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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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2.1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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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숲』에 실린 향파의 일기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 (3)
시학 (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학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대해양] 향파 선생의 1939년 9월 24일 자 일기에는 “학예사에서 놀다가 윤곤강을 만나 《詩學》에 컷을 그려주기로 했다. 오래 간만에 《詩學》에 줄 시 한 편을 썼다. 「死都의 노래」”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리고 11월 6일의 일기에도 “간밤의 과식에 골아 떨어져 종일 죽을 만큼 괴로웠다. 《詩學》에 시 「발의 年譜」를 주었더니 곤강은 산문 집어치우고 시만 쓰라고 권했다.”라고 남겨놓았다. 향파 선생은 주로 산문을 써왔지만 시도 쓰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활발하게 시 활동을 하던 윤곤강 시인의 눈에는 향파가 산문을 쓰는 것보다는 시를 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윤곤강은 누구이며, 《詩學》은 어떤 잡지였는지가 궁금해진다.

윤곤강은 1911년은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붕원(尹朋遠)으로, 1,500석(石)을 하는 부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14세까지 한학을 배웠다. 1925년 상경해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에 편입, 1928년 졸업했다. 같은 해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5개월 만에 중퇴했다. 그 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 센슈대학(專修大學)을 졸업했다. 귀국과 동시에 카프(KAPF)에 가담했다가 1934년 제2차 카프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전주에서 옥고를 치렀다. 윤곤강은 1931년 11월 『비판』 7호에 시 「옛 성터에서」를 발표하면서 시단(詩壇)에 발을 들여놓은 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37년에 첫시집 『대지』를 간행한 후 1940년까지 매년 한 권의 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해방 전과 후 두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첫 시집 『대지(大地)』를 비롯해 『만가(輓歌)』, 『동물시집(動物詩集)』, 『빙화(氷華)』는 전기에, 『피리』, 『살어리』는 후기에 속한다. 『대지』와 『만가』에서는 ‘시는 현실적·시대적 진실의 열정적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시론에 충실했던, 소극적 저항의 시기에 쓰인 작품집이다. 카프의 영향과 옥중 생활(獄中生活)의 체험을 바탕으로 식민지 지식인의 허탈과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는 그의 시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만가를 스스로 지어 부르는 자조(自嘲)로까지 진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3시집 『동물시집』은 나비·올빼미·원숭이·낙타 등 동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때까지의 우리 시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작품집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시의 소재인 동물들을 자연물이 아니라 현실의 객관적 상관물(相關物)로 노래하고 있다는 면에서 시세계의 본질은 거의 변함이 없다고 본다.

이 『동물시집』과 제4시집 『빙화』에서는 대상과의 객관적인 거리를 통해 감정 과잉이라는 자신의 시적 결함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방과 더불어 그의 시 세계는 『피리』, 『살어리』 두 시집에 나타나 있듯이 전통 계승에 대한 관심, 민족정서의 탐구로 요약할 수 있다. 고려가요의 율조나 그 속에 담긴 정서를 되살려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고려가요의 어투를 차용하거나 율조를 반복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보인다. 저서로는 평론집인 『시(詩)와 진실(眞實)』(정음사, 1948) 및 기타 편저로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 1947) 등이 있다. 시론으로는 「포에지에 대하여」(1936), 「표현에 관한 단상(斷想)」(1936), 「이데아를 상실한 현조선(現朝鮮)의 시문학(詩文學)」(1937), 「시와 현실(現實)의 상극(相克)」(1937) 등이 있다. 이런 정도의 활동력을 지닌 윤곤강이었기에 나이는 향파 선생보다 어리지만 시에서는 앞서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향파 선생에게 시 쓰기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면 윤곤강이 관여하고 있던 《詩學》은 어떤 잡지였던가? 이 잡지는 1939년 3월에 창간되어 1939년 10월 28일 통권 4호로 종간되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1·2호 김정기(金正琦), 3·4호 한경석(韓慶錫)이다. 시학사(詩學社)에서 발행하였다. 잡지 성격을 알 수 있는 권두언에는 문학 현실을 “감식(鑑識)의 폐사. 관념의 망령. 문자의 행렬”로 점철된 퇴폐기로 규정한다. 이에 맞서 “오랜 산문에의 인종의 쇠사슬을 끊고 자아의 새벽을 향하여 돌진해야만 될 시와, 낡은 피견(避見)과 미몽을 아낌없이 팽개치고 눈먼 쩌너리즘에 대한 시 독자(獨自)의 기폭을 옹호해야만 될 시인을 위하야 『시학』을 생탄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추천시고(推薦詩稿)를 매호에 공모하여 방수룡(方壽龍)·임백호(林白虎)·김동림(金東林) 같은 신인들을 배출하였으며, 「시단인(詩壇人)의 동인시지관(同人詩誌觀)」·「동인시지(同人詩誌)의 현재와 장래」 등의 설문, 「시인주소록(詩人住所錄)」 등과 같은 특집이 특이해 보인다.

