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의 비행, 연초록의 보리, 새들의 사랑
갈매기의 비행, 연초록의 보리, 새들의 사랑
  • 승인 2007.04.2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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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갈매기와 자유

가슴이 뻥 뚫린다. 부딪히는 파도 위를 자유롭게 비행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진다.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꽉 막혀 있는 것을 분명하다. 답답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벽뿐이었다. 그런데 단번에 해소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늘의 파랑과 바닷물의 파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바다의 모습이 시선을 잡는다. 하늘과 물이 하나가 되어버려 막혀 있는 가슴을 뚫어주는 것이다. 막혀 정체되어 있는 마음을 소통시켜주니, 개운해진다. 시방이 열려 있는 공간을 가르는 비행이 단연 우뚝하다.

갈매기의 비행.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의 비행이 우아하다.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없다. 막힘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우주 끝까지 열려 있는 공간의 여유가 가슴을 열어준다.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영혼이 날개를 얻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것은 분명 자유의 본 모습이었다.

이곳은 군산 어시장이 있는 바닷가이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생선을 사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 행복이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안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일어나는 대상의 사건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갈매기는 과거에도 날았고 지금도 날고 있고 앞으로도 날고 있을 것이다. 그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하다. 갈매기의 비행 자체는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갈매기의 비행을 갈매기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의 상황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갈매기 주관의 문제는 제외하고 바라보는 시선의 입장만을 생각하기로 하자.

갈매기의 비행은 자유를 준다. 그렇다면 그 동안 삶에 있어서 자유를 앗아간 이는 누구일까? 물론 제도나 법 그리고 문화를 얼른 떠올릴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것은 결코 내면의 자아를 구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어떤 법으로도 개인의 내면까지 침범하기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를 잡고 통제하는 이는 누구일까?
 
유연한 몸매를 자랑하고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가 답을 준다. 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구속하고는 답답하다고 아우성을 친다.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안의 떠 다른 마음임에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꾸 핑계를 찾으면서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갈매기처럼 날아오르고 싶다. 파란 하늘을 아무 걸림도 없이 자유롭게 비행하고 싶다. 가슴을 막고 있는 답답함을 몰아내 버리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다. 마음을 잡고 있는 또 다른 마음을 돌려 소통하고 싶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 생명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이 없는 것이라도. 갈매기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봄의 또 다른 얼굴, 보리

하늘이 내려앉았다. 손에 잡히는 구름이 야속하다. 고운 봄꽃들이 그들의 심술로 인해 고통 받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맑은 햇살의 고마움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봄꽃들의 우아함도 결국 밝은 태양으로 인해 돋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통을 부리는 구름으로 인해 모두가 가라앉아 버린다.


날씨로 인해 마음도 우울해진다. 사람이 교만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잘났다고 우쭐거려도 결국 자연 속의 작은 존재일 뿐이다. 어제까지 봄의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젖어 있던 마음이 바람의 심술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내 마음이 분명한데,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인생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수용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심술을 부린다고 하여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자체가 삶의 중요한 바탕이 되지 않은가. 침잠시켜 버리는 훼방이 있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을 때의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얼마전 찾았던 군산의 일이 떠오른다. 서해의 푸른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간척지에 파란 보리들이 자라고 있었다. 내려앉은 하늘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기분을 보리를 떠올려 바꿔본다. 연초록의 싱그러움이 되살아나니, 우중충하던 마음이 되살아난다. 사람의 정서가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실감하게 된다.

고향(전라북도 고창)은 보리의 고장이다. 삼한 시대에는 모양부리현이라고 불릴 정도로 보리가 잘 자라는 고장이다. 모는 보리 모자이고, 양은 볕양이다. 보리가 잘 자라는 양지 뜸이란 뜻이다. 사적 145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창읍성의 원래 이름도 바로 모양성이다. 인물을 배출하는 고창고등학교의 상징도 바로 보리다.

간척지에서 자라고 있는 보리는 벌써 모가지를 내밀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자랐을까.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상에 쫓겨 관심을 갖지 못하였지만, 보리는 꾸준히 성실하게 채워갔던 것이다. 제 할 일을 절대로 놓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리에서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보리는 힘이 넘치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하다. 부끄러워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는 풋풋한 처녀를 닮아 있다. 초록의 보리에서는 곱고 맑은 향이 배어난다. 세상의 때라고는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아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보리의 부드럽고 청아한 빛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보리에게서 전달이 되는 힘이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세상의 욕심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세진들로 찌든 영혼에 한줄기 빛이 된다. 옹달샘이 되어 시나브로 몸 전체로 번져나고 있었다. 탐진치로 찌든 추한 냄새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미로운 향으로 바뀌어지고 있었다.

