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0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0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1.10.1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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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홍의 소년소설 『정만서 무전여행기』에 나타난 익살들
정만서 무전 여행기 앞표지
정만서 무전 여행기 앞표지

[현대해양] 『정만서 무전여행기』(배영사,1968)는 《새벗》에 1964년 7월부터 1966년 5월까지 연재된 작품이다. 향파 선생이 조선 말기의 평민인 정만서에 관한 설화를 현대 소년소설로 변용한 것이다. 이 설화는 부자나 관리들을 골려 주거나 풍자하는 등 정만서와 관련한 일화들을 포함하며, 주로 경주군 인근과 경상북도 남동부 지역 일대에서 구전되었다. 현재까지 수집된 유형은 50편 정도 된다. 그런데 문헌설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유형에 따라 사기담·경쟁담 또는 음담패설로 분류할 수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소화(笑話)나 골계담(滑稽談)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만서는 경주시 건천면 출생이며, 용명2리에 무덤이 있다. 비문에 의하면, 동래 정씨로서, 이름은 정용서(鄭容瑞), 자는 만서(萬瑞), 호는 춘강(春岡)이고, 1872년(고종 9)에 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896년 61세로 죽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그는 일생을 평민과 더불어 살면서 부자와 관료들의 횡포에 맞서고 풍류와 임기응변의 재치로 생활의 방편을 삼는가 하면, 삶과 죽음 등 근원적인 문제를 자각시켜 주는 일화도 많이 남겼다.

이러한 설화들을 향파 선생은 정만서가 경주를 떠나 대구를 거쳐 경기도로 나중에는 서울까지 무전여행을 하고 다시 경주집으로 돌아와서 죽음을 맞는 것으로 일종의 여행기로 꾸며놓고 있다. 그런데 향파 선생은 정만서에 관한 설화를 그대로 소설로 구성하지 않고 변형시켜 현재성을 지닐 수 있게 꾸며놓고 있다.

정만서의 이야기가 꾸준히 전승되어 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재미였다. 설화에서 기생이 욕심 많은 인물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인물을 속여서 돈을 빼앗는 이야기가 청자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말장난이나 언어유희가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런 말장난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문학으로서의 골계적·풍자적 양식 외에도 민중적 지성, 또는 민중적 영웅의 인물 유형을 분석해 냄으로써, 종래의 서사문학에서 존재하던 미적 범주나 인물 유형의 성격을 어떻게 계승하고 변용해 왔는가 하는 논의도 가능하게 해 준다.

우선 정만서가 살구나무집 노파의 외손자와 만나서 나누는 대화를 언어유희의 측면에서 한번 들여다 보자.

“너 이놈, 살구나무집에 있는 놈이 아니야.” “살구나무가 저의 집에 있는 편인걸요.” “아아니 요놈 바라? 네 이름이 뭐냐?” “집에서 부르는 그대로예요.” “그럼 성은 뭐니?” “아버지하구 같애요.” “이 놈이 정말? 네 나이는 몇 살이니?” “작년 나이에다 한 살 더 얹은 거예요.” 만서는 어이가 없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주머니 안엔 뭐가 들어 있기루 그렇게 불룩해 있냐,” “이 안에요? 산이 들어 있어요.” “이 놈아, 그 작은 주머니 안에 어떻게 산이 들어 있단 말이냐,” “해해해해 … 잡동산이가 가득 들었어요.”

