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2 소금이 온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52 소금이 온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2.06.2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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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신의면 상태서리
상태도와 하태도 사이 제방을 쌓아 만든 신의면 염전
상태도와 하태도 사이 제방을 쌓아 만든 신의면 염전

[현대해양] 전라남도 신안군 신의면에 있는 박성춘토판염 염전에서는 소금고사를 지낸다. 고사라는 말도 생소한데 거기에 ‘소금’ 고사라니. 게다가 염전에서 소금을 수확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2009년부터 이어오고 있으니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천일염이 광물에서 식품으로 바뀐 후 결정지의 장판을 걷어내고 옛날 방식인 갯벌을 다져서 소금을 기다리는 토판염으로 바꾼 날에 맞춰 매년 5월 9일 즈음해서 소금고사를 지내는 날로 정했다.

흔히 ‘신의도’라고 하지만 그런 섬은 없다. 그곳에는 상태도와 하태도라는 두 개의 섬이 있고 지금도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다. 하의도까지 더해 ‘하의3도’라고 불렀다. 1969년 신안군이 만들어진 후에도 하의면에 속했던 신의면의 섬들은 1983년에 이르러서야 분리돼 독립된 면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의면은 상・하태도 외에 고사도, 평사도, 기도 등 유인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800여 세대에 1,800여 명이 살고 있다.

소금고사 참가자들이 소금밭 여행을 하는 모습
소금고사 참가자들이 소금밭 여행을 하는 모습

내땅을 찾기 위한 400여 년의 항쟁

일제강점기 <조선일보>(1924.5.24.)을 보면, 하의3도는 밭이 227만 5,075평, 논이 202만 8,009평, 대지 2,555평, 지소(池沼) 3,949평, 잡종지 2,471평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호수가 1,300여 호, 인구는 8,500명이 살았다. 이들 땅은 14세기까지 섬 주민들이 개척해 생계를 이어온 땅이다. 조선 선조에 정명공주 부마 홍원주가에 5대에 걸쳐 24결의 조세를 수취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홍씨 집안은 8대에 이르도록 24결만 아니라 섬 주민들이 개간한 토지까지 모두 151결에 대해 1결에 백미 40두에 이르는 소작료를 거둬 갔다. 섬 주민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고, 조정에 호소가 이어지자 전라감사 이호준이 나서서 20결에 한해서만 1결에 백미 20두를 징세하도록 했다. 하지만 홍씨가는 소작료를 계속해서 징수했고, 여기에 국세까지 부과되어 섬 주민들은 이중과제의 부담을 감당해야 했다.

참다 못한 주민들은 1824년 주민대표를 한양에 파견해 남대문루의 북을 쳐 ‘삼도의 세금을 받지 말라’는 조정의 답을 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홍씨가에서 매복한 괴한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후 1908년 토지소유권증명법 실시 이후 주민들은 토지를 찾기 위한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토지는 조병택(한일은행 설립)과 정병조(목포갑부)를 거쳐 일본인에게 팔렸다. 이후 토지소유권 확인 소송과정에서 경찰은 일본인 지주 편을 들어 영구소작권, 학교와 교회설립, 도로, 도선배치 등을 제시하며 화해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인 지주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도쿠다’라는 다른 일본인 지주에게 매각했다. 그리고 도쿠다는 더 높은 소작료를 징수하는 한편, 토지를 매립하려는 주민들을 친일파 폭력조직을 동원해 위협했다. 해방 후, 농지는 신한공사가 소유하고 소작료를 징수했으며, 주민들은 토지개혁으로 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1956년 귀속농지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후에 적산불하 형식으로 농민들은 땅을 되찾았다. 소유권이 이전된 것은 1993년이 되어서다. 2009년 하의도 대리초등학교에 농민항쟁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2009년 염전을 토판으로 바꾼 후 처음 소금을 생산하던 날 지낸 고사 모습
2009년 염전을 토판으로 바꾼 후 처음 소금을 생산하던 날 지낸 고사 모습

소금밭이 무너지고 있다

<동아일보>(1928. 8.16)을 보면 하의3도는 ‘농업이 중심이나 부업으로 염뎐(鹽田)이 륙십삼처에 잇어 년 수입이 십만원이나 된다고 한다’고 했다. DJ 생가가 있는 후광리나 신의면 중심지 일대는 모두 옛날 염전이 있었던 곳이다. 제방을 쌓고 저수지와 증발지와 결정지를 만들어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오늘날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과 다른 자염을 생산하는 염전이다. 주민들은 이를 ‘화렴’이라 부른다. 소금을 생산하려면, 먼저 바닷물이 들지 않는 갯벌을 반복해서 소로 갈고 바닷물을 끼얹어 갯벌이 짠물을 가득 품게 한다. 그리고 개흙을 말려 언덕처럼 쌓아두고 바닷물로 끼얹어 짠물을 만들어 큰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갯벌이 발달한 서해와 달리 동해에서는 모래밭을 이용한 모래소금, 제주에서는 너른 암반을 이용한 돌소금을 만들었다. 신안군 천일염전의 효시는 1946년 비금면 수림리 일호염전이다. 이곳에서 염전축조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인근 섬에 염전을 조성했다. 한국전쟁 이후에 비금도만 아니라 도초도, 자은도, 증도, 임자도, 상태도와 하태도 등에 큰 염전들이 만들어졌다.

상태도와 하태도에 염전이 조성된 것은 비금도 일호염전이 시작되고 10여 년이 지난 후이다. 상태도와 하태도를 잇는 제방도 그 무렵 만들어졌을 것이다. 상태도 천일염전 관련 문서를 보면 염전축조는 1954년 무렵에 허가되었다. 그리고 염전제조가 허가된 것은 1965년이다.

