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섬사람 이야기
두 섬사람 이야기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6.0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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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열매 맺는 은은한 블루스 곡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새벽 두 시, 드디어 은은한 블루스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블루스 곡이야말로 이로써 오늘의 영업이 끝난다는 시그널이었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짝을 지은 남녀들이 우르르 무대 앞 중앙 홀로 몰려나와 그 곡에 맞추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모두 프랑스인들이었고, 상대 남자들은 거의가 배를 타는 외국인들이었다. 한국인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으며, 보스턴 인근 어항인 글루체스터 출신 미국인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뉴펀들랜드 가까이의 그랜드뱅크에서 무진장 회유하는 청어나 대구 등을 잡는 어부들로, 잡은 어획물을 그 섬의 가공공장에다 양륙한 다음 다시 어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한 잔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 시각 프랑스 여자와 짝을 지어 블루스 스텝을 밟게 된 상대는 쉽게 말해 선택된 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모두 바다에 남편을 빼앗긴 과부이거나 처녀이기 때문이었다. 남자에 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여자 몫이었다. 그러므로 여자와 함께 마지막 곡인 블루스 스텝을 밟게 된 남자들은 그들의 국적이 어디든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외롭게 보내지 않아도 될 행운아가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마지막 블루스 곡에 맞추어 여자와 함께 스텝을 밟았다고 해서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서둘러 쾌재의 콧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직도 성급한 일이었다. 아직도 여인이 확답해 줄 한 가지 절대적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곡이 끝난 다음 자리로 돌아온 여인이 의자에 걸쳐둔 남자의 점퍼를 가로채어 자신의 엉덩이에다 깔고 앉는 등의 괴이한 행동이었다. 그 행위야말로 곧 ‘당신은 내 것이야’라는 그곳 여인들의 오랜 관습에 근거한 완강한 자기표현이었다. 참으로 괴이한 관습이자 흥미로운 사랑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로 그곳에는 프랑스 여인들과 외국인 어부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混血兒)들이 많은 편인데, 격투기 선수인 ‘데니스 강’도 한국 트롤선 어부이던 아버지가 그곳 바에서 어느 프랑스 여인과 블루스 곡에 맞추어 스텝을 밟았다는 역사적 러브 스토리의 한 가지 증거인 것이다.
  그곳이 바로 캐나다 동부 세인트로렌스 만(灣)에 위치한 ‘생피에르 에 미클롱’이라는 긴 이름의 섬이다.


 

  선각자적 항해가들은 왜 위대한가  

 오늘 날 우리가 역사 속 탐험가나 항해가들의 발자취를 두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모험적 행동이 후일 후손들에게 엄청난 부를 향유케 하면서 온갖 권리를 부여토록 하는 계기를 제공한 공적(功績) 때문이다. 

 영국 탐험가이자 항해가인 H. 길버트도 그 하나여서, 일찍이 이탈리아 인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고(1492년), 그로부터 수십 년도 더 지난 때(1583년)에 캐나다 동부의 만년빙 지대인 세인트존스 만에 발을 내딛고는 그 땅이 속한 뉴펀들랜드가 아직도 주인이 없음을 알고 유니언잭을 꽂으며 ‘이 곳을 식민지로 삼는다’고 선언함으로써 한반도의 다섯 배도 더 되는 광대한 면적의 그 섬과 본토의 래브라도 등지에 대한 영토적 권리를 영국에 안겨주는 엄청난 국가적 이익을 획득케 했던 것이다. 

 그 뒤 일단의 청교도 교인들이 종교적 박해도 피할 겸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찾아 돛배(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천지인 아메리카로 건너간 필그림 파더스 이래로 수많은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건넜는데, 앞서의 탐험가 길버트 덕분으로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 일대가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영국인 이주민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정착(定着)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프랑스 피레네 산맥 출신의 바스크 인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영국인들에게서 쫓겨나 그만 아무 데도 오갈데없는 처량한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부득이 정착할 곳을 찾아 다시금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앞서 말한 ‘생피에르 에 미클롱’이라는 섬이었다. 프랑스 이주자들이 도착한 그곳은 대소 여덟 개로 이루어져 섬이었으나, 북위 50도 가까운 그곳은 워낙 혹한지대인 데다가 땅이라는 것도 모래와 자갈뿐인 사주(砂洲)여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떨기나무 등 키 낮은 관목만 띄엄띄엄할 뿐인 황무지에 무인도였으므로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추방객들은 다짜고짜 그곳에다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발붙일 땅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채소도 갈고 소나 양도 기를 수 있어야 하는데,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황무지에서 도대체 무슨 할 일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한 가지 희망의 길이 있었다. 곧 대구와 청어 등 온갖 값비싼 물고기가 회유하는 천혜의 어장인 ‘그랜드뱅크’가 바로 그 인근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피레네 산맥 출신의 바스크 후예들은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배를 몰고 나아가 고기를 잡기 시작하였는데, 그게 오늘 날 보는 것처럼 허다한 외국 원양어선들의 중요 기항지이자 생선가공 공장이 즐비한 생피에르 에 미클롱 섬인 것이다. 

