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賢正의 <일본 표해록>
승려 賢正의 <일본 표해록>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3.07.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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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海洋文學 순례 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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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편집고문/소설가
지난 1년여 동안 우리는 세계의 해양문학 고전을 찾아 오대양을 두루 섭렵해 왔지만, 잠시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 숨을 고르기로 한다. 

우리 조선 시대에도 바다를 떠돈 표류기가 두세 가지 현존하는데, 그 하나가 최부(崔溥)의 <금남(錦南 표해록(1488년)>이고(금남은 최부의 호), 다른 하나는 장한철(張漢喆)이 남긴 <표해록(1770년)>이다. 여기에 풍계 현정(楓溪賢正)의 <일본 표해록>이 더해진다. 

먼저 전라도 나주 출신 최부는 제주에서 관리로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가려고 돛배로 제주해협을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엉뚱하게도 황해를 건넌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닝보(寧波)라는 곳에 표착, 반 년 가까이 중국대륙을 떠돈 끝에 북경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하기까지의 체험을 담은 견문록(見聞錄)인 반면, 제주 토박이인 장한철은 과거시험을 치르려고 한양으로 가기 위해 역시 제주해협을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먼 남쪽 나라인 유구열도(流球列島)까지 떠밀린 파란만장한 표류담이다. 

3면이 바다인 반도(半島)에 살면서도 역사적으로 바다와 별다른 인연을 갖지 못한 조선인이 희귀하게도 표해록이라는 이름의 해양 표류기를 남기자 우리 학계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이를 ‘해양문학의 전범(典範)’이라 환호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분야 기록이 전무한 처지에서 위의 기록들이 단연 가뭄의 단비 격으로 돋보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가령 <금남……>의 경우, 제주를 떠나 바다를 건너던 중 작가가 사공에게 멀리 보이는 아련한 육지를 가리키며 ‘저 곳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리오?’라고 묻자, 그만 낯이 흙빛이 된 사공이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면 큰일난다오. 그러면 바다가 노해서 우리는 필경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른단 말입니다.’라고 기겁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우리 선인들이 바다를 얼마나 외경스러워 하였으며, 그로 해서 미신(迷信)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증거이기도 하여, 당초부터 바다란 도전과 진취적 사상의 모태(母胎)라는 서구인들의 시각에 비추어 참으로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참에 다루고자 하는 승려 현정의 <일본 표해록>은 제목이 말하듯 앞서의 중국이나 남방이 아닌 현해탄을 건넌 일본국(日本國)으로 표착(漂着)해 간 이야기여서 내용 대부분이 일본에서 겪었던 일과 그곳 풍습 등에 국한되고 있음은 이 기록이 갖고 있는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실로 200여 년 전 우리 선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 내지는 항해 수준 등을 가늠할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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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출판부가 편찬한 <한국불교전서> 14책 중 10권인 <일본 표해록>은 이렇게 시작된다(원문은 한자로 써졌으나 편찬자는 이를 현대적 언어감각에 맞도록 번역했다). 

- 정축년(1817년) 가을, 전남 해남 대둔사(大芚寺) 주지 완호대사(翫虎大師)가 나에게 천불상(千佛像)을 조성해 달라고 요청하였다.(丁丑秋 海南大芚寺翫虎大師 要余造千佛像)…….  

여기에서 ‘나’는 글을 쓴 현정 스님이며, 기록에 의하면 그는 능주 쌍봉사(雙峰寺)와 광주 원효사(元曉寺) 등의 절을 전전하며 사찰 건물에 단청(丹靑)을 입히는 등의 그림 전문 도화승(圖畵僧)이었다. 

신라 말기 창건된 대둔사에 1천 좌(座)의 불상(佛像)을 봉안키로 한 것은 그 6년 전(1811년) 불이 나 열두 채의 전각(건물) 가운데 세 채만 남기고 아홉 채가 소실되자 이듬해 극락·용화·지장전 등 3채를 중건한 데 이은 중창불사(重創佛事)가 목적이었다. 

