. 마을 동쪽 고두기 언덕 ‘바위그늘집자리’ 유적에서 신석기 후기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북촌포구
북촌포구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시간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등명대와 가릿당과 당팟을 거쳐 초등학교 앞에 멈췄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재잘대며 교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차를 끌고 마중 나온 부모들도 몇 보였지만 대부분 삼삼오오 모여 포구쪽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일주도로를 지나 마당궤쪽으로 건너기도 했다. 일주도로는 함덕을 지나 제주시내로 가는 길이다. 북촌학살은 70여 년 전 이 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피살(북촌사건이라 함)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군경가족을 제외하고 옆 옴팡밭으로 끌려갔다. 순이 삼촌 밭이었다. 옴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란다. 상군해녀 순이 삼촌은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물이 무서워 물질도 못하고 트라우마에 고통을 받다 그 밭에서 스스로 눈을 감았다. 4・3사건 당시 최대의 인명피해로 기록되는 현장이다. 현기영은 소설 ‘순이 삼촌’에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고 썼다. 학생들이 그곳에 누워 있는 검은 돌 위에 새겨진 글을 읽었다.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그날은 유달리 바람 끝이 맵고 시린 날씨였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게 맞춰 개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버린 곡소리,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 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작했고 5백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로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현기영 ‘순이 삼촌’ 중-

뽑아 놓은 무처럼 널부러진 시신 사이에 묻혀 ‘순이 삼촌’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가족을 찾아 안장을 했지만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그대로 임시 매장한 상태로 20여기가 남아있다. 그 중 8기 이상이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듬해 순이 삼촌이 옴팡밭에 심은 감저(고구마)가 잘 되어 목침만 했지만 누구도 사먹을 수 없었다. 너분숭이는 금악리 ‘만뱅듸 공동장지’, ‘백조일손지지’, ‘현의합장묘’ 와 함께 희생자 집단묘지이며, 만뱅듸와 함께 4・3사건 집단학살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북촌사건 이후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 병약자까지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 사이 군경가족을 제외하고 ‘북촌사건’ 당시 보초를 섰던 민보단원을 필두로 너분숭이, 당팟, 탯질 등 밭에서 500여 명을 학살했다. 그 후 북촌마을은 손이 끊어져 ‘무남촌’이라 불리기도 했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이고사건’이다. 1954년 1월 23일 초등학교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고별식을 하던 중 4・3사건으로 희생된 영혼들에게 묵념을 올리면서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에 알려졌다. 이들은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보고도 말을 할 수 없는 ‘강요된 침묵’이 계속되었다. 유족들이 부모형제에게 술 한 잔 따라 올린 것도 죄가 되어 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시대였다.

4‧3사건 당시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놓고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에 집합시켰다.
4‧3사건 당시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놓고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에 집합시켰다.
4‧3당시 희생된 애기무덤
4‧3당시 희생된 애기무덤

오름에 살고 바다에 기대다

다려도가 바다생명의 쉼터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북촌사람들의 생명줄인 해초와 용천수가 큰 몫을 했다. 덕분에 원앙새를 비롯한 물새들도 깃들었다. 육지가 가물면 바다도 가물다. 바다와 뭍은 둘인 듯 하나다. 물길이 끊어지면 바다생명도 위태롭다. 그 길에 다려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큰 피해를 입은 북촌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와 기둥을 세우고 이엉을 얹은 후 물질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다려도 덕분이다. 다려도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삼촌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황금어장이다. 마을에서는 매월 청소도 하고 매년 음력 2월 용왕제를 지내고 ‘지드림’을 한다. 한때 다리를 놓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해녀들과 마을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막아낸다. 해녀들은 영등할매와 용왕이 바람을 몰고와 미역씨와 소라를 뿌려준다고 믿는다. 다려도는 서너 개의 작은 섬으로 모래밭으로 연결돼 있다. 바닷물이 적게 들면 여섯 개의 섬이 모습을 드러내고 많이 들 때는 서너 개가 나타난다. 주변에는 풀이 나지 않는 수십 여 개의 갯바위도 모여 있다. 탐라도와 해동지도에 ‘다래여’로 표기했다. 면적은 약 4,700㎡이다. 북촌해녀들은 다려도에 용궁이 있다고 믿었다. 다려도는 북촌의 ‘우영팟’이었다. 우영팟은 제주민간 안에 있는 작은 텃밭을 말한다. 다려도는 물개를 닮았고, 이곳에는 파도높이 만큼 생물이 쌓였다. 다려도에서 공동물질을 한 덕에 마을이 살고 해녀들이 살았다. 그곳에 있는 토끼굴은 4・3사건때 주민들의 몸을 숨겨주기도 했다.

