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8회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8회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4.06.0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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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부 韓中修交 발판 마련한 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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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지방의 일개 조합을 전국 최고의 단위조직으로 이끄는 동안 알토란같은 재산을 몽땅 털어 넣고, 말년에는 셋방살이에 진배없는 삶을 살다 간 군산어협 김병식 조합장의 눈물겨운 어민 사랑과 봉사정신에 대한 숨은 이야기는 이번호에도 계속된다. 난세에 출중한 지도자가 탄생하고, 암흑기에 영웅이 나온다 했던가. 그 역사적 증언이야말로 어쩌면 그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몰라서다.

그가 군산어협을 이끌던 70년대 초반께, 이 나라는 우선적으로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고난과 투쟁의 시기였다. 매사가 그렇듯 당시의 세계정세나 시대적 환경은 무정하게도 그를 거역하고 있었으니 그 난감함을 어찌할꼬. 세상 윤회는 그만큼 매정하기만 하여 지극히도 소박하면서도 애절한 소망마저도 쉽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세니 혼란이니 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며, 그 와중에서 그가 보인 몇 가지 창의적이면서 선지적인 발자취는 두고두고 우리들의 공감을 부추기게 된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단연코 안강망선(鮟鱇網船)을 비롯한 관내 소속선들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연안어장으로부터 멀리 원양출어에 진배없는 제주도 인근 동지나해까지로 확대한 일이다. 그것은 어선 대형화와 동력화 등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에 힘입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 내항력(耐航力)이 증대된 배들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장기출어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동지나해까지의 어장 확대는 무차별적인 남획으로 연안의 어자원 고갈을 염려한 김병식의 제안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서해안 수산업을 안정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는 간절한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청도에 어업전진기지를 설치한 것도 그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그런데 한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모든 조업선들이 출어를 주저할 만큼 치솟는 기름 값이 그것이었다.

1973년 10월 발발한 4차 중동전쟁이 그 사단이었고, 페르시아 만 6개 원유 생산국들이 일시에 수출가를 몇 배나 올려치면서 생산량마저 대폭 감축시킨 이른바 오일쇼크 사태의 여파 때문이었는데, 그 결과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반도는 경제 전반이 휘청거리는 직격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군산어협 산하 1천여 척도 넘는 조업선들은 살인적인 고유가(高油價)에 돈을 준다 해도 물량이 절대부족이어서 곤궁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설령 출어를 하더라도 밑질 게 뻔한 궁지에 처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병식은 그 난관을 극복하는 방안의 강구야말로 자신의 숙제이며, 기필코 수행하여야 할 책무라 다짐했다.

그 상황에서 그는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른다.

가령 바람이 없거나 역풍(逆風)이면 엔진을 가동시키고, 순풍(順風)이면 돛을 사용하는 말하자면 기범병용(機帆竝用)은 어떨까. 그리하여 확신을 가진 그는 자신의 선주인 진봉호의 갑판 중앙에 마스트를 세우고 돛을 단 다음 주행하는 실험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그 착상이야말로 항해학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경이롭고 빛나는 착상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엔진과 돛대를 병용하는 항해법을 관내 소속선 모두에게 전파하였고, 이듬해 초봄 변산반도 앞바다에서는 무슨 요트 경주라도 벌어진 양 각양각색의 돛대가 펄럭이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월간 현대해양 2014년 6월호(통권 530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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