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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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3.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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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숲』에 실린 향파의 일기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 (4)
이육사 시인(1904~1944)
이육사 시인(1904~1944)

1940년도로 넘어서면, 1월 20일 자 향파 선생의 일기가 보인다. “완연한 봄이다. 얼었던 흙은 녹고, 나뭇가지 끝에선 새순이 돋기 시작한다. 大省堂에서 이육사와 만나 대륙극장에 가서 ‘타아잔’을 봤다. 《詩學》 표지화를 그리고, 밤엔 아현동에 가서 포도주를 얻어 마셨다.”

이육사 시인과 함께 본 영화 타아잔은 1914년 E.R.버로스의 소설 ‘유인원 타잔’을 원작으로 한 외화였다.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버려진 아기 타잔이 침팬지 등 동물들에게 길러진 뒤 민첩함과 영민함으로 밀림을 지배하고 평화를 지킨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신체 능력을 초월한 타잔은 고릴라, 사자와 힘겨루기를 하며 그들을 목졸라 죽이기도 하고 맹수와 달리기를 해 따돌리기도 한다. 코끼리는 물론 상황에 따라 여러 동물을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도 있다. 어린 시절 밀림의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는 ‘정글의 왕’ 타잔이 얼마나 멋지고 부러웠던지 모든 사람들이 열광한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향파 선생은 이육사 시인과 함께 관람했다. 앞서 만났던 윤곤강 시인과는 차원이 다른 한국시문학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시인이다. 이육사 선생(본명 이원록, 1904. 4. 4(음력)~1944. 1. 16)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아은처사인 부친 이가호와 모친 허길 사이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活)이라 하였으며, 자(字)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陸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하였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이 숙장이었던 예안보문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하였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연수하였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이후 1925년에 귀국하였다.

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맹하였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에서 북경으로 이동하여 의열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하여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하였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일본 대판(大板)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년 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힘썼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 되어 요양하고 있을 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다시 귀국하였다.

1932년 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루쉰을 만나게 되어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으며, 후일 루쉰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하였다.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되어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 23일 수료한 후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하여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띠고 활동 중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서 새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하여 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 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7년에는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다,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 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 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한편 선생은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으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하여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작품 활동 속에서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으로 1943년 5월에 귀국하였으나 동년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체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고,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향파 선생이 이육사 시인을 만났던 1940년은 육사 시인이 가장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하던 시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윤곤강 시인과 자오선 동인이었던 이육사를 《詩學》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윤곤강이 향파 선생에게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갈숲』에 실린 향파의 일기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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