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3회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3회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4.01.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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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수협 부회장으로 간 총무처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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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반백년 수협 역사를 논한다면서 처음부터 수산업이나 어민과 아무 관련이 없는 박상길 씨의 청소년기를 소개한 데 대해 독자들은 다소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필자의 간곡한 뜻이 숨어 있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알다시피 36년이라는 일제의 장구한 식민통치는 나라 체제를 깡그리 망가뜨리면서 경제파탄은 물론 국민 가슴 속에 숱한 상처와 씻을 수 없는 응어리를 남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게다가 해방의 기쁨을 채 운위하기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면서 국민을 아프리카의 난민 꼴로 만든 것은 지금 돌아봐도 몸서리쳐지는 악몽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온 게 후진국 멍에를 떨쳐내기 위한 조국재건이었는데, 하루하루 입고 먹는 일이야 외국원조에 가탁한 구제품이나 꿀꿀이죽으로 대신한다 치더라도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우선 행정체제부터 갖추는 게 순서였으나 그걸 뒷받침할 인재(人才)가 태부족인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공화국은 부득불 일본 관리에 빌붙어 온갖 비굴함과 아양으로 부화뇌동했더라도 쥐꼬리만한 행정 경험을 가졌으면 전문성을 따질 겨를도 없이 중앙부처를 비롯한 지방관서, 혹은 법조계나 군부 등 국가의 모든 중추기관에 중용(重用)하는 임시 방편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제 동안 중학교 문전을 기웃거리기만 했어도 하루아침에 벼락치기로 요처 요직에 임용되는 괴이한 일까지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 같은 인사상의 난맥이 신생 대한민국 초기 적 관료체제이자 전형이었으니 나중 국가가 안정되면서 민주주의라는 꽃이 만발하자 뒤늦게 친일파(親日派)니 사대주의(事大主義)니 하는 등의 국가적 정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것도 이 나라 역사의 한 단면으로 남아 있다.

이로써 독자 여러분들은 본 연재물의 도입부가 되는 1부 ‘만주로 간 열세 살 소년’과 2부 ‘두 번 죽다 살아난 사내’의 집필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너끈히 알아차렸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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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다시 만주 소년에게로 돌아간다. 그러자면 우리는 다소 장황하지만,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그가 과연 어떤 인생유전을 거친 끝에 나중 수협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해방이 되었어도 만주 봉천에 머물고 있던 스무 살 박상길은 여전히 귀국을 미룬 채 그곳에서 엉뚱하게도 ‘조선건국청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고는 스스로 당수(黨首)를 자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도 재력도 없이 급조한 단체가 극심한 혼란 속의 이국땅에서 앞날이 순탄할 리 없었다. 결국 간판 하나 내걸지 못한 채, 무슨 캠페인 같은 것도 단 한 차례 벌이지 못한 채 불과 며칠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직함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고수하여 귀국한 다음 그것을 발판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언론계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깜짝 변신에 성공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기는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그가 인연을 맺은 곳이 엉뚱하게도 인천의 ‘대중일보’라는 신문사였다. 말로만 신문사였지 요새 말로 하면 ‘찌라시’와 비슷한 무가지를 발행하는 처지였으나 그나마 언론계가 정착되지 않은 시절인지라 아주 쉽게 정경부장(政經部長)이라는 자리를 꿰차면서 그의 진가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천부적이라고나 할 글 솜씨와 상대방을 압도하는 언변술이 그의 장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취재라는 이름으로 관공서 등지를 출입하며 온갖 화제 거리를 물고 온 다음 시사문 내지는 논설문 등의 기사로 만들어서는 지면에 올렸고, 좌담회 같은 것도 진행하면서 금방 지역 내에서 알아주는 기자로 자리 잡았고, 그 몇 달 후에는 그간 보도한 기사를 묶은 <우주탄 선언>이라는 책자를 내어서는 중앙 정치권에 무작위로 뿌리면서 그 여세를 몰아 지역 기자단 단장 직까지 맡으면서 단숨에 유력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6·25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 전(1949년), 상임촉탁 자격으로 공보처(公報處) 산하기관인 중앙방송 라디오 채널의 시사 프로그램 해설 담당자로 나선 일이었다. 때는 남한만의 총선거로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직후인지라 아직도 어수선할 때여서 정부는 나름대로 국론일치와 총화단결을 도모하는 국민계몽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 틈새에서 만주 소년은 여론형성에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라디오방송에 주목했던 것이다. 마침 그는 두 번째 저서 <영웅이여 나오라, 오호! 8백만 조국 청년들이여!>를 출간, 재차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였다.