그에 따라 현정은 곧 옥(玉)이 많이 나는 경주 석굴암 근처의 불석산(佛石山)으로 가서 많은 석공들을 독려한 끝에 1천 좌의 불상을 제작하여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화장(畵匠)들로 하여금 연 사흘에 걸쳐 마지막 단계인 점안(點眼) 절차를 거친 다음 해남으로 운송하기 위해 1차로 50리 길의 경주 장진포(長津浦)로 옮겼다. 그러나 현정이 완호대사로부터 천불상 제작을 지시받은 때가 ‘정축년 가을’인데, 10월 중순 1천 개나 되는 불상 제작을 마쳤다는 것은 그 기간이 너무 짧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령 1천 명의 석공이 달라붙어 각기 한 개씩의 불상을 쪼아냈다고 해도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가 아니냐는 것이다. 1차 운송에 달구지를 이용하느라 또 한 달을 소요하였다. 

어쨌거나 장진포에는 마침 강진군 완도(康津郡莞島) 선적의 상선(商船)이 하나 정박하고 있어서, 그 배에 천불상을 싣고 예로부터 고래잡이로 유명한 장생포(長生浦)로 갔다. 여기에서 현정은 임대한 배를 상선이라 부르면서도 크기나 선종(船種) 혹은 중량물인 1천 개에 달하는 옥돌 불상의 선적(船積) 상태에 대하여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데, 경주 장진포에서 울산까지 무려 닷새나 걸린 것으로 보아 배라는 것은 소금푸대 혹은 쌀가마 따위나 실음직한 평갑판(平甲板)에 겨우 돛 하나만 펄럭이는 소형목선(小型木船)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 증거로 현정은 ‘배는 작고 불상은 무거워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상황으로는 향후 거리상 열 배도 넘는 바닷길을, 그것도 외해로 탁 트인 남해안을 횡단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어서 부득불 배 한 척을 추가로 용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함경남도 홍원(洪原) 선적의 상선 하나가 해남으로 간다기에 얼른 임대계약을 맺고 완도선에 실려 있던 1천 좌의 불상 중 768좌를 옮겨 실은 다음(이로써 홍원선은 완도선에 비해 적어도 세 배는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두 척의 배가 장생포 항을 뒤로한 것은 11월 24일의 일이었다. 이 때 완도선에는 사공 등 7명이 승선하였고, 홍원선에는 현정을 포함한 15명의 승려와 사공을 포함한 일반승객 12명 등 27명이 타고 있었다. 

짐을 나누어 실은 덕분에 한결 기동력이 좋아진 두 배는 제법 속력을 올려 울산 군령포(軍令浦)까지의 70리 항정을 단 하루에 항주하였으나, 갑자기 ‘바람의 기세가 좋지 않아’ 기상이 호전될 때까지 배를 멈추고 표박한 다음 날이 밝자 곧 다음 목표지인 동래(東萊)로 뱃길을 재촉하였다. 

▲ 풍계 헌정의 '일본 표해록'
바로 그 순간 모든 해양기록물의 단골 메뉴인 본격적인 기상악화(氣象惡化)가 발생한다. 원문에는 ‘동래를 수십 리 못 미친 곳에서 정오 무렵 서북풍으로 생각되는 바람이 갑자기 일어났다’고 돼 있다. 이 같은 묘사야말로 200년 전 조선시대 승려인 현정의 해양에 관한 지식의 한계일 것이다. 현시대라면 이럴 경우 풍속이나 파고 혹은 기압수치가 얼마인가 등을 주의 깊게 살핀 다음 이를 기록으로 남겼을 테니 말이었다. 

어쨌거나 그 순간 두 배의 운명은 양극으로 갈리고 만다. 몸집이 작은(흘수선이 낮은) 완도선은 처음부터 연안에 바짝 붙어 있었던 관계로 쉽게 동래만을 파고 들어갔으나, 상대적으로 큰 홍원선은 먼 바다를 택한 관계로 육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점점 한바다로 떠밀리고 말았다. 

