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사 導船士
도선사 導船士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4.05.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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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운하의 도선사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1970년 8월, 파나마 태평양 쪽 관문인 발보아 항에 도착한 K호는 곧 국제 기류신호(旗旒信號)의 하나인 골프(G) 기(旗)부터 게양했다. 세 개씩의 황청색(黃靑色) 띠가 세로로 그어진 그 깃발은 ‘우리는 도선사(導船士)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을 의미하고 있었다. 파나마운하는 강제(强制) 파일럿 제도여서 도선사 없이는 함부로 기동할 수 없다.

무전기 하나만 든 미국인 도선사가 승선한 것은 그 날 오후 네 시경이었다. 그 순간부터 배의 지휘권은 그에게로 넘겨져 선장인 나는 다만 그의 뒷발치에서 미구에 전개될 산정호수(山頂湖水) - 카툰호의 현란한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로운 승객 신세가 됐다.

파나마운하는 인간두뇌로 창조된 기념비적 역사물이다. 이전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려면 거대한 남미대륙을 우회하는 긴 항해를 감수해야 했으나, 1914년 미 정부에 의해 완공된 다음부터는 불과 8시간이면 가능하게 됐다. 그 시간적ㆍ경제적 이익이 얼마인가. 그리하여 지리상대발견 시대의 에스파냐인들조차도 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의 유별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실행은 수 세기나 미뤄졌다. 지협(地峽)이라지만 80km도 넘는 아마득한 거리인데다 해발(海拔) 30m도 넘는 구릉지여서 그걸 굴착하려면 몇 백 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기술자들은 구릉지대를 배가 다닐 수 있을 만큼의 깊이로 파내고 거기에 물을 채워 인공호수(人工湖水 ; 카툰호)로 만든 다음 양쪽으로 계단식 갑문(閘門)을 설치하는 기발하면서도 경이로운 공법을 창안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운하를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었다.

환갑을 넘은 도선사는 세상의 모든 사관을 통틀어 최고의 풍모를 갖춘 신사였다. 20년도 넘게 선장으로 세계의 바다를 누빈 그는 하선(下船)하는 대로 그의 화려한 경력에 걸맞게 멋지면서도 억대 연봉(年俸)을 보장받는 자유직업을 선택했던 것이다.

도선사는 처음부터 별도의 항로도(航路圖)를 볼 필요도 없이 배를 몰았다. 견인 트랙터에 이끌려 하나하나씩의 갑문을 통과할 때마다 배는 점점 고도를 높여나갔는데, 7개의 갑문을 다 통과하고 카툰호로 올라선 순간 처음의 발보아 항은 마치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저만치 눈 아래로 깔려 있었다.

마침 저녁식사 때가 되어 나는 고맙기만 한 도선사에게 끼니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도선사의 주문은 간단했다.

“두어 조각 토스트에 커피 한 잔이면 됩니다.”
그게 평생을 선장으로 세상 바다를 주유한 운하 도선사의 소박한 저녁 한끼 식사인 것이었다.
- Have a good voyage!
‘좋은 항해가 되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도선사가 배를 떠난 것은 K호가 반대편인 카리브 해의 크리스토발 항으로 들어선 다음의 일이었다.

그 시간이 겨우 8시간 남짓이었다. 운하의 유용함은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도선사 수당을 포함한 제반 운하사용료를 충분히 지불했건만, 남아메리카 대륙을 우회하는 장대한 항로에 행여 마주칠지도 모를 거친 항해에 비한다면 시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얻은 이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허다한 세계의 선장들이 한결같이 배를 내리면 신(神)의 직업인 파일럿이 되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수 기름유출 사고 주범은 누구인가

설날이던 지난 1월 31일 오전 8시, 한국도선사협회 여수지회 소속 두 도선사(김모와 이모)는 방금 묘박지에 도착한 싱가포르 선적의 32만톤급 VLCC(초대형 유조선) ‘우이산(Wu Yi San)’호에 올랐다. 작년 12월 8일 영국 하운드포인트 항을 출항한 그 배는 남해섬이 건너다보이는 여수시 낙포동 GS칼텍스 원유 2부두로 이동, 싣고 온 북해산 브렌트유 27만여 톤을 하역할 참이었다. 유조선 선장은 앞서의 원양어선 K호가 발보아 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안전한 접안(接岸)과 계류(繫留)를 위해 지리에 밝은 도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도선사는 우이산 호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닻을 올리도록 한 다음, 거대한 선체를 겨우 2∼3마일 폭의 좁은 수로를 거침없이 북상(北上)토록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 속력이 ‘반속(半速 ; 항해용어로 Half Ahead)’을 넘는 7노트에 상당해 유조선 선장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만약 불의의 사고라도 날라치면 잘못은 비록 도선사가 저질렀을지라도 자신의 책임이 면제되는 게 아니어서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시간여 후, 유조선은 잠시 항진을 멈췄다. 거대한 선체의 조선(操船)은 독자적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터그보트(예인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날 동원된 터그보트는 모두 여섯 척이었다.

터그보트의 배치가 끝나자 여수 도선사는 재차 유조선을 항진시켰는데, 그 시각 접안부두까지의 거리는 불과 5마일 남짓인데도 속력은 아까와 같은 7노트였다. 그 순간부터 사고는 이미 예비(豫備)돼 있었다고 봐야 옳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지만, 그 같은 속력은 실로 난바다에서나 봄직한 ‘쾌속질주(快速疾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두 도선사는 뭐가 바빴을까. 게다가 침로설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도선사 지시가 분명한 선수 방향이 엉뚱하게도 원유 2부두를 조금 비켜나 터미널로 연결된 3개의 송유관 파이프라인으로 향한 게 그것이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유조선 선수부는 뒷걸음질 칠 여유도 없이 나란히 배열된 각각 직경 1m도 넘는 3개의 송유관 허리를 밀어붙였고, 그로 해서 하루 내내 끈끈한 원유와 경질(輕質)의 석유 유분(溜分)인 나프타 164톤이 해상으로 쏟아지는 대형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항해용어로 타력(惰力 ; Headway)이라고 한다. 선박에는 자동차처럼 브레이크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정선(停船)하려면 몇 마일 앞에서 미리 엔진을 끈다. 그러면 선체는 타력만으로 전진하게 되고, 그래도 과하다 싶으면 후진(後進)을 걸어 목적을 달성한다. 그럼에도 오랜 해상경력을 자랑해 온 두 도선사는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닌 말로 마(魔)가 끼어서였을까.

결론적으로 사고는 전적으로 도선사에 의한 과속(過速)에다 잘못된 침로설정에 기인한 것이 분명하므로 책임은 당연 두 도선사 몫이 되고, 기름확산으로 생업의 터전을 망친 남해안 일대 어민들이 분통터지는 피해자로 둔갑한다. 따라서 ‘1차적 피해자는 GS칼텍스’라는 해임장관의 답변은 완전 오답(誤答)이 되면서, GS칼텍스야말로 유조선 선주와 함께 ‘날벼락을 맞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도선사가 천상의 직업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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