그는 사전 조율도 없이 경무대로 찾아가 이기붕 비서실장에게 기자단장 명함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실장님, 저를 공보처장에게 좀 소개시켜 주십시오.”

비서실장이 무엇 때문이냐고 묻자,

“국민계몽을 위해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좀 써야겠습니다.”

하고 막무가내로 말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당시로는 워낙 인재가 드문 시절이었던지라 아주 순탄하게 공보처장을 거쳐 중앙방송국장과 대면하면서 마이크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이틀에 한 번 꼴, 한 차례에 15분씩 편성된 프로그램에서 그는 국가와 사회가 당면한 갖가지 시사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제기하고는 대안 제시와 함께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강연 내지는 연설식의 해설을 진행하였는데,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 별다른 매체가 없던 상황인지라 단박에 세인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1948년)에는 그간 방송한 대본을 줄거리로 한 <20세기 동태(動態)>라는 책자 5,000권을 발간, 이를 각계에 배포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이제 식자들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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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 필력과 능한 언변으로 그가 정부(공보처) 일각에서 정국을 논하고 사회적 여론을 주도하는 동안 자연 정치권의 동향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기회는 곧 찾아왔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2대 국회의원선거가 그것으로, 그간 라디오 해설가로 얻은 유명세를 발판으로 고향(함양)에서 등록을 완료하였는데, 당시 약관 스물다섯 살이었다.

당시의 소회를 그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 열혈남아의 한 사람으로 역사의 갈림길에 선 조국의 운명을 외면할 수 없어…… 비록 국내에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아 번듯한 학연도 없는 처지지만, 험난한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가려면 오로지 대중의 지지를 업은 법률상 지위를 확보하는 길밖에는…….

요즈음으로 보면 별로 옹골차지도 않은 옥수수 알갱이에 불과하지만, 당시로는 제법 호기로운 열혈남아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벽은 너무 높았다. 산골 지역구인데도 정치 지망생이 너무도 많아 등록을 마치고 보니 후보자가 무려 열세 명이나 되었으니 말이었다. 그 뜨겁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는 끝까지 선전(善戰)하였으나 3등의 석차로 패배하고 만다.

그럴 때 오기가 생기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 얼마 후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영도구의 보궐선거에도 도전, 돈이 없어 빌린 앰프를 지게꾼에게 지워서는 그 뒤를 따라 나팔을 불며 산꼭대기를 오르내렸으나 표심을 붙잡는데 실패함으로써 냉엄한 현실의 벽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물밀 듯 쳐내려왔으나 그는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27일 오후까지 방송실을 지키며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을 보도하였는데, 그만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피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아내와 함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수도 서울이 탈환될 때까지의 석 달 동안 마루 밑 지하실이나 농장 창고 등을 숨어 다니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우신조라 할 수 있었다.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역전되면서(1?4후퇴) 부산까지 밀려 내려온 이승만의 피난정권은 민심을 추스르는 방편으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공보처장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정부선전대책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간의 방송 활동으로 유명세를 탄 그가 이사관 대우의 상임위원으로 발탁되면서 종전의 시사해설에다 국민의 소리와 대북방송까지 도맡는 바쁜 방송인이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세계의 시사 문제를 연구하는 법인체를 만든 그는 유인물 <새 소식>과 <대한뉴스>를 제작·배포하는 한편, 기관지 성격인 <세계정세>와 <학생세계> 및 <정계공론> 등의 월간지를 발행하는 이외에도 전국 각지로 강연을 다니면서 이제는 영향력 있는 주요인사의 하나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누가 그랬던가. 한 번 정치판에 발을 담그면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다고. 그 아련한 향수를 떨쳐내기 어려워 이승만의 자유당에 입당,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와신상담한 끝에 휴전 직후 실시된 3대 선거에 3수로 도전하였으나 공천을 받는데 실패했고, 다시 4년 후의 4대 선거에서도 탈락의 쓴잔을 마심으로써 그는 영원히 정치 일선에서 밀려나는 처지가 되는 듯했다. 그리하여 미련없이 자유당을 탈당한 그는 칩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 후보자 등록을 필하였으니 조속 하향하기 바람.