여기에서 현정은 극도로 악화된 기상 속에서의 사투(死鬪)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급히 뱃머리를 돌리려고 전 승객이 매달려 돛폭을 돌리려 하였으나 파도가 산처럼 높은데다 돛이 바람을 가득 안고 있어서 세 번이나 실패했다. 그러자 사공이 현정에게 말하기를 “바람이 이러한데 억지로 돌리려 하다가는 필경 배가 뒤집히고 말 겁니다. 이럴 때는 그저 바름 부는 대로 맡기는 것만 못 합니다. 죽고 살기는 하늘에 맡기고요.…… 

이 대목을 두고 정성일 교수(광주여대)는 연구논문(학위)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이고 있다. 

- …… 당시 선박은 범선이기 때문에 바람이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다. 그리고 사공의 조치는 경험 많은 뱃사람다운 판단이요, 따라서 현명한 결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정 교수의 주석(註釋)은 전혀 사리에 합당하지 않다. 동력을 갖추지 않은 범선이 강풍을 만나면 바람을 가득 안은 돛으로 애써 뱃머리를 돌리려 할 게 아니라, 당장 돛을 끌어내린 다음 바람이 잘 때까지 기다리는 게 상지상책이기 때문이다. 강풍은 돛폭을 사정없이 찢어발길 뿐만 아니라, 돛대까지 부러뜨려 종당에는 배를 완전 난파선(難破船)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인 것이다. 

기록은 계속된다. 

- 잠깐 사이에 몇 개의 푸른 산이 서북쪽으로 지나갔다. 사공이 그 섬을 가리켜 대마도(對馬島)라 하였다. 그 뒤로 배는 오직 물빛만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를 동남향으로 떠밀렸다(그 표류 방향은 정확하다).…… 그러기를 이틀이나 겪은 다음 해가 질 무렵 멀리로 범선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27일). 그 배를 보고 현정이 “저건 필시 일본배일 것이다. 저 배를 따라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어둠이 깊어진 다음 겨우 닻을 놓았는데, 멀리 혹은 가까이로 불빛도 보이고, 개 짖는 소리까지 들렸다. 

닻을 놓자 배의 요동이 그치면서 표류자들은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류하는 이틀 동안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 하였으므로 거의 혼절 상태가 되어 꼬박 하루를 널브러져 지냈고, 다음날(28일)이 되어서야 겨우 밥을 해먹었다. 

- (겨우 정신을 차려) 주변을 살펴보니 배는 3리 폭에 10리쯤 되는 호수(만)에 들어서 있었는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30여 호의 포구였고, 밑바닥은 뾰족하게 삐쳐 나온 암초 밭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어둠 속을 헤치고 들어온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이거야말로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부처가 보살이나 중생에게 베풀어주는 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誠天幸非佛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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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선이 표착한 곳은 일본 규슈(九州) 앞바다 오시마우라(大島浦)라는 섬이었다. 계산해보면, 표류선은 순전히 서북풍에 떠밀린 나머지 동래 앞바다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앞바다까지의 약 100여 마일(200리) 거리를 단 이틀 만에 도해(渡海)하는 엄청난 대기록을 수립한 셈이었다. 

해안을 오가는 주민들이 많았으나 누구도 가까이 오려하지 않았다. 표류자들은 상륙은 꿈도 꾸지 못 하고 배에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그 날(28일) 오후 종이와 붓을 든 군 장교(將校) 하나가 졸개를 앞세우고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일본인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장교가 필담(筆談)으로 물었다. 

“어느 나라, 어느 읍 사람이오((何國何邑人也)?” 

현정 스님이 답했다. 

“나는 조선국 전라도 대둔사 대사입니다. 경주 불석산에서 옥을 쪼아 만든 천불산을 선편으로 운반하다가 동래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이 어느 나라 어느 고을인지를 묻자 장교가 한자로 썼다. 

- 日本 西海道 筑前國 宗像郡 大島浦(일본 서해도 축전국 종상군 대도포). 

그것으로 장교는 돌아갔는데, 잠시 후 또 다른 수험관(搜驗官;수사관)이 와서 임시막사를 설치한 다음 쇠도끼(國鐵鉞)를 든 두 사람에게 선내의 온갖 물건과 승객의 의복까지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모두 조사,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쌀을 비롯한 두부·소금·간장·무·참기름·땔나무 등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는데, 이 때 승려를 제외한 일반 승객에게는 별도로 생선 한 마리씩을 더 얹어주었다. 

