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2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2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1.12.14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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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숲』에 실린 향파의 일기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 (1)
《작품(作品)》 표지
《작품(作品)》 표지

『갈숲』은 창간 이후 꾸준히 이어져 왔다. 24타까지는 향파 선생이 직접 편집을 했다. 향파 선생의 타계 이후에는 다른 동인에 의해 41타까지 이어오다가 지금은 종간한 상태이다. 그런데 24타까지의 내용 중 우리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가 향파 선생의 일기가 『갈숲』 2타부터 24타까지 23회나 연재되고 있다는 점이다.

『갈숲』 2타에서 시작되고 있는 일기는 「春風秋雨點點錄」이란 제목으로 시작된다. 그가 남겨놓은 1979년 3월 9일 자 일기에 의하면, 이날부터 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기록해 두고 있다. 이때 쓰기 시작한 일기는 1979년 5월 1일에 발간된 『갈숲』 2타에 처음으로 실리게 된다. 『갈숲』 3타에는 「續春風秋雨點點錄」, 『갈숲』 4타에는 「又續春風秋雨點點錄」, 『갈숲』 5타에는 「春風秋雨點點錄」, 『갈숲』 6타에는 「更續春風秋雨點點錄」, 『갈숲』 7타에는 「又續春風秋雨點點錄」, 『갈숲』 8타에는 「更續春風秋雨點點錄」, 『갈숲』 9타에는 「續續春風秋雨點點錄」, 『갈숲』 10타에는 「又續春風秋雨點點錄」 등의 변화된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런데 좀 더 고찰해보아야 할 지점은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이미 자신이 써두었던 일기초를 다시 정리한 것인지, 지난 과거를 단편적인 기억에 의해 재구성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1939년도의 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억에 의존한 것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향파 선생의 오랜 기간 동안의 일기 원본을 찾아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상당한 기간 동안의 삶의 일상이 남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향파 선생이 쓰기 시작한 일기는 1939년 8월 8일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연재된 전체 일기는 24타(1987년 2, 15일 발행)에 실린 23회째가 되는 1982년 11월 5일 자의 일기로 마감되고 있다. 이는 햇수로 치면 43년간의 기록인 셈이다. 매일 매일 일기를 남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 긴 세월 동안에 남겨진 일기는 단순히 개인사를 넘어 지역사에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부분도 있고, 문화사적인 차원에서 눈여겨볼 장면들이 매우 많다. 한 작가의 일기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작가의 삶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향파 선생의 『갈숲』에 발표된 일기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기록된 일기의 첫 장면을 살펴보자. 1939년 8월 8일 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창서관(永昌書舘)으로부터 부탁받은 소설 「深苑의 長恨」 표지화를 그렸다. 홍효민 형과 저녁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東亞紙에 소설을 쓰라기에 결심을 해보았다.” 우선 주목되는 사실은 향파 선생이 영창서원에서 발간하는 소설집에 표지화 그리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39년이라는 당시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생각하면 향파는 글만 쓰고 있을 형편이 못되었다. 생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모두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홍효민 평론가가 향파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했다는 사실을 통해 향파는 당시 글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원고 쓰기에 전념하기보다는 표지화 그리기나 영화광고 도안을 그리는 일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다음날 8월 9일 일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계속되고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래성 씨와 차를 마셨다. 《朝光》으로부터 수필, 영창서관으로부터 소설 「黃氏日」 장정 청탁을 받고, 이어서 고려영화사의 광고 도안을 그렸다.”(8월 9일 일기)

그럼 그가 표지화와 장정을 부탁받은 영창서관은 당시 어떤 곳이었던가? 191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서점 겸 출판사로, 강의영(姜義永)이 서울 종로 3가에 설립하였는데 처녀출판물은 확실하지 않으나 척독류(尺牘類:편지종류)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이 유행창가집류였다.

초기의 주요 출판물로는 『시행가정척독 時行家庭尺牘』, 『신식보통척독 新式普通尺牘』, 『세계유행명곡집 世界流行名曲集』, 『이십세기청년창가집 二十世紀靑年唱歌集』 등의 창가집으로 연간 매출액이 6만여 원(1930년초)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설류로는 『화용월태 花容月態』≫, 『오동추월 梧桐秋月』, 『김유신실기 金庾信實記』, 『이순신실기 李舜臣實記』, 『홍경래전 洪景來傳』 등을 독점하였다.

번안·번역류로는 『부활한 카츄샤』, 『백발귀 白髮鬼』, 『노라』 등으로 외국작품의 여명을 개척하였다. 신용확보를 제일의 목적으로 삼고, 박리다매를 위주로 한 영창서관은 더욱 성장하여 『춘원걸작선집』 전 5권 등을 발행하는 등 업적이 많았다. 광복 이후 1960년대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으로 이전하여 소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서점으로 경영하다 폐업하였다.

그런데 향파와 관련해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영창서관에서 《작품(作品)》이란 문예지를 창간했다는 점이다. 《작품(作品)》은 1939년 6월 1일 자로 창간된 문예지인데, 창간호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 창간호에 향파는 「만화(漫畵) 도중봉견기(途中逢見記)」란 수필을 발표했고, 표지화를 그렸다.

8월 12일자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비판사(批判社)에 고료를 받으러 갔으나 허탕이었다. 《소년》에 동화 「날개 돋힌 자전거」를 써주었다. 오래간만에 청량리 셋방으로 돌아와 보자 S에 대한 가지가지의 회상이 사람을 괴롭힌다. 金x이가 와서 浪漫座 「아편전쟁」의 무대장치를 청하나 굳이 사양했다.” 이 일기에 나타나듯이 당시에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원고료란 제때 제대로 주어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30년대 이후 잡지들이 많이 생겨나고 출판문화가 상당히 발전했다고는 하나 잡지사들의 형편은 그렇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판사에서 출판하는 잡지 《비판》은 1931년에 창간되었던 월간잡지로서 좌익적 입장에서의 사회 고발을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창간 권두에 “우리는 선을 설(說)하는 독사의 본신(本身)을 밝히며 화장한 꾀꼬리의 정체를 드러내어 무리의 앞에 펼쳐 놓아 이목(耳目)의 난탁(亂濁)을 밝히며, 밝히는 데 극미한 도움이나마 될까 하여 ≪비판≫을 발행한다”고 밝히고 있듯이, 이런 취지와 입장에서 시종일관했던 비판적인 잡지였다. 비판을 주로 하는 잡지이지만,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잡지는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면서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이론 투쟁과 관련된 글들을 많이 실었다. 하지만 필봉은 점차 무디어져 갔고, 1933년 6월 23호를 내고는 휴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35년 10월 속간되었는데, 이후 잡지의 성격은 일반 시사잡지 수준으로 크게 변하였고, 총독부 측에서 요구하는 각종 선전 기사도 싣기 시작했다. 따라서 1940년 1월호까지 114호를 발행했지만, 잡지로서 창간 정신을 제대로 실천한 것은 1933년 23호까지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향파의 일기는 하루하루의 삶의 기록이 메모 수준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그가 만나고 관계했던 당시의 문화사적인 상황들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원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개인사를 넘어 한국 문화사를 짚어볼 수 있는 반사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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