그 같은 내용의 전보가 고향으로부터 날아든 것이었다. 두 번의 낙선과 두 번의 공천에서 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신 그의 처지를 알고 있던 고향의 후원자들이 보내온 전보였다. 진작부터 중앙방송 라디오 시사해설가로 활동하면서 민정장관 출신 안홍재 씨와 함께 서부 경남 일대를 돌며 시국강연을 한 덕분에 고향에는 제법 많은 후원자가 목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뜻 나서지 못 했다. 두 번의 출마를 하는 동안 그는 완전히 빈 털털이가 되어 운동원들의 식사비조차 마련할 수 없어서였다. 게다가 공천에서 탈락했다고 무소속으로 나서는 건 정치도의상 못할 짓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고향의 후원자들이 떼 지어 올라와 강권하는 바람에 고향 행 열차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는 이미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똘똘 뭉쳐 학교 운동장에 큰 솥을 걸고 국수를 삶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서 그를 고무시켰다. 그러나 판세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보자 중 주일공사를 거쳐 당시 전남방적을 경영하던 재계 실력자 김용주 씨가 유권자들을 상대로 돈 봉투를 비롯한 고무신 수건 비누 성냥 등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하는 것 말고도 면장과 지서장들까지 나서서 아주 공공연히 표 몰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마지막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아주 지극적인 언행으로 유권자들을 경악시켰다.

“유권자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였다.

“……도대체 이런 게 민주주의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타락하고 부끄러운 부정선거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포기합니다. 내 고향에서조차 실패한 내가 어떻게 이 나라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그는 어금니로 오른손 검지를 깨물어 흐르는 피로 셔츠에다 ‘애국’이라 썼다. 그런 다음 홀연히 유세장을 떠났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다음 날 새벽녘, 웅성거리는 소리에 잡을 깨니 마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고, 그 중에는 면장과 지서장 얼굴도 보였다. 어제까지는 다른 후보자를 밀던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축하합니다. 당선입니다.”

후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기로는 함양과 거창 지역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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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수협 부회장직을 맡게 된 총무처 차관 출신의 박상길.
나이 서른둘에 ‘영감’이 된 그는 기사가 딸린 자가용 지프를 타고 당시 국회의사당이 있던 광화문으로 나가면서 맨 먼저 느낀 것은 그곳이야말로 수렁이나 진창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의사당은 처음부터 보안법 파동,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집행, 경향신문 폐간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로 요동치면서 오죽하면 ‘안개 정국’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럼에도 정치적 소신과 지조를 지킨다며 자유당에 복당한 그는 당 중앙위원과 선전위원에다 원내대책위원 등 몇 개씩이나 되는 감투를 둘러쓴 것 말고도, 국회에서는 교체분과 및 예산결산위에 소속하면서 바쁘게 쏘다녔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한미행정협정’과 ‘양민학살 사건’ 등의 동의안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불과 1년 11개월만에 의원 배지를 떼 내고 만다. 최인규(내무장관) 등이 획책한 정?부통령 부정선거로 마산의거가 발발하면서 요원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면서 당이 붕괴의 길로 들어선 때문이었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뒤를 이은 장면 내각의 2공화국마저 내분으로 뒤죽박죽되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치자 드디어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한강을 넘어온 것이었다.

이후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세검정 고갯길의 바위투성이 땅 400여 평을 빌려서는 축사를 만들고 토끼 기르는 일에 몰두했다. 당시는 아직도 축산업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여서 우유나 버터 등의 낙농물이나 삼겹살 혹은 쇠갈비 등의 고급 육고기는 구경하기조차 어려웠고, 대신 상대적으로 밑천이 적게 드는 토끼 사육이 유행하면서 골목골목에서는 토끼고기 볶는 냄새가 진동하던 때였다.

그런 그에게 1963년 1월 중순, 뜻밖에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서 보자는 전갈이 왔다. 장충동 공관으로 갔더니 박 의장이 거두절미로 <우주탄 선언>을 잘 읽었다는 말부터 꺼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일으킨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난을 극복하고 조국을 근대화시키자는 것인데,

누구도 내 심정을 몰라주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소. 그래 좋은 방안이 없나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모두 하는 말이 다르니 이를 어쩌면 좋소?”

