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狼狽)’와 ‘교활(狡猾)’
‘낭패(狼狽)’와 ‘교활(狡猾)’
  • 이준후/시인, 산업은행 금융팀장
  • 승인 2009.05.11 1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오바마의 미국정부가 이미 타결한 FTA에 노동 및 환경 기준을 추가하기로 하고 조만간 재협상 요구를 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정부는 미국 의회의 비준을 압박하기 위하여 오는 4월 국회의 비준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한마디로 낭패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낭패’라는 말,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자주 쓰는 말이지요.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잘 풀리지 않아 처지가 고약하게 꼬이는 경우에 사용합니다. 당연히 좋은 말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낭패(狼狽)라는 말이 동물에서 유래된 것을 아시는지요.

낭패는 전설상의 동물입니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답니다. 그런가 하면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들은 꼭 함께 다녀야 한답니다. 이들이 함께 하면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하다고 합니다.

또 이 두 동물의 성품을 보면, 낭은 성질이 흉포한 반면 지모(智謀)가 부족하답니다. 반대로 패는 순한 듯싶은데 꾀가 많고 지모는 뛰어나답니다. 그래서 함께 먹이를 찾으러 나갈 때 앞장서는 낭은 머리 좋은 패의 지시를 받습니다. 낭은 패의 지시를 받아 일거에 사냥감을 쓰러뜨립니다. 이 정도면 찰떡궁합이라 할 만하겠지요. 그런데 그러다가 서로 마음이 바뀌면 문제가 생깁니다. 한 쪽이 고집을 피워 떨어지기라도 하면 둘 다 옴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지요.  

낭패(狼狽)처럼 개사슴록 (犬)변이 들어간 한자로 교활(狡猾)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입니다. 교(狡)나 활(猾)도 동물 이름입니다. 물론 전설상의 동물이지요. 교(狡)는 생김새는 개와 같지만 표범 무늬를 하고 있다고 <산해경>에 씌어 있습니다. 머리에는 쇠뿔을 달고 있으니 그 형상이 괴이하지요. 활(猾)은 돼지형상으로 몸에 털이 나 있답니다. 이들이 위기를 피하는 법이 참으로 섬뜩합니다.

교(狡)나 활(猾)은 산속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스스로의 몸을 구부려 공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삼키려 들면 재빨리 입안으로 들어가 내장으로 굴러가서는 그것을 파먹습니다. 호랑이가 배가 아파 날뛰면 맘껏 내장을 뜯어 먹습니다. 이윽고 호랑이가 죽으면 유유히 호랑이 뱃속을 빠져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정치활동은 대체로 국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정치, 정치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나름 만든 정책을 법으로 제정하여 시행하고 이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여론을 얻고, 나아가 정권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정권의 목적은 물론 국리민복이지요. 요즘의 국리민복의 초점은 당연 ‘경제’에 가 닿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정치양상을 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해야 할 본분을 제쳐두고 엉뚱한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활동으로 인한 호평을 추구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실책과 과오에 의한 반사이익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얻기보단 상대에 의존한다 할까요. 심지어는 정권을 다투는 선거에서조차 정책의 다툼보다는 상대방 개인을 헐뜯고 할퀴었으니 소위 네거티브전략이 그것입니다.

정치만이 아니겠지요. 감춰진 허물을 들추고, 작은 허점은 큰 허물로 키우는 일, 사회 도처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말 그대로 ‘교활(狡猾)’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국내경기와 세계경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실업은 늘어나고 소득은 줄어듭니다. 창창한 젊은이는 구직을 포기하고 중년의 자영업자는 가게 문을 닫습니다. 때 아니게 등산인구는 늘어나고 있고 교통량은 많아지지 않았는데 거리는 더 어지럽습니다.

끝 모를 불황은 공황으로 연결될 조짐입니다. 하여, 정부와 기업 모두가 경제살리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말만 오뉴월 잡초처럼 무성할 뿐 제대로 시도하거나 이루어지는 것은 도무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회 탓을 하고 여당은 야당을 타박합니다. 물론 야당은 청와대와 여당 탓으로 시종하고 있습니다. 입싸움에서 나아가 몸싸움, 주먹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런 낭패가 없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한 쪽은 앞다리만 긴 낭(狼), 다른 한 쪽은 뒷다리만 긴 패(狽)와 같다고나 할까요. 참 알 수 없습니다.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 작은 허물 덮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이 어려운 처지에서, 서로 힘과 꾀를 합치지 않으면 내일도 오늘처럼 낭패(狼狽)를 면하지 못할 텐데 말이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