특히 쌀은 1인당 하루에 한 됫박 반(1升5合)이나 되었는데, 배급 담당자가 반 넘어 떼어먹었으나 그럼에도 양은 축나지 않았다(일본의 도량형은 조선의 두 배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선법(船法)에 따라 표류자들의 상륙은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표류자들은 닷새간 유숙하였는데, 그 영문을 알지 못 하였으나 상급관청인 나가사키진(長崎鎭) 당국의 표류자에 대한 향후의 조치를 하달받으려고 그랬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호송이 시작되었다. 선도역인 지로선(指路船)과 지휘선인 관선(官船) 각 1척씩에 병사 4명씩이 탄 비선(飛船) 40척 등 모두 42척이 동원됐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 일본인 책임자는 표류선더러 일체의 조선(操船)을 하지말도록 지시한 다음, 세 그룹으로 나눈 비선을 앞과 좌우로 배치시킨 가운데 밧줄로 연결한 다음 예인(曳引)을 시작하여 30리 거리의 쓰야자키우라(津屋崎浦)라는 곳으로 1차 이동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마을 규모는 앞서의 오시마우라보다 열 배도 더 컸고 번화하였는데, 그곳에서도 앞서와 같은 신문이 되풀이되었다. 밤이 되자 각선에 두 자루씩의 양초를 공급해주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니 그로써 그 나라의 부유함을 알 만하였다고 현정은 쓰고 있다. 

그 날 이후 바람이 불지 않아 열흘이나 발이 묶였다. 드디어 12월 11일 재기동을 하였는데, 첫 표착지인 대도포로부터 나가사키진에 도달하기까지의 해로는 다음과 같다. 

대도포 출발(12월 2일) → 당백포(唐白浦/90리) → 백도(栢島/100리) → 호자도(呼子島/40리) → 삼율도(三栗島/100리) → 서도(西島/100리)에 이어 한 달 후(이듬해 정월 2일) 드디어 종착점인 나가사키진에 도착하였다. 그 물길이 실로 1천 리도 넘는 450리였다. 

표류자들은 어떤 차별을 받음이 없이 그곳에서 석 달간 머물렀다. 현정은 체류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직접 본 바를 귀국한 다음 여과없이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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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표객도
- 나가사키진은 큰 도시였다(長崎鎭 大都會也). 누각과 저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며, 여염집이 즐비하였다. 외국 선박들이 앞바다에 가득 차 있었고, 화물이 폭주하여 집집마다 금은보화요, 사람들은 모두 비단을 감고 있었다.…… 

표류자 27인은 모두 여덟 곳의 조선관(朝鮮館)에 분산, 기거했다. 일본국으로는 예로부터 타국선의 표착이 잦아 조선관 말고도 중국관과 러시아관을 별도로 두고 있었다. 

어느 날 표류자들은 관례에 따라 나가사키진의 도주(島主)를 예방하였는데, 그 대목의 묘사를 보면 당시 일본국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 몇 개나 되는 솟을대문을 지나서야 우리는 본관에 이르렀다. 본채 용마루는 매우 높아 우리나라 정주감영(全州監營)의 갑절이나 되었다. 기둥은 모두 검붉은 옷칠이 되어 있었고, 벽은 금박지를 입혀 서로 비추도록 하고 있었다.…… 본채 마당에 들어서서야 우리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관인(官人)을 뵙게 되었는데, 용모는 지극히 사랑할 만하였다. 수도인 오사카성(大阪省)으로부터 온 도주로, 그가 물으면 양쪽으로 부복한 통역사가 전해주는 식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무역거래가 활발했던 모양으로, 항내에는 마침 4척의 중국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 중국선은 매우 크고 높았다. 길이가 무려 70여 파(坡;성인 양팔 거리)에, 높이는 거의 50여 파였다(그 옆에서 홍원선의 14파 돛대는 반에도 미치지 못 하였다). 선실과 창문은 땅에 지은 집 같았고, 배 전체는 철갑(鐵甲)으로 감싸져 있었다. 등나무 줄기로 만든 닻줄 네 개가 사방을 묶고 있으니 풍랑 속에서도 요동치지 않았다. 배 건조비를 물었더니, 2천 냥쯤 된다 하였고, 출항을 앞두면 반드시 점을 치고 굿을 하는데, 그 비용이 또한 1천 냥이라 하였다.……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예로부터 변함없이 좋았다고 한다. 평범한 뱃사람이어도 다투어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조선은 부처님의 나라여서’라고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꿇어앉는 자세를 취하였는데, 부엌에서 불을 지피는 계집종도 그러하였다. 남녀 구분없이 뒤섞여 앉는 것도 유별났다. 그래서 성(性)에 대한 인식도 매우 개방적이어서, 어떤 여자들은 사람들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요철(凹凸;성기)’을 말하는 게 그 정도가 우심하였다. 

