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6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6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4.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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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창간호 (사진출처_독립기념
『어린이』 창간호 (사진출처_독립기념

[현대해양] 올해가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을 새롭게 평가하고 기념하는 일들을 많이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소파 선생과 향파 선생은 깊은 인연이 있다. 한국 아동문학의 초창기를 개척한 점뿐만 아니라, 두 분의 어린이를 향한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향파 선생이 일본 히로시마 근영학원에서 일을 하다가 1929년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개벽》사에서 일하던 신영철 선생이었다. 신영철 선생을 통해 《개벽》사에 근무하고 있던 당시의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들 중 특별한 한 분이 방정한 선생이었다고 향파 선생은 「아동문학이 싹트던 무렵의 편편담」에서 회고하고 있다. 향파 선생은 방정환 선생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숨 쉬는 것만도 겨웁게 보이도록 뚱뚱한 체격이었다. 《어린이》의 글만 쓰는 게 아니라 때때로 교회당에다 소년들을 모아놓고 동화를 들려주는데 그 구연의 기술이 기가 막히더라고 신영철 선생도 설명해 주었다.” 이런 첫 만남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던 방정환 선생은 1931년 갑자기 돌아가셨다. 1931년부터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에 엄청난 골초였던 탓에 지병인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었고,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의 판매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빚을 지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쳐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소파 선생은 1931년 7월 9일에 사무실에서 코피를 쏟으면서 쓰러졌고, 입원한 지 2주가 된 7월 23일 향년 31세에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별세했다. 세상을 하직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소파 선생은 《개벽》사에서 1923년 3월 20일 창간한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펴냈고, 향파 선생은 《신소년》사에 입사하여 잡지를 편집하며, 이린이들을 위한 글을 썼다. 그래서 《신소년》과 《어린이》는 당시엔 한국을 대표하는 어린이 잡지였다. 향파 선생은 방정환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방정환 전집을 그의 아들 박운용이 주선을 할 때에 많은 자료를 정리해서 도움을 줌으로써 인연을 이어왔다. 방정환의 전집은 1940년 박문서관에서 한 권으로 된 『소파전집』이 제일 먼저 나왔다. 최영주와 마해송이 펴낸 전집이다. 첫 번째 전집 발간 이후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65년 삼도사에서 편찬한 『소파아동문학전집』에서 찾을 수 있다. 삼도사 전집은 국판에 각권 200∼250면 안팎인 5권짜리 전질형 전집으로 편찬되었는데, 박문서관의 『소파전집』과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 분량의 작품을 수록했다. 편집위원으로는 마해송, 이주홍, 이원수 등 아동문학 작가 세 명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방정환의 거의 모든 저작을 망라하여 수집했다고 보고 “소파문학의 결정판(決定版)”을 냈다고 자부했다. 이듬해인 1966년 동양출판사에서도 같은 제목의 전집을 펴냈는데, 편집위원은 마해송, 이주홍, 이원수에 윤석중, 한인현 두 명이 추가되었지만 표지 정도만 달라졌을 뿐 본문은 삼도사본과 동일했다. 1970년에 출판된 덕영문화사의 『소파아동문학전집』도 마찬가지다. 표지와 권별 제목에 차이가 있을 뿐 본문의 조판은 삼도사본과 동일하다.

전집의 체제 구성 면에서 또 한 번의 중요한 변화는 1974년도에 문천사에서 나온 8권짜리 『소파방정환문학전집』에서 살필 수 있다. 삼도사 전집 이후 약 10년만에 새로 편찬된 문천사의 이 전집은 원문 대조를 보다 엄밀히 하였으며, 필명 추적의 방법을 통해 많은 자료를 새로 발굴해 수록했다. 문천사 전집의 편집위원이었던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은 방정환 문학전집의 “결정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단순히 방정환의 저작을 총망라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빠지거나 틀린 것이 거의 없는 바른 책’, 꼼꼼한 원문 대조를 통해 ‘정본(定本)’을 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천사는 3년 후인 1977년에 ‘한국아동문학가전집 시리이즈’로 6권짜리 『방정환문학전집』을 출판하였으나, 1974년에 만들어진 8권짜리 문천사 본에서 별책과 부록 두 권을 빼고 표지 디자인 등을 바꾸었을 뿐 본문의 판형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때도 편집위원은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 그대로였다. 1981년도에 출판된 문음사의 『방정환문학전집』과 1983년에 출판된 조광출판사의 『방정환문학전집』도 1974년도 문천사 전집과 비교할 때 권수는 두 권 더 많아졌고 목차도 달라졌지만, 문천사 전집의 판형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권수를 늘리기 위해 권별 구성과 작품의 배치 순서를 바꾸었을 뿐이므로 새로운 체제를 보여준 전집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 때도 편집위원은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이었다. 그러므로 향파 선생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발간된 방정환 전집의 편집위원의 중요한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데 더 의미있는 것은 방정환 선생과 함께 그리고 사후에도 방정환 선생이 제정한 어린이날과 관련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평생 어린이들을 위한 글쓰기를 쉬지 않았다는 점이다. 향파 선생은 1930년 일제 때 어린이날 행사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부터 10년간 일제의 탄압으로 어린이날 행사가 중단되었으나, 1946년 해방 후 어린이날 행사가 부활했을 때도 준비위원으로 활약했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뒤 부산에서도 1957년에 어린이날 기념 제1회 어린이 예술제를 준비했으며, 동요 동시 심사위원으로도 봉사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의 교가를 작사하여 미래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고 했다. 이런 차원에서 방정환 선생이 제정한 어린이날의 정신과 어린이를 위한 활동은 방정환 선생 사후에는 향파 이주홍 선생으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지난 해 ㈔방정환 연구소와 ㈔향파 이주홍 문학재단이 서로 협약식을 갖고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행사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준비되는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행사들을 통해 소파 방정환 선생과 향파 이주홍 선생이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정신이 제대로 이어져 나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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