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㊼ 죽변에 바람이 분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㊼ 죽변에 바람이 분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2.01.12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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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죽변항 (하)
죽변항
죽변항

[현대해양] 등대로 향했다. 바람은 거칠지만 멀리 볼 수 있는 곳이다. 잠시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거란 마음으로 임시거처를 마련한 곳이다. 낯선 바다에 물질을 하러 온 해녀들도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양지바른 곳에 머물지 못하고 동바지에 똬리를 틀어야 했던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시난고난했을까. 등대 너머로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가 들려 내려가보니 조릿대 사잇길로 동해바다가 철썩인다. 해안을 따라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고, 등대를 감싸고 ‘해파랑길’이 이어져 있다. 살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떠나고, 이제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등대 너머 암초에 파도가 부서지면서 하얀 파문을 일으켜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다.

죽변항 일출
죽변항 일출

‘후리깨’에 머물다

죽변등대는 1910년 11월 ‘용추곶’에 불을 밝혔다. 바다로 돌출한 육지를 곶이라고 한다. 한반도 지형을 보면 동쪽으로 허리를 내민 지형이 울진이다. 울진에서도 죽변항, 구산항, 후포항이 대표적이다. 죽변항에는 등대가 있고, 구산항에는 신라시대 울릉도를 오가던 관리들이 바람을 피하고 기다리던 대풍헌이 있다. 그리고 후포항에는 울릉도로 가는 여객선터미널이 있다. 모두 울릉도, 독도와 관련된 지역들이다.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주민들은 용태미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바다까지 암초가 있고 중간에 용소도 있단다. 조선시대 가뭄이 심했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수일 내로 비가 내렸다고한다. 물을 다스리는 용과 관련된 범상치 않은 장소다. 이곳에 높이 16미터에 백색 8각형으로 등대를 세웠다. 등대는 20초마다 섬광을 발사해 37킬로미터까지 떨어진 바닷길을 안내한다. 200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등대로 가는 길목에 울릉도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을 알려주는 상징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신라 진흥왕 시절에 왜구의 약탈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했던 곳이며, 러일전쟁기에 일본군 해상감시용 망루가 설치되기도 했던 곳이다. 등대 주변 바닷가는 온통 조릿대(벼과에 속하는 키작은 대나무로 우리나라의 어느 숲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로 가득하다. 죽변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이유다.

죽변등대
죽변등대

속초만 아니라 울진 죽변에도 ‘아바이촌’이라 부르는 실향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있었다. 등대 아랫마을이다. 황해도 실향민들은 서해를 따라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 등 인천과 옹진 일대의 섬에서 신안 일대의 섬 지역까지 내려갔다. 함경도 실향민들은 속초, 울진, 포항, 부산까지 큰 포구 주변 변두리에 머물렀다. 후리깨가 그 중 하나다. 배를 접안하기 좋고, 어족자원도 풍부하며 어시장도 가까웠다. 배를 가지고 내려오거나 타고온 실향민들이 어장을 하기 좋고, 일자를 찾기 좋았다. 고씨와 백씨가 처음 입향했다는 이곳은 ‘후리깨’라 불렀다. 언덕 아래 그늘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어 후리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해안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함경도 사람들만 아니라 물질을 하러 온 제주해녀들도 머물렀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중에 죽변4리로 분할되었다. 그렇게 모여들었던 1세대들은 세상을 떠났고, 어장 일을 하지 않았던 자식들은 새로운 일자리와 삶터를 찾아 떠났다. 좁은 골목길로 차가운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명태와 청어, 꽁치와 오징어, 그리고 대게와 가자미

울진군을 대표하는 어항은 죽변항과 후포항이다. 특히 죽변항은 오징어와 대게잡이 어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오징어 어획량은 줄고 물곰(미거지), 가자미, 쥐치가 많이 잡혔다. 한 달 전 싱싱한 오징어로 가족들의 환영을 받았던 기억에 위판장 구석구석 돌아봤지만 오징어는 찾지 못했다. 대신에 가자미가 건조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마침 오징어배가 들어왔지만 활어로 경매가 끝나기가 무섭게 수족관에 실려 포구를 떠났다. 얼음에 재운 숙성된 싱싱한 오징어를 찾기 어렵다.

죽변항이 어항으로 모습을 갖춘 것은 일제강점기때다. ‘조선수산개발사’(1958)를 보면, 죽변항은 1908년 5월 일본 시네마현 수산조합에서 이주어촌을 건설하고 등대를 세웠고, 1912년에 18호 48명이 거주했다. 죽변항 축항은 1938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죽변항은 72호에 어선 6척, 지예망 3통을 소유하고 정어리, 삼치, 방어, 청어, 전어, 도미, 문어, 게 등을 잡았다. 일본인에게는 잠수기 어로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명태, 정어리와 청어를 많이 잡았다. 지금은 오징어, 쥐치, 가자미를 주로 어획한다.

