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1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1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1.11.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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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숲』에 스민 향파의 인생 가을 내음
「갈숲」 표지
「갈숲」 표지

1978년 향파 선생은 또 하나의 문학 매체를 만들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문학 매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갈숲』이다.

『갈숲』 창간호는 창간호란 명칭 대신 1타(朶)라고 표지에 남기고 있다. 타(朶)란 꽃송이나 꽃 가지를 세는 말이다. 『갈숲』은 한 권 한 권이 꽃 한송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갈숲』 창간호 표지에 기록해둔 『갈숲』 선언문이다. 선언문은 이렇게 딴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여기는 부석강(腐石江) 하구(河口)의 갈밭/바람이 있고/잎 내음이 있고/철새가 있을 뿐/세속(世俗)의 어떤 간지(奸智)도/어떤 음모(陰謀)도 범접 못하는/적묵(寂黙)과 은둔(隱遁)의 별향(別鄕)/가끔씩 여기로 도피(逃避)해 나와/우리는 저마다 씨와 날이 다른/사유(思惟)와 언어(言語)를 교직(交織)한다/사공(沙工)들도 이 옹달엔/드는 일이 없지/사각이는 갈잎의 선음(禪音)으로/우리는 어머니의 자장가에서처럼/편안히 잠재워진다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아니 그 이상인 선음이 오가는 『갈숲』의 공간은 분명 별향임에 틀림없다. 그곳에는 어떤 자들이 함께 모여 저마다 서로 다른 씨줄과 날줄로써 사유와 언어를 교직하고 있었을까? 말 그대로 다양하다. 시인 박노석, 소설가 박순녀. 수필가 빈남수, 수필가 서인숙, 소설가 송원희, 서예가 오제봉, 아동문학가 임신행, 시인 조순, 그리고 향파 선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펼쳐놓은 『갈숲』 마당에 모인 작품들을 한번 둘러보자. 먼저 수필가 서인숙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순간을 환희로 맞이한다. 도회에 고층의 집들이 세워지면서 떠오르는 태양도 볼 수 없는 과학만능의 시대에, 집들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태양을 바라보고 신의 은총을 사유하는 모습에서 자연에의 남다른 감각을 엿본다. 시 「석류」, 「연꽃」 두 편 역시 순수한 자연에 공감하는 그녀의 자연송이다. 『갈숲』이 지향하는 자연주의자의 모습이 돋보인다. 오제봉의 「답향파송축시」는 향파 선생이 오제봉에게 고희기념 축시를 보냈는데, 이에 답하는 향파를 기리는 축시를 오제봉이 다시 보낸 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격이없이 서로 주고받는 글은 『갈숲』에서 나누는 대화 같다.

박순녀 소설가의 「명화」는 앞집 아파트에 사는 그림 그리는 한 여성에 대한 상념이다. 그 여성에 대한 궁금증이 도를 넘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점증되고 있어, 『갈숲』에 스미는 갈대들의 서걱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수필가 빈남수의 「술, 그 첫 잔」은 술의 첫 잔이 주는 맛과 매력을 예찬하고 있다. 그의 술 예찬은 취하기 위함이 아니고 즐기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갈숲』에 놓인 술자리에 우리를 인도한다. 박순녀의 「재혼 콤플렉스」는 재혼한 남편을 사별하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오해를 풀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은 부자연스러운 세상사들에 대한 자연스런 매듭풀기를 경험하게 한다. 『갈숲』에서 교직하는 언어는 이렇게 자연스러워야 함을 내보여 준다.