더욱 해괴한 것은, 왜녀(倭女)가 조선사람과 정을 통하면 스스로 관가에 보고하는 제도인데, 그러면 정부에서는 출산날짜를 계산하여 조선아이가 맞으면 장려금을 지급해 주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일본법에는 여자가 남자를 버리면 죄가 되지만, 절개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남편이 여러 해 집을 떠날 경우가 생기면 처를 친구에게 맡기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생겨도 원 남편의 호적에 등재한다고 한다. 여자들은 남편과 사별하더라도 결코 개가(改嫁)하지 않으며,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 딸이 있으면 사위에게 의지하고, 그 누구도 없으면 삭발하여 비구니(比丘尼)가 된다.…… 

현정이 관찰한 일본인들의 전통과 풍습인데, 이 말고도 뒷장에 갖가지 특이점을 부록(附錄)처럼 정리하고 있어 이를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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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부(富)는 쌀이나 돈이 아니라, 금은을 보관한 창고 크기가 결정한다. 설령 빈한한 사람일지라도 자물쇠를 채운 창고를 갖고 있었으며, 반면 쌀이나 전은 방치해 두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금은이 많기 때문에 항상 다른 나라의 침략을 걱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나가시키 주민들은 말할 정도였다. 

도적도(盜賊島)라는 섬이 있다. 도둑질을 세 번하면 권솔까지 섬으로 보내어 왕래조차 못 하게 하는데, 그곳에는 도적들만 집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에게 일본이나 일본인이라 부르면 좋아하고, 왜인(倭人)이라고 하면 매우 싫어하였다. 

겨울에도 따뜻하여 돋아난 죽순을 캐 먹었으며, 감자는 조선의 무 뿌리처럼 흔하였다. 감귤은 달고 향기를 풍겼는데, 약간 신맛을 내어 그야말로 신선의 맛이었다. 조선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애초부터 좋은 열매를 보내지 않은 탓이었다. 

왜인들은 조선인을 매우 흠모하였다. 간혹 제주인들이 표착해오면 그들이 쓰고 있던 털모자 등을 귀중하게 보관하였다. 또 연전에 제주 현감(縣監)이 표류해 와 일곱 달 머무는 동안 몇 장의 붓글씨를 남겼는데, 그것을 비단으로 장식한 족자(簇子)로 만들어 내실에 걸어 두었다. 

원래 부역(賦役) 제도는 없었다. 황제는 별도의 납공(納貢)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토지에서 생산한 곡식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변방의 천민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아마도 자상한 내막을 모른 결과가 아닌가 하고 현정은 쓰고 있다. 세금이 없는 대신 임기를 마친 도주에게는 상인들이 모은 전별금을 전달하였다. 

황성(오사카성)은 모르겠으나 지방 고을에는 학당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과 달리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없어서 학문을 해봐야 입신양명할 기회가 없으니 학문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집집마다 한 좌씩의 부처님을 모시고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제(祭)부터 올린다. 공후경상(公侯卿相) 아들 중에 아우는 모두 승려가 된다. 승려들은 법화경(法華經) 이외의 경전이나 참선, 혹은 수륙불사(水陸佛事)도 이해하지 못 하였다. 장삼(長衫)은 모두 흑색이고, 가사(袈裟)는 붉은 공단(貢緞)이었다. 