그러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 요긴한 의견을 피력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게 만주 소년이 3공화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고, 이후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박 의장의 자전적 저서를 대필하면서 청와대 대변인에 이은 총무처(현 행안부) 차관으로 승승장구하면서 혁명정부의 한 축으로 가담하기에 이르렀고(박정희의 6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내각 총사퇴 때 물러났지만), 이후 박 대통령의 독특한 인사 스타일과 맞물리면서 종당에는 전국 어민조직의 구심점인 수협을 이끄는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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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협 부회장으로 가라는 청와대 지시가 내려온 것은 박상길이 토끼 사육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1968년 5월의 일이었다(당시 공기업이나 단체장 임명은 지금의 선거 방식과 달리 전적으로 대통령 권한이었다).

장충동 의장공관으로 간 그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 함양 산골에서 태어난 저는 수협의 수(水) 자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자리에……?”

그 말에는 다소 항거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간 총무처장관이나 문교차관으로 재임명될 것이라는 말을 숱하게 듣고 있어서, 외곽 하부 기관의 발령은 의외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대번 대통령이 노기 띤 음성이 귀를 때렸다. 미리 준비해둔 듯한 말이었다.

“최고회의 시절, 전라도 어느 조합을 들렀는데, 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엉망이더란 말이오! 나라는 혁명이 되었는데, 그 소굴은 백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래서 임자더러 가라는 거요. 그래도 안 되면 아주 간판을 뭉개버릴 작정이오.”

그러면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한 6개월 동안 현황을 파악해 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뜻은 달리 있지 않았다. 총무처차관을 그만두고 야인으로 돌아온 그는 토끼를 키우면서도 월간지 <제 2경제>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그 논조가 곧 경제발전으로 조국근대화를 성취하고자 하는 3공화국의 이념과 맞닿은 것이어서 대통령의 눈길을 끈 데다가, 마침 지방순시 길에서 본 어느 어업조합의 꼬락서니가 전혀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어서 그 개혁의 전도사로 그를 지목한 것이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이야말로 근로의욕을 배가시키면서 소득증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고 우선적으로 전국에 산재한 농협이나 수협의 일선조직 활성화를 위해 직접 적임자 인선을 챙기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박 대통령이 파악하고 있던 한국 수산업의 현황이 어떠하였는가를 간략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 무렵 전국 어민수는 1백만 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전체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지나친 쏠림 현상이었는데, 다른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던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고기잡이야말로 호구책을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일이어서였다.

때문에 상황은 자꾸만 열악해졌다. 특히 일제강점과 한국전쟁 후유증으로 가장 핵심적 기능을 담당할 어선이 태부족인 상황임에도 만연한 불법조업으로 어장이 더욱 황폐해지는 악순환에 시달린 게 그것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낙후된 수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어민의 이익과 권리를 담보하기 위한 정책입안에 주력하였는데, 그게 전국에 산재한 계(契) 수준의 단체를 통폐합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수협법(水協法)의 제정과 공포(1962년 1월 20일 대통령령 제 619호)’였고, 그 틀에서 탄생한 조직이 오늘날의 ‘수산업협동조합(水産業協同組合)’인 것이었다.

당시 국회를 통과한 수협법 초안에는 법 제정의 이유가 명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어업령 제 6장은 헌법 제 100조의 규정에 의하여 여전 유효하기는 하나 현 실정에 부합하지 아니하므로 이를 대체하는 수산업협동조합법을 신규 제정하여 어민과 수산 제조업자의 협동조합 결성을 촉진하고, 그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과 생산력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서임.