조순 시인의 「암실」, 「밟힌 운동화에 고인 빗물」 두 편의 시는 『갈숲』으로 형성된 그 공간에 들어선 암실의 분위기와 『갈숲』에 비가 내릴 때를 상상하게 한다. 송원희의 「비둘기의 자유」는 비둘기를 집에서 키우고자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함으로써 비둘기가 집으로 찾아오는 방법을 마련하는 얘기다. 새도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통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추구하는 근원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왜 세속의 어떤 간지도 없는 『갈숲』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다시 떠올린다. 임신행의 「미모사」는 보고 싶은 엄마를 만나러 떠나는 일정을 통해 별향의 『갈숲』을 찾아나서고 있다. 빈남수의 「요일병(曜日病)」은 휴일로 인해 정신적 외롬과 육체적 리듬이 파괴되어 생긴 정신적 병인 요일병을 에방해 나가야 함을 의사로서 진단하고 있다. 어떤 음모도 범접못하는 『갈숲』으로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순녀의 「손이 큰 아이」는 어릴 때 막내로 자라면서 마음에 맺힌 무엇을 차지하고자 한 의식이 무엇이든지 많이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고착되어 <손이 큰 아이>가 되었다는 슬픈 사연이 자전적 소설로 꾸며져 있다. 자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평온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는 소설 속 화자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자장가가 있는 『갈숲』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오제봉의 「한국의 명필들」은 우리에게 서예 역사는 있지만 제대로 된 서예비평이 없었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서예사에서 논의가 될만한 48편의 서예작품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그가 힘주어 논평하고 있는 것은 추사의 서체가 지닌 오점을 지적하는 부분이다. 이 오점조차 후학들은 따라해 왔다는 따끔한 비평은 『갈숲』이 지닌 사유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임신행의 「톱사슬 벌레」는 자연 속에서 빠져 살면서 다양한 곤충과 동물을 잡아 다른 아이들의 관심 대상이 된 윤이와 그 윤이와 똑같은 선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석이와의 갈등을 흥미롭게 풀어낸 동화이다. 동화의 공간인 달마산은 바람도 있고, 잎 내음도 짙게 풍기고 철새도 날아드는 『갈숲』을 닮아있다.

이상 『갈숲』에 모인 자들이 언어로 교직해 놓은 세계도 흥미롭게 눈여겨볼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역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들은 향파 선생이 펼쳐놓은 「식락태평기(食樂太平記)」와 「당신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생각하고 계십니까」이다. 「식락태평기(食樂太平記)」는 말 그대로 전국을 다니면서 먹었던 맛 나는 음식들에 대한 기억담이다. 옛날 동래 온천장에 자리했던 「벽초관」을 시작으로, 비빔밥은 합천의 「강술집」, 돼지고기는 해인사 「할머니집」, 설렁탕은 종로의 「이문옥」, 육개장은 서면의 「태화장」, 곰탕은 마산의 「대성장」, 냉면은 「원산옥」, 가락국수는 「18번」, 해장국은 여수 「해장국집」 등 그가 순례했던 이름난 음식점은 끝이 없을 정도로 나열되고 있다. 향파 선생이 소위 미식가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이 정도로 방방곡곡의 음식점을 찾았다는 것은 흥미롭다.

역시 『갈숲』 창간호의 백미는 향파의 「당신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생각하고 계십니까」이다. 향파 선생이 추석날 다례 이후에 작고한 문인 친구들이 보낸 편지 뭉치를 펼쳐보면서, 그들과의 인연을 헤아려보고 있는 글이다. 그 대상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김용호, 이상노, 장만영, 홍두표, 김수돈, 이종환 등이다. 김용호가 운영하던 남광 문화사에서 향파가 『탈선춘향전』을 펴낸 일, 《문학시대》를 발간할 때 이상노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 KBS 방송에 함께 출연했던 장만영에 대한 추억, 만년에 과객처럼 어렵게 지냈던 홍두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 임종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준 박명했던 천재 김수돈, 붓글씨에 능했지만 말년이 초라했던 이종환 등의 삶의 진면목이 자상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미 지상을 먼저 떠난 그들이 향파 선생에게 남겨놓은 인연의 흔적을 만지작거리면서 향파 선생도 자신이 가야 할 지상의 마지막 길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먼저 간 사람들과의 인연을 떠올린다는 것은 죽음의 흔적을 통해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행위이기에…

이렇게 본다면, 향파 선생의 인문학의 뿌리는 죽음을 통해 현재 삶의 진정성을 찾아나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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