우리나라 천일염 생산량은 1990년대까지 연평균 30만 톤 정도였다. 이후 시장개방과 소금값 하락 등으로 생산량은 2020년 13만 9,000여 톤이 감소했다. 생산량은 감소하면서 소금값은 급등해 산지에서 2018년 20㎏ 한 포대에 2,800원 대에 거래되던 것이 2020년 6,300원으로 올랐다. 염전 감소로 인한 생산량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염전 면적은 2013년 4,955ha에서 2020년 4,074ha로 감소했다. 업체수도 1,249개에서 1,003개로 줄었다. 천일염전이 가장 많은 신안군은 2021년 기준 모두 837개 업체가 소금을 생산했다. 그 중 신의면이 230개 업체로 가장 많았고, 비금면 219개 업체, 도초면 100개 업체 순이다. 염전업체의 감소도 심각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천일염전마저도 염전소유주들이 태양광시설을 원해 문화재에서 해제되고 유산구역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정부에서는 <소금산업진흥법>을 일부 개정하여 소금제조업 등의 폐전과 폐업을 허가에서 신고로 바꾸었다. 그만큼 염전 이외에 태양광이나 다른 업종으로 개발하기가 쉬워졌다.

토판염을 수확하는 박성춘 전성자 부부
토판염을 수확하는 박성춘 전성자 부부

이러한 소금밭의 위기 속에서도 몇 년째 토판염의 전통을 이어가며 소금고사를 지내는 염전이 있다. 신안군 신의면 상태서리에 위치한 ‘박성춘토판염’이다. 박씨의 소금밭 맞은 편에는 장산도와 옥도를 지나 안좌도까지 갯골이 있다. 일대 갯벌은 모두 2021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갯벌이다. 지난달에도 20여 명의 여행객들과 박씨 가족들이 모여 첫 토판염 생산에 맞춰 소금고사를 지냈다. 슬로푸드국제협회는 신안토판염을 소멸위기에 처한 종자나 식재료를 찾아 보전・전승해 지역음식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국제프로젝트 ‘맛의 방주’(Ark og Taste)에 등재했다.

 

다음은 그날 소금고사를 지내며 읽었던 기원문이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소금밭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20여년 전 2,000개가 넘었던 염전은 1,000개로 줄어들더니 이제 900여 개에 불과합니다. 머지않아 500여 개로 줄어들 것 같습니다. 소금시장이 개방되면서 중국산 소금이 들어와 가격경쟁력이 없다고 반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태양광을 하겠다고 다시 반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격이 떨어지니 인건비를 건지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땅값이 좋을 때 소금농사보다 염전을 파는 것, 임대료를 받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한때 광물에서 식품으로 천일염의 품격을 바꾸면서 품었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코로나와 함께 소금농사를 짓는 염부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20kg 소금 한가마 값이 커피 한 잔 값에 미치지 못해서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때마침 불어닥친 태양광 열풍은 염전을 집어 삼켰습니다. 염전을 팔지 않는 사람들도 소금농사보다 장기임대료를 받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소금밭을 내줬습니다. 하얀 소금밭 대신에 검은 태양광이 자리했습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염전마저 태양광이 덮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일 년 정도 지났는데 후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금 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더 오를 것 같습니다. 염전이 줄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염전을 판 사람들은 태양광업자에게 다시 임대해 염전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염전이 없어도 밥상에 소금을 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 소금, 베트남 소금, 부자들은 게랑드 소금이나 히말라야 소금을 찾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염전은 우리 어촌에서 섬에서 바닷가에 더 이상 볼 수 없을 겁니다. 소금을 걷는 사람들도 소금창고도 볼 수 없을 겁니다. 염전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만들어졌을까요. 1980년대 안산과 시흥, 오이도 염전에 공단이 자리잡았습니다. 소래 염전과 남동 염전이 있던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1990년대였지요. 해안길로 유명한 영광 백수해안도로에서 볼 수 있는 백수 염전 자리에는 풍력발전과 태양광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최근 일입니다. 이제 염전은 섬에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섬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자본은 국가사업을 등에 업고 야금야금 염전을 태양광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염부들은 소금농사를 짓기 위해 겨울철에도 소금밭을 갈고, 바닷물을 염전에 가두어 짠물을 만들어 놓습니다. 오뉴월에 좋은 소금을 얻기 위해 겨우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소금 꽃은 그렇게 염부의 땀과 함께 겨울을 견디며 만들어집니다. 어찌 이런 소금을 미네랄 성분으로 좋고 나쁨을 따지려 하십니까. 지난 20여 년 미네랄 이야기만 하다 염전은 폐전되고 있습니다. 소금밭을 지키는 일은 미네랄이 아니라 밥상에 김치를 올리고, 음식을 만들어 내는 일과 함께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손맛으로 밥상을 차릴 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염전을 찾는 것은 소금밭을 지키는 장인들과 함께하려는 작은 몸짓입니다. 직접 소금농사를 짓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짓는 소금농사를 응원하며 그 가치에 공감하기에 기꺼이 도시에서 공동생산자로 소비자로 함께 하겠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바다과 갯벌 그리고 염전.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소금밭을 3대째 오롯이 가족들의 힘으로 일구며 지켜온 박성춘 전성자, 박세윤 김민지 부부에게 감사드립니다. 미래 소금밭 주인이 될 두 아이가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당신들을 만나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2020년 5월 14일

소금고사에 참가한 사람들, 슬로푸드에서는 이들을 공동생산자라 함
소금고사에 참가한 사람들, 슬로푸드에서는 이들을 공동생산자라 함
소금고사 이후 이어진 ‘소금밭 토크’
소금고사 이후 이어진 ‘소금밭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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