처마에는 구리통을 달아 물을 한곳에 모았고, 간혹 지붕을 풀을 씌운 집도 있었는데, 돌로 쌓은 담장은 회칠을 하였다. 

손님에게는 차를 권하고, 다음에 떡과 과일을 내놓는다. 소주는 없고, 1년 이상 숙성시킨 청주뿐인데, 그 맛이 절묘하였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강에서 떠낸 물로 손을 씻고, 사방 하늘을 향해 절을 하였다. 

비가 내리면 기름우산을 들었고, 물건을 옮길 때는 바구니를 양쪽에 매단 장대를 어께에 맸다. 

사람이 죽으면 사찰 근처의 들판에 매장하는데, 묏자리를 조성하지 않고 다만 돌 하나에 이름 석 자만 적을 뿐이어서 도처가 북망산(北邙山) 같았다. 신주(神主)는 사찰에 두고 제사는 묘지에서 지냈다. 

말과 소는 있었으나 노새와 가라말(驪;털빛이 검음 말)은 보이지 않았다. 

고래잡이에 열성적이었다. 고래가 나타나면 배가 총출동하여 새끼줄로 만든 어망으로 길을 막은 다음 돌아가며 긴 갈고리창을 던져 죽은 다음 끌고 온다. 큰 고래는 길이가 40파나 되었다. 고래를 잡기 위해 조선 연안까지 원정을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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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자들이 귀국 길에 오른 것은 나가사키에 석 달 보름을 머문 다음의 4월 14일이었다. 그리고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당초 목적항인 해남 앞바다에 도착하여 닻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석 달 후인 7월 14일이었다.
  소식을 듣고 절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생환을 축하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일행은 완도선 소식을 듣는다. 폭풍우를 피해 동래 만으로 용케 피항한 다음 홍원선을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어서 며칠 후 혼자 뱃머리를 돌려 해남에 도착, 싣고 있던 불상 232좌를 모두 하역하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 좌도 망실됨 없이 홍원선이 싣고 있던 768좌를 모두 대둔사에 봉안하니 비로소 ‘천불전(千佛殿)’이 완성된 것이었다. 

말미에 현정은 이렇게 쓰고 있다. 

- 무릇 가까운 산이나 냇가로 놀러가더라도 기록으로 남기거늘 하물며 험난한 항해이면서 표착한 곳이 이역(異域)이었으니 어찌 기록해두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기억을 더듬어 그곳 사람들의 번화한 모습과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일과 고기를 잡고 나물 캐는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서술하여 후세에게 보이고자 한다.…… 

이 기록(<일본 표해록>)을 두고, 불교사상연구원 이종수 연구위원은, 

- 불교인의 해외교류가 원활하지 못 했던 조선시대에 장기간의 표류 과정에도 신심을 잃지 않고 무사귀환하여 천불전을 완성하였다는 종교의 감화력을 보인 영험담(靈驗談)이기도 하여 이 문헌의 소중한 가치를.…… 

이렇게 호평하고 있다. 

이 말고도 많은 국내 학자들이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에는 일본 당국이 남긴 <조사보고서>도 전해져 두 나라 간 표류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사족(蛇足)이지만, 이 기록자는 사공이 아닌 승려였다. 따라서 그의 기록이 현지의 종교(불교) 묘사에 치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일본인들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일부 뒷골목 풍경 묘사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 두어 가지 삽화(揷畵)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창녀집은 중국관 가까이 있었는데, 높은 누각에 벽은 금을 입혀 지극히 휘황찬란하였다. 30명쯤 되는 창녀들 모두 빛나는 의상으로 눈을 아찔하게 하였고, 향기는 날아서 코에 와 닿았다. 

창녀들은 멀리서 보면 구름 위 선녀 같았지만, 행실은 음란하기 그지없어 개나 돼지와 같았다. 

그들은 날마다 중국관으로 들어갔으며, 때로는 러시아관에서도 숙박할 정도로 교류가 극심하였다.…… 

극도로 언행을 정갈히 하여야 할, 속세를 떠난 승려가 뒷골목을 자주 기웃거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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