 그러자 캐나다가(뉴펀들랜드 초기 이주민이던 영국인을 포함한) 뒤늦게 시샘을 내고 그 섬을 자기네 영토라 우기기 시작했다. 그 분쟁은 꽤 오래 지속되었으나, 조국 프랑스가 순순히 백기를 들 까닭이 없었다. 그 결과 1814년 체결된 파리조약에서 그 연고를 인정받아 그 후 생피에르 에 미클롱 섬은 프랑스 영토로 확정되기에 이르렀고, 오늘 날까지 프랑스의 유일한 해외주(海外洲)로 우뚝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어언 두 세기(世紀)가 지난 오늘에 와서 캐나다는 다시금 새삼스럽게 생피에르 에 미클롱을 두고 영토권 주장을 하고 나섰다. 그 결과야 보나마나 뻔한 것이지만, 새삼스럽게 캐나다가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그 섬에 부속(附屬)한 인근 대륙붕(大陸棚)에서 유전과 가스전 등 해저자원이 무진장 부존하고 있다는 탐사 결과를 들은 때문이었다. 바로 이 대목이 한 뼘의 땅이라도 허투루 여길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지금까지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어부들로 해서 외로운 처지에 빠진 여인들도 허다하지만, 이제는 세계적 어장의 고수(固守)와 함께 추가될 오일달러의 획득으로 생피에르 에 미클롱 섬의 프랑스인 후예들은 보다 안락하고 번영에 찬 미래를 설계할 게 틀림없다.


 

  동토의 섬 아이슬란드의 기적 

 북대서양 북극권에 걸쳐 있는 아이슬란드 역시 생피에르 에 미클롱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 섬 역시 9세기 이전까지 아무도 살지 않은 무인도이자 황량한 얼음땅이었으니 말이었다. 

 그 버려진 땅에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아르나르손이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것은 서기 870년 무렵의 일이었다. 바이킹이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아가 뭇 외국 마을을 노략질한 다음 거기서 획득한 전리품으로 생계를 이어나간 해적(海賊)이 아닌가. 

  아르나르손도 마찬가지여서, 어디 만만한 마을이 없는가 하고 배를 저어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어느 섬에 표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혹독한 겨울을 난 끝에 겨우겨우 파손된 배를 수리한 다음 그곳을 떠나면서 ‘아이구, 이놈의 몹쓸 얼음땅(Ice Land)!’이라고 지껄인 데서 오늘날의 아이슬란드로 그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르나르손 일행은 결코 그 섬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한여름에도 기온은 영하를 맴돌았고, 얼음뿐인 그곳에서는 푸성귀 하나 가꿀 수 없는 동토지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립고 정겨운 고향땅으로 돌아왔으나 오슬로 지방은 하랄이라는 영악한 소영주(小領主)의 횡포로 도무지 안온한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바이킹이란 원래부터 굴욕을 최고의 수치로 여기는 종족이 아닌가. 그리하여 아르나르손으로부터 비록 춥고 메마른 버려진 땅이지만, 그래도 하랄의 횡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주민들이 속속 이주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얼마 후에는 이주민 숫자가 2만 명으로 불어났을 만큼 그곳은 또 하나의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변모해갔다. 비록 땅이야 거칠고 황량하기만 한 황무지였으나, 바로 그 앞바다가 그랜드뱅크처럼 청어와 대구가 무진장 회유하고 있는 최고의 어장이었으니 말이었다. 그 나라가 곧 아이슬란드인 것이다. 

 남한 면적만큼이나 되는 넓은 땅에 인구라야 겨우 27만여 명. 비록 지난해(2008년)의 세계적인 경제파탄으로 그 불똥이 튀어 상당한 곤욕을 치르고는 있지만,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의료보험 등 온갖 사회복지 정책을 완벽하게 가동하면서 세계적 부유국 가운데 우뚝한 아이슬란드가 그처럼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은 절반 가까운 주민이 천혜의 어장을 아주 조직적이며 계획적으로 관리하면서 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경제활동에 기인하고 있음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어장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야말로 아이슬란드 인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을 터.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1972년 9월의 이른 바 영국과 벌인 ‘대구전쟁’이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무기라야 네 척의 경비정에 한 대의 초계기, 그리고 두 대뿐인 헬리콥터로 구축함과 프리깃함을 앞세운 영국 해군과 대결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승전(勝戰)을 기록했던 것이다.


 

  자연은 가꾸는 자에게만 열매를 준다  

  아이슬란드 국민의 삶에 더욱 활력을 부여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이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화산지대라는 데 있다. 특히 수도 레이캬비크 남동쪽 100㎞ 거리에 있는 헤클라 화산은 지난 10세기 동안 평균 반세기마다 한 번꼴인 모두 20여 차례나 폭발을 일으켰을 만큼 자못 공포의 자연재해 지역으로 손꼽혀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 인들은 그것을 역이용, 기발한 도전을 감행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질을 드높이는 경이로운 모범을 보이고 있다.

 곧 화산으로 인해 국토 곳곳이 뜨거운 용암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 틈새로 분출되는 온천수(溫泉水)를 끌어당겨 그 열기로 난방을 하거나 비닐하우스 등에서 채소를 가꾸는 등으로 생산적 활동을 하는 게 그것이다. 그리하여 재배한 토마토나 오이 및 생화(生花) 등은 오히려 유럽 쪽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니 인간의 끝없는 도전이나 그 의지가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우리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한 생피에르 에 미클롱과 아이슬란드 두 곳이야말로 자원빈국인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혹독하고 끔찍한 황야(荒野)라 할지라도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곳이 다만 도전하여 정복하는 대상이자 무대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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