보리는 봄의 또 하나의 다른 얼굴이었다. 봄의 얼굴은 물론 꽃들이다. 다양하게 피어나는 수많은 꽃들의 계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보리는 봄의 다른 얼굴임이 확실하다. 꽃이 품어내는 향 못지않게 보리가 만들어 내는 봄의 정취도 독특하다. 봄이 한 가지 스펙트럼만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더욱 우뚝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초록의 보리가 누렇게 변해지면 봄은 멀어질 것이다. 봄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봄을 영원히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열정의 여름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순리다. 여름이 오기 전에 봄의 흥겨움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바람이 심술을 부릴지라도 마음을 바꾸면 봄의 정취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지금은 사랑할 때

“휘- 익-.”
새들의 노래 소리에 힘이 들어 있다. 감출 수 없는 강력한 힘이다. 활기가 넘치는 신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소리에 넘쳐나는 역동성이 원초적인 상태 그대로 보여 지고 있다. 어찌나 좋은지, 하늘을 채우고도 남아서 온 우주에 그득하다. 그 것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샘솟는 자연발생적이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해진다.


전북 김제시에 위치하고 있는 금산사 입구의 노거수 시나무에서다. 금산사는 조계종 제 17 교구 본사로서 1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름 높은 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곳이다. 반복되는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새들의 활기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여준다.

노거수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살아왔다. 아름드리나무의 크기가 그 것을 말하고 있고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수많은 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무는 어머니를 닮아 있다. 넉넉한 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하고 수용하고 있다. 그 안에 새들이 분주하다.

지금은 사랑할 때.
처음에는 그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금산사의 봄은 벚꽃과 철쭉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환하게 피어난 꽃들은 금산사를 화엄 세상으로 만든다. 춘정에 이끌려 매년 봄이면 이 곳을 찾는다. 올 봄에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이곳으로 향하였다. 꽃들이 만개하여 찾는 이의 마음을 채워준다.

봄꽃에 취하여 몽롱해져 있다. 그 때 활기 넘치는 새들의 노래가 공명되고 있다. 새들의 노래 소리에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새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였고 새들의 노래에 취하게 된다. 그 것은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이 있다. 울림이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들의 노래는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을 통해 만들어지는 설렘과 두근거림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사랑의 싱그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가식이라 치장은 찾아볼 수 없다. 원래 가지고 있는 성품 그대로의 모습이 눈에 부시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순수함이 마음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다. 감동은 꾸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특정한 새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다. 사랑의 노래를 모두가 부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웅장하고 돋보이는 것이다. 모든 새들이 사랑에 빠져 있다. 사랑의 하모니는 나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누리에 넘쳐나고 있다.

높은 소리 고운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이쪽에선 부르는 소리가 저쪽에는 불러지는 소리가 교차하며 흥겨움이 넘쳐난다. 저절로 일어나는 유혹의 함성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모두가 젖어든다. 싫다하지 않고 달려드니, 사랑의 열정으로 모든 것을 녹여낸다. 각가지 색깔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버린다.

사랑을 부르는 새들의 모습에선 열망이 넘쳐나고 부름을 받고 있는 새들은 설렘으로 환희다. 사랑이 마법이란 것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사랑을 원하는 새도, 사랑을 받는 새도 눈부시기는 마찬가지다. 한 걸음 비껴 서서 바라보는 마음에도 춘정이 저절로 솟구치고 있다. 질펀하게 사랑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은 사랑할 때 <春城>

높은 소리
고운 노래
공명되는 사랑 울림

부르며
불러지고
어우러진 한 마당

채우는
환희의 설렘
사랑할 때, 지금은

요리 봐도
저리 봐도
신바람 높은 물결

나누며
함께하며
피워내는 눈부신 꽃

흥건한
춘정의 유혹
질펀질펀 펼쳐져 

새들의 사랑에 빠진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흥이 난다. 아니 나 또한 농염한 사랑을 해보고 싶어진다. 벚꽃으로 화사한 봄날에 춘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 아닌가. 일상은 잠시 뒤로 밀치고 지금은 사랑에 빠질 때다. 유한한 인생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사랑할 때다.


keesan@hanmail.net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한국아동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월간 아동문학 신인상,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 녹색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북 대덕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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