주요 내용으로는 평론에 이원조(李源朝)의 「현대시(現代詩)의 혼돈(混沌)과 근거(根據)」, 최재서(崔載瑞)의 「시의 장래」(이상 1호), 홍효민(洪曉民)의 「시의 탈환(奪還)」, 이병기(李秉岐)의 「시와 시조」(이상 3호), 한흑구(韓黑鷗)의 「시의 생리론」(4호) 등이 있으며, 시에 이육사(李陸史)의 「연보(年譜)」(1호), 「호수(湖水)」(2호), 김광균(金光均)의 「공원(公園)」(1호), 「조화(弔花)」(4호), 유치환(柳致環)의 「가마귀의 노래」(2호), 「추료(秋寥)」(4호), 신석초(申石艸)의 「가야금」(2호), 「배암」(3호), 이용악(李庸岳)의 「절라도가시내」(3호), 「강ㅅ가」(4호) 외에도 신석정(辛夕汀), 서정주(徐廷柱), 김해강(金海剛), 이고려(李高麗) 등 여러 시인들의 시가 있다. 이렇게 시인들의 작품과 조선시의 현황과 방향을 다룬 시론에서부터 갓 출간된 시집 비평에 이르기까지 시단을 향한 고언과 격려가 균형감 있게 제시되고 있다.

표지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써간 제호 ‘시학(詩學)’을 상단부에 배치(1~2호)했으나, 4호는 중앙에 세로로 배치했다. 그림은 1호: 고대유물에 새겨진 상형문자 모양의 사자와 물고기, 현무(玄武), 2호: 초록의 탱자나무 위에서 팔랑대는 나비, 4호: 구름 속에서 웅비하는 용의 자태를 취했다. 표지화는 전통적 동양미학을 살려내고 있는데, ‘조선적인 것’을 향한 존중과 의욕이 엿보인다. 이 그림 중 종간호인 4호에 향파 선생이 그려준 컷이 실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파 선생이 윤곤강에게 건넨 시는 《시학》이 10월 4호로 종간됨으로써 작품이 발표되지 못했다.

번역 또한 이 매체에서는 주목되는 부분이다. 번역시로는 2호에 괴테의 「파우스트」(권환), 린제이의 「길손」(이하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로」(임학수), 푸시킨의 「소조(小鳥)」(함대훈), 포의 「엘도라도」(최재서) 등이, 3호에는 「파우스트」, 휘트먼의 「공상」(한흑구), 블레이크의 「라오콘 군상 주기(註記)」(청파) 등이, 4호에는 부릿지즈의 「나이팅게일」(이하윤)이 실렸다. 또한 청파생은 「뽀와로—시학초」(1호), 포의 「창작철학」(2호)을 번역하여, 앞의 가작(佳作)들을 낳은 서양의 시 창작법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렇게 《시학》은 60쪽 내외의 많지 않은 지면이었지만, 여기에 시와 시론, 비평과 번역, 신인 공모, 문단 풍경과 소식 등을 빼곡히 담아냄으로써, 파시즘이 강화되는 일제 강점기 현실 속에서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유익한 시 창작법을 제공한 매체로 자리했다. 이렇게 향파 선생은 1930년대 창간된 여러 매체들에 관여하면서 문학활동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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