서우봉은 함덕과 북촌 사이에 있는 오름이다. 해수욕장이 좋아 많은 사람이 찾는 함덕에서 접근하기 좋아 함덕 서우봉으로 알려졌지만 3/4이 북촌에 속한다. 올레길 19코스인 조천-김녕 올레의 일부이다. 서우봉에는 둘레길과 산책길이 있다. 이곳 산책길은 함덕해수욕장을 찾는 여행객을 위해 함덕 주민들이 낫과 호미로 만든 길이다. 이 올레길은 북촌포구를 거쳐 너븐숭이를 지나 서우봉을 지나 함덕해변으로 이어진다. 서우봉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해군이 만든 진지동굴과 몬주기알이 있다. 진지동굴은 송악산, 수월봉, 삼매봉, 일출봉 등에도 있다. 서우봉에는 동굴기지가 해안절벽을 따라 23기가 10미터에서 30미터까지 다양하다. 규모가 큰 것은 총길이가 110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서우봉 일대의 동굴기지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몬주기알은 천연동굴이다. 썰물에만 접근이 가능해 4・3 당시 북촌과 함덕 주민들이 숨었던 장소이며,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기도 하다.

북촌포마을의 우영팟, 다려도
북촌포마을의 우영팟, 다려도

뿔소라를 세계인의 부엌으로, 해녀의 부엌

‘해녀의 부엌’ 식당으로 변신한 어촌계 창고
‘해녀의 부엌’ 식당으로 변신한 어촌계 창고

‘해녀의 부엌’에 10여 명이 둘러앉아 밥을 기다렸다. ‘해녀의 부엌’은 어촌계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다. 일본 수출에 의지했던 소라를 국내소비는 물론 세계인의 부엌에 올리겠다는 계획으로 해녀와 청년예술가들이 만든 부엌이다. 종달리에 문을 연 후 반응이 좋아 북촌에 2호점을 열었다. 우영팟과 보물섬 다려도에서 얻은 재료로 차린 밥상으로 마련한다. 다려도는 소라, 미역, 우뭇가사리, 톳 등 해녀들의 생계터전이자 밥상이기도 하다. 작가, 컬러디자이너, 음향디자이너, 의상디자이너, 푸드디렉터, 영상디자이너, 연출자, 도예디자이너, 조명디자이너, 미술감독 등이 북촌어촌계 작업장에 만든 공간이다. 부엌으로 가는 길에 설치작가와 사진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부엌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내받은 장소는 물속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다. 어둡지만 자리에 앉아 적응하면 작품이 하나씩 시야에 들어온다. 벽에는 1940년대 북촌을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부엌엔 불턱을 상징하는 식탁이 준비되어 있다. 12명의 예술가가 만든 테이블에 14명만 초대되어 해녀가 만든 음식을 해녀이야기를 들으면서 식사를 즐긴다. 미디어아트 레스토랑에서 영상과 함께 도슨트가 설명해주는 마을이야기, 해녀이야기, 밥상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해녀를 따라 제주바다로 들어가는 경험과 다려도에 물질을 가는 배를 타는 경험도 한다. 이번 음식은 보리로 만든 상웨떡에 고사리무침을 얹어 먹는 전식을 시작으로, 해녀가 직접 만들어 준 소라된장무침을 미역으로 싸서 먹는다. 해녀들이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먹었던 음식으로 ‘코시롱한 맛’이다. 밥을 큰 그릇에 담아 나누어 먹는 해녀공동체의 상징인 ‘낭푼밥상’이 메인이다. 옛날에는 나무로 만든 큰 그릇(낭푼)에 담아 나누어 먹었던 것에서 시작된 제주밥상이다. 저녁에는 해녀들이 준비한 공연과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북촌어촌계창고에 마련된 ‘해녀의 부엌’
북촌어촌계창고에 마련된 ‘해녀의 부엌’
미역에 싸서 한입에 먹는 코시롱한 맛, 소라된장무침
미역에 싸서 한입에 먹는 코시롱한 맛, 소라된장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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