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3 전남 신안군 우이도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3 전남 신안군 우이도
  • 김준 박사
  • 승인 2022.07.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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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에 새겨진 기록들
국가어항인 진리항과 진리마을, 오른쪽에 작은 포구가 우이선창이다
국가어항인 진리항과 진리마을, 오른쪽에 작은 포구가 우이선창이다

[현대해양] 몇 해 전 ‘문순득 생가’를 찾았을 때다. 골목을 돌아 노인의 집으로 들어섰었다.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오래된 문서를 보여줬다. 지금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몇몇 연구자들만 관심을 갖고 있던 「표해시말」이 기록된 「운곡잡저」였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정약전이 기록한 책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제 노인도 문서도 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문서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안군에서 보관중이다. 노인이 살았던 집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깨끗하게 쓸어버리고 새로 지었다. ‘문순득 생가’라는 느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옛집은 안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복원비용이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복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삶의 흔적이 오롯이 새겨진 집을 깨끗하게 쓸어버리는 정책이라니 아쉽기 그지없다. 더구나 역사적인 옛기록이나 고건축물 등을 귀한 절해고도에서 말이다.

 

홍어장수 문순득, 정약전을 만나다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문순득(1777~1847)은 우이도 진리 출신으로 흑산도 인근의 바다에서 홍어를 잡아 파는 어부이자 상인이었다. 1801년 12월 대흑산도 인근 태사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 이듬해 1월 우이도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그해 2월 오키나와에 표착하여 10월 출항을 하였다 다시 표류하여 11월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리고 1805년 1월 우이도에 도착할 때까지 3년 2개월 동안 낯선 이국땅과 바다를 표류했다. 제주도 인근까지 떠내려가다 지금의 오키나와(유국)와 필리핀(여송)에 도착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중국을 거쳐 육로로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그의 표류이야기는 흑산도로 유배되어 우이도에 머물던 정약전을 통해 기록되었다. 표류와 귀국 여정만 아니라 필리핀과 오키나와 외에 중국, 안남 지역의 풍속, 언어, 선박, 토산품 등이 「표해시말」로 기록되었다. 이 기록은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가 우이도에 머물며 집필한 「유암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문순득의 후손 문채옥은 생가를 지키며 이강회의 다른 저서 「운곡잡저」도 보관하고 있었다.

정약전은 신유사옥(1801)으로 유배 1801년부터 1816년까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흑산도로 가는 길에 우이도에서 몇 년, 흑산도 사리에서 10여 년, 그리고 말년은 해배된 동생 다산을 기다리며 우이도에서 생활했다. 이 과정에 흑산도에서는 장창대를 만나 「자산어보」를 쓰고, 우이도에서는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기록했다. 실학자답게 주민들의 삶과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했던 탓이다. 우이도에서 눈을 감자 문씨가는 주민들과 시신을 거두어 뱃길이 보이는 곳에 고이 묻어주었다. 마을 뒤 밭으로 이용하는 손암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곳이 있으며, 돈목으로 넘어가는 길 초입에 서당골이 있다. 이곳 서당에서 문씨가와 마을주민들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손암만 아니라 한말 최익현도 흑산도로 유배되어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809년(순조 9년) 5명의 외국인이 제주에 표류해 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9년 동안 되돌려 보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여송국 사람들이 표류해 왔을 때 문순득이 문답을 통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문순득 생가터에 새로 지은 집
문순득 생가터에 새로 지은 집

국가어항과 옛선창

우이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상황봉이다. 진리에서 돈목으로 넘어가는 몰랑에서 나누어진다. 이곳에 오르면 한라산, 흑산도, 가거도, 만재도, 태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최익현은 ‘여기서 바라보면 멀리 700~800리 주위에 흑산, 가거, 태사, 만자, 조도, 한라 등의 봉우리들이 있고’라며 요새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勉菴集」 第1券 詩 5 登牛耳小黑山一名 口號).

우이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상산봉
우이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상산봉

우이도 진리마을에는 1745년(영조 21년) 3월에 만들어진 ‘우이선창’이라 불리는 시설이 있다. 지금도 몇 척의 배가 정박해 있다. 수명을 다한 포구가 아니라 역할을 하는 포구다. 제방의 길이가 60여m, 높이는 2m고 폭은 1.6m에 이른다. 우이선창 밖으로 큰 포구가 만들어지고 오가는 길과 멸치를 삶는 멸막과 건물 등이 들어서면서 선창 공간이 좁아졌지만 옛날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었을 것 같다. 이 선창 옆에는 어류저장창고인 조기간장이 자리해 있다.

우이선창의 내력을 새긴 비석
우이선창의 내력을 새긴 비석

지금도 배를 정박해 두며 선창을 이용한다. 당시에는 선창 안에서 배를 짓기도 했다. 선창 옆에 조기간장과 선재목을 보관하는 창고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당시 인근에서 조업을 하던 배들이 새우나 잡어를 주고 물과 나무를 얻었던 곳이기도 하다. 선창과 선소 기능을 했을 우이선창은 오롯이 형태가 남아 있고 기록까지 전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포구이다. 지금도 진리항은 국가어항으로 서남해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들이 유사시 피항하는 곳이며 돈목마을에는 해군이 머물기도 했다. 우이선창으로 불리는 옛선창의 내력은 비문에 새겨져 있다. 지금은 글씨가 마모되고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렵지만 비문을 적어 놓은 문채옥(1920~2011)에 의해 전해질 수 있었다. 문씨는 문순득 후손으로 배를 짓는 목수였다. 다행스럽게 관련 자료들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안군이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 집이 모두 철거되고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이 복원되었다는 점이다. 홍어장수 문순득은 물론 후손들의 삶과 옛 섬살이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은 모두 거세시키는 복원이다. 문순득 생가, 우이선창, 정약전 유배지, 표해시말 등 이보다 훌륭한 박물관이 있던가. 그 흔적을 하나 둘 지우고 깔끔하게 단장된 곳을 보면서 내내 아쉬웠다. 최근 진리항에는 손암정약전의 비석이 세워졌다.