죽변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가자미가 주렁주렁 걸렸다. 동해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는 기름가자미이다. 동해안 가자미는 서해안 숭어만큼이나 친숙하고 다양하게 이용되는 생선이다. 동해 고성에서 주문진, 삼척, 죽변, 후포, 구룡포에 이르기까지 바닷마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물가자미라고도 부르며, 생선가게에는 ‘미주구리’라고 쓰여있다. 구이와 탕과 식해는 말할 것도 없고, 겨울김장을 할 때 깍두기나 무김치 등 오래 두지 않고 금방 먹을 김장김치에 넣기도 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징어를 찾아 가까운 망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징어풍물거리가 유명하다. 해안을 따라 옛날 도로에 오징어 건조대를 줄지어 세워두고 막 잡아 온 오징어를 할복해서 말리는 곳이다. 그런데 늦었다. 아침에 잡아 온 오징어는 이미 손질이 끝나 건조대에서 마르는 중이다. 손질하기 전에 와야 현장에서 살 수 있다.

가자미를 말리는 주민
가자미를 말리는 주민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 고개 언제가노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 가노/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 가노/반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후렴)가노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전해오는 십이령 바지게꾼들이 불렀던 노래다. 이들을 선질꾼, 등짐장수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보부상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죽변장, 흥부장, 울진장 등 오일장에서 소금, 해산물, 미역 등을 지고 십이령(쇳칫재, 세고개재, 바릿재, 샛재, 너삼밭재, 젓은텃재, 작은넓재, 큰넓재, 꼬채비재, 멧재, 배나들이재, 노룻재 등)을 넘어 200여리를 걸어 소천장, 춘양장, 내성장까지 2, 3일을 걸어 장사를 했던 사람들이다. 흥부시장은 1919년 4월 13일 일어난 ‘4.13만세운동’의 진원지로 동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유명하다. 당시 흥부장은 울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죽변항이 축조되고 어선들이 모여들고 규모가 커지면서 흥부장이 약화되었다.

조선조 선조때 개설된 울진장은 선질꾼들이 오갔던 장으로 ‘울진바지게장’이라고도 하는데 초장, 중장, 종장으로 사흘간 열렸던 오일장이다. 선질꾼들은 바닷가에서 말린 생선과 소금을 가지고 ‘십리령’을 넘어 봉화에 팔았다. 특히 소금이 귀한 내륙산간마을에 죽변항과 가까운 근남면 수산리 염전해변에서 구운 소금과 흥부장과 죽변장에서 어물과 고포 미역이 인기품목이었다.

죽변 오일시장
죽변 오일시장

왕피천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염전해변은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소금을 만들었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을 염전리라고 부른다. 울진엑스포공원 일대를 말한다. 천일염전이 등장하기 전에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이를 ‘자염’이라 부른다. 갯벌이 발달한 서해에서는 갯벌에 염전을 만들고 바닷물을 뿌리고 써래질을 해서 짠물을 만들었다. 갯벌이 없는 동해에서는 모래밭에 황토 흙을 섞어 염전을 만들어 바닷물을 뿌리고 써레질을 한 후, 함토를 모아 걸러낸 함수를 솥에 넣고 끓여서 소금을 얻었다. 동해 소금은 서해나 남해에 비해 생산량이 적었다. 안동이나 봉화처럼 종가가 많고 문중제사를 많이 지내야 했던 지역에서는 제물로 올릴 생선이 꼭 필요했고 생선을 절일 소금이 필수였다. 민가에서도 소금 없이는 생활할 수 없었다. 그 소금을 공급했던 곳이다.

동해 소금밭으로 유명한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염전해변
동해 소금밭으로 유명한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염전해변

울진금강소나무숲길 중 ‘보부상길’이 있다. 또 왕피천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두천리 마을에는 보부상이 머물렀던 주막촌이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영주와 봉화로 가는 길이 십리령고갯길이다. 주막촌을 지나 산길 입구에 이르면 울진내성행상불망비 두 기가 있다. 내성은 봉화의 옛 이름이다. 울진과 봉화를 오가며 농산물과 해산물을 물물교환을 했던 선질꾼의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철비다. 이들은 산길을 오가는데 편리하게 만든 쪽지게를 지고 봉화장과 그 주위에서 곡식, 의류, 잡화 등과 교환했다. 이제 선질꾼 대신 여행객들이 그 길을 걷고 있다. 소설가 김주영이 ‘객주’를 마무리한 그 길이다. 겨울바람이 분다. 가자미나 오징어 말리기 좋은 날씨다. 

울진금강송길
울진금강송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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