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아빠 하난 정말 잘만난 것 같아?!"
"내가 태어나서 아빠 하난 정말 잘만난 것 같아?!"
  • 승인 2007.09.0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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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연재>딸아이와의 '추억 만들기' 걷기 여행-그 첫날

문득 떠올랐다. 걷·기·여·행. 상황이 됐다. 시간이 됐다. 안되면 맞추면 될 일이다. 휴가를 10여일 앞둔 어느 날의 발상이다. 마침 큰집과 휴가를 함께 떠나기로 약속했다. 휴가지는 고향이다. 전북 고창.

미리 떠나야 한다.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선…. 딸아이와 함께 걷기 위해선…. 머리를 굴렸다. 회사측에 양해를 구했다. 어렵게 3일 정도 휴가를 앞당길 수 있었다. 합이 6일이다. 다녀와서 더 열심히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아이와의 걷·기·여·행·이다. 추억 만들기다. 기대된다.

딸아이에게 이번 `거사`에 대해 통보한 건 그 다음이다. 혼자 모든 걸 다 결정한 다음이다. 말 그대로의 통보다. 강압이다. 협박이다. 딸아이도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걷기 싫어하는 딸아이다. 예상했던 바다. 이럴 땐 밀어붙이는 게 최고다. 가부장적 권위를 앞세우는 게 최고다. 그렇게 했다. 딸아이 쉽게 수그러들었다. 의외다. "딸아이가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아내도 내 편이 돼주었다.

준비에 들어갔다. 특별한 게 필요한 건 아니다. 기본적 의식주에 관련된 것들이다. 휴대용 가스렌지를 샀고 지도책을 준비했다. 가장 중요한 건 딸아이의 정신적 준비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겁을 줬다. 엄청 힘들 것이다…힘들어도 절대 중간에 포기하면 안된다…끼니도 직접 해결해야 한다…식사 당번은 번갈아 가며 해야 한다 등등의. 그런데 아무리 겁을 줘도 딸아이 별로 겁을 먹지 않는다. 모든 걸 포기한 때문일까. 문제는 걸으면서 수시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마음을 뒤집어놓을 딸아이의 짜·증·이다. 내가 당해낼 수 있을까?

떠나는 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대부분 준비는 전날 저녁 마친 상태다. 일곱시다. 딸아인 아직 자고 있다. 깨운다. 힘든 모양이다. 매일 아침 일과처럼 된 신문보기와 사설 반복해 쓰기도 오늘은 없다. 아내도 나도 강요하지 않았다. 떠나기 때문이다.
 
대충 밥을 먹고 매고 갈 배낭을 한번 더 점검한다. 배낭을 지려고 하는데 엄청 무겁다. 군대에서의 완전군장 못지 않다. 30kg은 족히 넘을 듯 하다. 간신히 어깨에 매니 무게가 천근만근. 아이고, 세상에 이걸 지고 걸을 수나 있겠나…눈앞이 캄캄해온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딸아이 배낭도 무겁다. 산에 다니면서도 그렇게 무거운 배낭은 매 본 적이 없는 딸아이다. 그래도 표정은 무심하다.

집을 나선다. 전철을 타기로 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딸아이 한마디 한다. "내가 정말, 태어나서 아빠 하나는 정말, 정말 잘 만난 것 같아!" 기특한 딸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글로 쓰다보니 말을 할 때의 억양 표현이 쉽지 않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비아냥이다. 왜 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한테 이 고생을 사서 시키려하느냐는 책망이다. 웃고 만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출발지다. 대충의 계획은 이렇다. 일단 충남 보령이 1차 행선지다. 그리고 대천해수욕장을 거쳐 해변도로를 따라 남포방조제를 지난 뒤 무창포-춘장대 해수욕장, 그리고 충남 서천에서 1박을 하는 것이다.

보령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보령에서 대천은 가깝다. 딸아이는 고속버스를 탈 땐 계란을 먹어야 한다며 구운계란을 산다. 3개에 1500원, 그러니까 한 개에 500원씩이나 한다며 궁시렁거린다. 버스 안엔 대천해수욕장에 가는 청춘들이 많이 탔다.

피서철이라서 일게다. 버스가 출발한다. 딸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잠 속으로 빠져든다. 간혹 눈을 뜰 때마다 계란을 먹는다. 잘 먹는다.

보령터미널에 도착할 무렵 기사아저씨의 안내 방송이 들린다. 대천해수욕장까지 갈 손님은 1인당 500원씩만 내면 갈 수 있다며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딸에게 묻는다. "아빠가 알아서 해!" 그래서 간다.