 

미역으로 생계를 잇다

우이도는 가장 큰 진리마을, 해수욕장이 아름다운 돈목마을과 성촌마을, 최근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예리마을로 구성된다. 이렇게 세 개의 마을을 합해서 우이도 어촌계가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진리에서 돈목마을로 넘어가는 산골에 대촌마을이 있었지만 이제 빈집만 남아 있다. 진리 마을 앞 동리(동소우이도)와 서리(서소우이도)까지 포함해 우이도리라고 부른다.

마을어업은 어촌계에서 관리하지만 ‘똠’이라 부르는 갯바위의 돌미역, 가사리, 톳 등은 마을마다 옛날부터 이용해온 채취 관행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돌미역은 지금도 여름에 날을 잡아 마을주민이 함께 채취한다. 양이 많을 때는 한 집에 두 명씩 적을 때는 한 명씩 나와서 공동으로 채취하고 똑같이 몫을 나눈다. 여름 피서철이 우이도 미역의 채취시기다. 태풍과 장마를 피해야 하고 미역이 잘 마를 수 있는 날이어야 한다. 여기에 바닷물이 많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야 한다. 채취한 미역을 하루만에 말리면 상품이요, 다음날로 넘어가면 중품이다. 진리처럼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은 미역밭을 윗돔과 아랫돔으로 나누고, 돈목은 모두 한 돔으로 묶어서 채취한다. 돔을 나누면 매년 교체하가면서 미역밭을 운영한다.

우이도 미역은 잎이 넓은 넙덕미역이 아니라 좁고 긴 ‘가세미역’으로 값이 좋아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역 두 가닥을 ‘한 고치’, 열 고치가 ‘한 뭇’이다. 한 뭇은 가격이 좋을 때는 30여 만원 이상 받기도 했다. 농사가 없어 ‘큰애기 쌀 서말 먹이고 시집보내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어려웠다. 쌀은 고사하고 보리밥으로 한 끼를 떼우고 나머지 두 끼는 감자로 이어했다.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역 덕분이다. 주요 통혼권이었던 도초도와 교류가 많았다. 나무를 해서 팔기도 하고, 미역 등 해조류를 말려서 가지고 갔다. 당시 도초도에는 벼농사도 많았고, 소금을 굽는 가마도 있었다. 쌀도 소금도 미역을 주고 바꿔오고, 미역철이 아닌 때는 나중에 미역을 갚겠다고 가져오기도 했다. 우이도만 아니라 홍도, 가거도, 만재도, 상태도, 하태도 등 신안 먼 섬주민의 섬살이는 미역에 의지해야 했다. 도초도에서는 ‘우이도에서 며느리는 데려와도 딸은 보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우이도 생활은 힘들었다.

낭망장을 이용해 잡은 멸치를 삶아 건조하는 모습
낭망장을 이용해 잡은 멸치를 삶아 건조하는 모습

모래언덕에 기대어 살다

‘진리 큰 애기 쌀 서 말은 먹지 못하고 시집을 간다는데, 돈목 큰 애기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다. 돈목은 진리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실제 거주하는 가구는 10여 가구나 될까 싶다. 돈목 마을의 상징은 모래언덕이다. 우이도 북쪽 칠발도어장에서 조류를 타고 성촌 너머 바닷가로 몰려온 모래가 바람을 타고 산자락에 쌓여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산태’라고 부른다. 바람이 만든 모래언덕이란 의미로 ‘풍성사구’라고도 불린다. 그 모래는 산을 넘어 반대쪽 바닷가에 쌓여 해수욕장과 이어지고 마을까지 날라 온다. 모래는 상왕봉 자락에서 내려온 물을 붙잡는 저수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비단조개의 서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주민들은 그 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모래갯벌에 자라는 조개를 캐서 젓갈도 담고 시원한 국을 끓이기도 한다. 그 모래밭을 다지고 담을 쌓아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었다. 풍성사구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손꼽히는 경관자원이다. 또 신안군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때 그 높이가 80m에 이르렀지만 사람들 출입이 잦고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어 높이도 폭도 많이 낮아졌다. 주민들은 풍성사구에 모래가 공급되지 않는 것은 해안과 접한 사구 하단부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모래가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000년대까지 200여 마리 소와 800여 마리 염소가 풀을 뜯어 먹었지만 가축을 키울 사람이 없어지면서 풀이 무성해진 탓이라는 것이다. 2011년부터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고 풀을 제거하면서 많이 회복되었다. 사구에는 갯메꽃, 사초류, 갯방풍, 모래지치, 보리밥나무, 해국, 모래지치 등 사구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모래언덕에 사구식물만 아니라 돈목마을과 성촌마을 주민들도 기대어 살고 있다. 자연은 이렇게 때로는 경고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더불어 사는 지혜를 알려준다. 섬살이가 다 그랬다. 

우이도로 가는 길목 비금도와 도초도를 잇는 서남대교
우이도로 가는 길목 비금도와 도초도를 잇는 서남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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