그러면서 사내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리 아이들이 물장난치고 있는 개울 쪽을 향해서 아까 모양 팔딱팔딱 뛰어가 버린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게 된 만서는 닭 쫓던 개가 되어서 멍하니 그 아이의 뒤만 바라다보고 서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익살의 명수 정만서 아저씨까지를 깜찍하게 놀려 먹고 내뺀 당돌 맹랑한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향파 선생은 지배와 억압의 대상에 대하여 정만서가 어떻게 대항하여 민중적 의지를 실현해 왔는가 하는 문제도 이 소년소설에서 다루고 있다. 정만서가 여러 고을을 지나 서울과도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안성 고을의 동헌에 이르러서,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재판을 참관하면서 원님의 잘못된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그곳 기왓골 마을에 사는 정 좌수가 소유하고 있는 귀한 구슬을 원님이 빼앗고자 정 좌수를 동헌에 불렀다. 원님은 “내가 세 가지 묻는 말에 좌수가 대답을 하면 내가 돈 천 냥을 주겠고 만일에 대답을 못 하게 되면 집에 있는 구슬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청한다. 좌수가 감히 그러겠다, 못 그러겠다 말을 못하고 있는데, 원님은 좌수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거나 제 할 말만 했다. 원님이 세 가지 질문을 했지만 정 좌수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원님은 “자, 그럼 내기는 끝났소. 약속이니 지금 가서 빨리 구슬을 가져오시오.”라고 명령을 했다. 좌수가 힘없이 대청을 내려와서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어떤 키 큰 남자 한 사람의 귓속말을 듣고 있던 여자 하나가 원님 앞으로 나아가 엎드린다.

“소인은 지금 내기에 져서 내려온 정 좌수의 아내 되는 여자 올시다.” 그러자 원님은 “오오, 미리 내기에 질 것을 알고서 구슬을 가져왔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정 좌수의 부인은 “아니올시다. 소인에게도 내기를 해줍시사 하고 간청드리는 것이 올시다.”리고 답했다. 이에 원님은 “너도 대답을 못한다면 구슬을 가져오겠다는 건가? 라고 물었다. 부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원님이 지면 소인에게 돈 천냥을 주셔야 한다고 요청했다. 원님은 좋아라고 말하고 , 너의 집 배나무에 가지마다 새가 앉는다면 모두 몇 마리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부인은 ”이천 삼백 아흔 한 마리가 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원님이 “어떻게 그걸 그토록 자세히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부인은 “지난 해에 가지마다 배가 열렸는데 전부를 따서 세워보니 도합 이천 삼백 아흔 한 개입데다. 새가 앉더라도 그 이상은 더 못 앉을 것이 올시다” 원님은 “넌 정말 묘한 인간이로구나, 그러면 둘째 문제를 묻는다. 보름달이 하룻밤에 몇 리를 가겠느냐?”라고 물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칠십 리를 갑니다.” 라고 답했다. 이에 원님은 “달이 하룻밤에 단 칠십리밖에 더 못 간단 말이냐? 라고 물었다. 이에 부인은 ”금년 정월 보름달 저의 친정 모친의 부고를 받고 꼭 달 뜰 때 걸어서 친정까지 가니까 달이 똑 떨어졌습니다. 소인과 달이 같은 날 밤에 동행을 했는데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님은 “허허 갈수록 너는 묘한 인간이 되는구나, 그래 그건 좋다고 하고 마지막 이걸 하나 대답해 봐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은 원님이 반쯤 일어나 보이면서 물었다. “자, 내가 지금 서겠느냐, 앉겠느냐?” 그 소리를 듣자 이번에는 여자가 벌떡 일어나 원님을 보고 되물었다. “그럼 먼저 소인이 하나 묻겠습니다. 소인이 지금 웃겠습니까, 울겠습니까?”

이러자 구경꾼들로부터는 박수 소리가 우뢰처럼 끓어오르는 대신에 내기에 진 원님은 돈 천냥까지 내어줘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울상이 되어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원님을 납작하게 해 놓도록 꾀를 내어 준 아까의 그 키 큰 남자란 다른 사람도 아닌 정만서였다. 좌수가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을 보고서 이렇게 그의 부인에게다 맹랑한 지혜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향파 선생은 역사적 인물이 남긴 이야기를 통해 재치와 익살이 잘 융합된 민중적 지성을 소설화함으로써 골계미를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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