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제(文帝), 그리고 간신(奸臣)
한 문제(文帝), 그리고 간신(奸臣)
  • 이준후 산업은행 부장/시인
  • 승인 2013.06.11 14: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중국인은 한족(漢族)이라 불립니다. 한족이란 명칭은 유방(劉邦)의 한(漢)나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통일국가 漢나라를 세운 민족이라고 후일 일컫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초의 통일국가는 진시황의 진(秦)이지만, 처음 진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중원민족이 아닌 서쪽 변방사람( 융적(戎狄)이라고도 하고 다른 족속이라고도 하며, 우리민족의 선조라고도 함)이라고 하여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고조(高祖)인 유방과 더불어 유명한 군주로 유방의 증손자이자 7대 황제인 무제(武帝)가 있습니다. 무제는 유가(儒家)를 국가윤리로 받들고 민간에서 관료를 등용했습니다. 재상의 원형 동중서와 삼천갑자 동방삭이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무제는 서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장건이 역할을 했습니다. 또 흉노를 정벌했습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장군 위청과 곽거병은 승리했고 이릉과 이광리는 패했습니다. 항복한 이릉을 변호하다 <사기>의 사마천이 형을 받습니다. 또 소무는 흉노에 포로로 있었지만 항복한 이릉의 권유에도 변절하지 않고 19년간이나 억류된 후 돌아옵니다. 특히 무제는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사군을 설치한 인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준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무제의 정복전쟁은 선대(先代)인 문제(文帝)와 경제(京帝)의 국력 축적이 있었기 가능했습니다.

“나의 정치가 과연 한의 문제(文帝)만한가?”

왕조를 불문하고 후세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를 자랑하려 할 때 한의 문제와 비교하며 이렇게 자문(自問)하였다 합니다.

문제는 유방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건국초기의 조정의 혼란은 물론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우선 세금을 절반으로 내리고 당시의 기간산업인 농업을 육성하였습니다. 직접 밭에 나가 파종(播種)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당시의 법은 진시황 때의 상앙이 만든 가혹한 법체계였습니다. 문제는 악형인 육형(肉刑)을 폐지하고 악법인 연좌제 폐지를 지시하였습니다.

회남왕 유장의 모반을 용서하였습니다. 전쟁은 방어만 했습니다. 절대군주라면 누구나 하고 싶어 했던 대외원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재위 23년 동안 단 하나의 궁전이나 정원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시장에는 비단이 넘쳤지만 검은 명주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무릇 성공적인 치세에는 충신(忠臣)과 역군(役軍)이 있게 마련, 문제에게는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있었습니다. 진평과 주발은 고조 유방을 도운 개국공신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문제가 우승상 주발에게 물었습니다.

“1년 동안 죄지은 자가 얼마나 되오?” 주발이 우물쭈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전국의 식량소비량이 얼마나 되는가?” 주발이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발은 비 오듯 땀을 쏟았습니다.

문제가 고개를 돌려 좌승상 진평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좌승상은 우승상 아래.

“그대는 1년 동안의 식량 소비량을 아시오?” 진평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맡고 있소?”

“죄 지은 자의 수가 궁금하시면 정위에게 물으시면 되고, 식량의 생산과 소비를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황제가 다시 묻습니다.

“모든 일에는 그 담당하는 관리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하는 일은 무엇이요?”

진평이 허리를 굽히고 아룁니다.

“신이 하는 일은 천자를 보좌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각자 맡은 일은 충실히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소신의 임무입니다.”

주발은 진평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알고 병을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문제는 진평을 우승상으로 임명했습니다.

충신의 특징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소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미국방문중에 수행원이 술을 마셨습니다. 공무출장이란 하루 24시간이 공무중이라 할 것인데, 음주상태에서 스캔들까지 일으켰습니다. 급기야 일정도중에 도망치듯 귀국했습니다. 면직된 후에도 귀국 허락여부를 가지고 당시의 상관과 다투었습니다. 그것도 대놓고 공공연하게.

임명 초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탐하는 모습이 역력했었습니다. 결국 소임을 버리고 사고를 냈습니다. 본인 망신에다 국가에는 치욕을 안겼습니다. 충신역군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간신(奸臣)이나 하는 짓거리라 할 것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