대천해수욕장은 햇볕이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다. 선남선녀들이 가릴 곳만 가린 채 거리를 활보한다. 딸아이 부러운 시선이다. 그와 함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자아, 지옥 걷기 여행의 출발이다!" 일부러 큰소리 친다. 딸아이 표정 심드렁하다.
해수욕장 입구에서 그 지역 관광안내지도 한 장을 얻은 뒤 걷기 시작한다. 몇걸음 떼기도 전부터 땀이 비오듯 한다. 시내를 걷는데 여기저기서 우리를 잡는다. "민박집 구했어요?" "아닙니다. 우린 다른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몇 번을 물어 남포방조제 방향을 찾는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2시를 넘기고 있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물과 컵라면을 산다. 순전히 딸아이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문제는 라면을 끓일 장소. 때마침 그럴싸한 곳이 나온다. 숲속 도로변이다. 여전히 딸아이 얼굴은 일그러진 채다. 코펠과 버너를 이용해 라면을 끓인다. 집에서 싸온 김치도 곁들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온 몸에선 땀이 줄줄 흐른다. 드디어 라면이 완성됐다. 딸아이 부리나케 젓가락질에 들어간다. 일그러졌던 표정이 확 바뀐다. 놓칠 새라 "라면 맛있지?" 하고 한마디 건넨다. "응, 진짜 맛있다!" 한 입 넣어보니 꿀맛이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다. 다시 출바알.

약 30여분 걸으니 남포방조제다. 바다를 가로질러 놓은 것인데 끝이 보이질 않는다. 땡볕은 여전히 이글거리며 우리를 괴롭힌다. 입구에 커다란 기념비가 서 있고, 코스모스 꽃밭이 조성돼 있다. 잠시 쉰다. 도로를 걸을 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사람이 걸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최대한 붙여서 걷는데도 위험하기만 하다. 차들은 연신 굉음을 지르며 오간다. 다행히 방조제 위에 길이 있다.

올라간다. 시야가 확 트인다. 방조제와 바다 사이엔 염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낚시를 하는 이들도 간혹 눈에 뜨인다. 민들레꽃이 피어 있다. 이름모를 꽃들도 피어 있다. 딸아인 도통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다. 딸아이가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방조제 위엔 쉴만한 그늘 하나 없다. 수시로 집에서 준비해온 얼음물을 먹인다. 얼음은 이미 녹은 상태다. 물도 뜨뜻 미지근하다. 딸아이 걸음이 자꾸 늦춰진다. 그래도 딸아이 표정만큼은 밝다.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방이 무거우면 대신 들어주겠다고 해도 극구 사양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왕 고생하는거 아빠에게 의지하면 보람이 없어질 것 같아"라고 한다. 대신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바꿔 매기도 하며,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해 나간다.

약 4km 정도 길이의 남포방조제 중간에 섬이 있다. 방조제 때문에 육지와 연결된 죽도유원지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두시간여, 죽도에 와 닿는다. 입구에 조그마한 슈퍼마켓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물과 음료수를 먹는다. 딸아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다시 지도를 들여다본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매일매일의 목적지를 정해놓긴 했지만 꼭 지켜야하는 건 아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힘들면 쉬었다 가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자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길을 나서니 쉽지가 않다. 자꾸 욕심이 생긴다. 그래도 목적지 수정. 불가피한 상황이다. 방조제를 건너 용두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을 지나 웅천읍으로 빠지는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딸아이는 자꾸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 모습이 흐뭇하다. 여전히 짜증도 내지 않는다. 의외다.

무창포를 지나 산속 도로를 걷는다. 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철저하게 자동차 위주로 만들어진 도로.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걷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간과한 채 길을 뚫어놓는 것일까. 위로 서해고속도로가 지나는 짧은 터널을 거쳐 웅천읍 쪽으로 향한다. 길은 끝이 없다. 달리는 차들도 연이어진다. 우리를 만날 때마다 속도를 늦추고 저만큼 떨어진 곳으로 피해가주는 차들이 고맙다. 해가 떨어지고 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시가 넘어서고 있다.

저 멀리 조그마한 소도읍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웅천읍일 게다. 입구에 아주 오래된 찐빵집이 있다. 조그맣다. 정감이 묻어난다. 딸아이에게 물으니 두말 않고 오케이다. 배도 고플 게다. 라면 하나로 때웠으니…. 석재를 가공하는 업체들이 도로변에 즐비하다. 벼루를 만드는 오래된 집들도 많다. 한참을 걸어 웅천읍내로 접어든다. 버스터미널을 찾는다. 오늘은 서천까지 가서 1박을 할 계획이다. 터미널은 읍내에서도 맨 끝에 위치해 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시계는 8시를 넘어서고 있다. 거의 8시간 가까이를 걸은 셈이다. 서천행 버스가 도착한다. 서천을 거쳐 장항까지 가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 이내 서천에 내린다. 딸아이 표정 여전히 밝다. 서천 인근 모텔에 짐을 푼다. 밥을 해먹자던 딸아이, 갑자기 말이 바뀐다. "그냥 밖에 나가서 사먹자." "왜?" "그냥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피곤하기 때문일 게다.

늦은 저녁을 때우고 맥주까지 사다가 갈증을 풀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딸아이도 그런 모양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고생해야돼. 일찍 자자." 딸아이가 의외다. 기특하다. 다음호 계속 정명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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