그 법률을 근거로 탄생한 수협중앙회는 당시까지 전국에 산재하고 있던 어업조합 152개, 수산조합 13개, 수산물가공조합 2개 등 도합 167개이던 것을 어업조합 86개, 수산조합 11개, 수산물가공조합 2개 등 99개로 통폐합·정비하는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관련법의 제정과 이의 시행을 주도한 박 대통령으로서는 그 구심체인 수협이 새로운 면모와 열성으로 거듭나 낙후된 어촌을 활성화시키고 어민의 이익증대와 권리 획득에 앞장서 줄 것을 오매불망, 고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기대는 무참히 깨어졌다. 법령을 시행하고 몇 년이나 지났건만 지방 조합은 여전히 ‘백 년 전의 소굴’로 낭아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 이유를 박 대통령은 나름대로 곰곰이 뜯어보았다. 그리하여 군 출신인 대통령이 얻어낸 결론은, 타성에 젖은 어민이나 선주들에게 그 대업을 맡길 게 아니라 다소 전문성은 떨어지더라도 경제논리가 견고하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리를 불도저 식으로 밀어붙일 사람이라야 한다는 단순 논리에서 그 적임자로 박상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일갈에 혼찌검이 난 박상길은 그 길로 수협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1968년 5월 9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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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음에 수협중앙회로 달려간 박상길은 사옥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대통령의 뜻을 알아차렸다. 명색이 회장·부회장 각 1명씩에 이사와 감사가 각 3명씩 상근하면서 의결기관으로 총회를 비롯해서 대의원회와 운영위원회까지 갖춘 전국 규모의 조직이 사옥 하나도 마련하지 못한 채 광화문을 조금 벗어난 신문로 뒷골목의 어느 백화점 창고 한쪽에 세를 든 형편이기 때문이었다. 더욱 널빤지를 깐 마루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를 냈고, 한 귀퉁이의 재래식 변소에서는 코를 움켜쥐어야 할 만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형편인데다 조명도 시원치 않아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것이 영판 도깨비 소굴 그대로였다.

낙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맨 먼저 조직의 현황을 파악할 때였는데, 변변한 건물조차 마련하지 못한 처지임에도 기구 규모나 소속한 직원수가 웬만한 중앙 부처 못지않게 엄청난 때문이었다. 밑으로는 대리에서부터 과장, 차장, 부장, 이사, 감사, 운영위원 등 시쳇말로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직급에다 넘쳐나는 인력이 굳이 표현하자면 ‘지상 최대의 벼슬 전시장’이라고나 해야 할 만큼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도대체 단 한 푼의 자체 수입도 없는 처지에서 그 많은 직원을 어떻게 먹여 살리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만 아니라, 그거야말로 노골적으로 국민혈세를 축내기로 작정한 무책임의 극치가 아닌가 했던 것이다.

게다가 하는 짓거리도 가관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민을 주인으로 삼고 지극한 봉사정신으로 헌신하여야 할 수협이 상전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그랬지만, 어민에게는 개선장군인 양 군림하면서도 상급 기관(수산청 등)에게는 굽신거리기만 하면서 자리보전에만 혈안인 볼썽사나운 일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니 수협을 바라보는 상급 기관의 시선도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수협이야말로 하는 일도 없이 국가재정만 축내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탓이었다.

가령 수산청의 일개 국장이 회장을 불러 호통을 치는가 하면, 이사에게는 예사로 ‘놈’ 자를 붙이는 데는 총무처차관을 역임한 그로서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수산청 일개 국장이 회장에게 야, 자, 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민 나머지 ‘도대체 네가 뭐하는 놈이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감독기관에서는 매일처럼 회장은 물론 간부들까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에 앉아 있을 여유조차 없을 지경인데다 갖가지 이권청탁에 더러운 손까지 내미는 판국이었고, 어느 과장이라는 자는 봉투를 갖고 간 직원 앞에서 책상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채 ‘그것도 돈이냐?’는 식으로 모욕을 주기도 예사였으니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는 것이었다.

그게 법령의 공포와 함께 6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다섯 명의 회장이 거쳐 간 수협의 당시 형편이었던 것이다.

- 각하,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수협이 제 자리를 찾도록 한 다음, 기필코 어민들의 권익향상과 이익증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미천한 제 몸뚱이 하나를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그의 굳은 각오였다.

그리고 ‘한 6개월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가 보고, 그래도 안 되면……’이라던 대통령의 첫 말과는 달리, 부회장으로 부임하고 불과 두 달 남짓한 후에 그는 4대 노명우 회장에 이은 5대 회장으로 지명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물 수 자도 모른다던 박상길의 ‘수협 항해’는 어떤 항로였으며, 그에 대한 악천후(惡天候) 극복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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