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 비비는 할머니와 무료 배식 현장의 쾡한 눈빛들
보리밥 비비는 할머니와 무료 배식 현장의 쾡한 눈빛들
  • 승인 2005.08.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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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한시간 동안의 세상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기자의 쉼터가 있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기자의 일터가 있는 곳이다. 쉼터에서 일터까지는 전철로 세 정거장이다. 10분 걸린다. 버스로는 여덟 정거장이다. 안막히면 15분이면 족하다. 그런데 기자는 한시간 걸린다. 걷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시간 동안 많은 세상과 만난다. 맨날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맨날 만나는 세상도 같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거의 맨날 걷지만 만나는 세상은 거의 맨날 다르다.

주로 걷는 길은 시조사-청량리 역전-경동시장-제기동-용두동-신설동 로터리 순이다. 때론 경희대-카이스트-홍릉수목원-고려대-안암동 로터리-신설동 로터리 코스를, 또 때론 위생병원-서울시립대 후문-서울시립대 정문-전농동-다일밥퍼센터-용두동-청계천-신설동로터리 코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맨날 같은 길을 걷는데서 오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함이지만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다. 청량리 역전-경동시장을 거치는 길이 가장 좋다. 가끔 `직업상` 호기심에서 꺾어든 속칭 `청량리 588` 골목에선 이른 아침부터 `생업`에 나선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낭창낭창한 몸매를 훔쳐보는 `횡재`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기자를 더욱 기쁘게 하는 건 그곳말고도 출근길 도처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중에서도 경동시장은 그 절정의 현장이다. 이른 새벽, 지방에서 올라온 야채와 생선, 각종 과일 등을 하루동안 팔 양만큼 배당받아 저마다 분주히 정리하는 사람들.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이들 중엔 젊은층도 있지만 대부분은 60대를 훌쩍 넘긴 연세의 노인네들이다. 그들에게 한 평 남짓한 후미진 길모퉁이는 삶의 터다. 한 개의 파라솔은 그 터전을 감싸주는 지붕이다. 리어카는 아주 훌륭한 운송수단이자, 진열장이다. 그것마저 소유하지 못한 많은 노인네들은 길바닥에 신문을 깔고 그 위에 물건들을 늘어놓는다. 늘어놓은 물건들엔 저마다 두꺼운 종이 위에 굵은 펜으로 쓴 `가격판`들이 놓여져 있다. 때론 가격판에 농산물의 산지가 함께 쓰여져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강원도 평창 애호박 5개에 천원, 고창 수박 1통에 2천원, 국산 물오징어 3마리에 2천원, 경기도 파주 대두콩 한 대에 3천원, 가지가 5개에 천원….

아침 출근길. 기자는 8시에서 8시 30분 사이에 항상 그곳을 지나친다. 그리고 항상 그 세상과 마주친다. 어제 보았던 낯익은 할머니가 식사를 하고 계신다. 그 할머니는 어제도 식사를 하고 계셨다. 어제는 보리가 섞인 밥에 된장찌개와 김치 등 3-4개의 반찬을 곁들였는데 오늘은 우동 그릇에 한가득 밥을 담아 몇가지의 반찬과 고추장을 넣고 쓱싹쓱싹 비비고 계신다. 군침이 돈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먹어볼라우?" "그 많은 걸 다 드세요?" "이것도 모잘러…장사를 하다 보면 금새 배가 꺼져 버린 당게." "많이 드세요." 할머니가 웃는다. 연세가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인다.

그나마 햇볕이 비치는 날은 이들에게 행운이다. 요즘처럼 비라도 흩뿌리는 날이 이어지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그래도 이들의 표정은 한없이 밝기만 하다. 비가 온다고 물건을 거두는 이들도 없다. 자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늘어놓은 물건들에 우산을 씌운다. 이들에게 그 물건들은 아주 소중한 자식이다. 하루의 삶을 이어주는 생명끈이다. 그것들을 다 팔아서 남는 수익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가 남든 이들은 일할 수 있다. 얼마가 남든 이들은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표정은 구김이 없다. 목소리도 크다.

경동시장 끝 언저리에 용두교가 있다. 용두교를 지나 3-4분을 걷다보면 또 하나의 색다른 세상과 만난다. 인도 위에 일렬로 주욱 늘어선 인파들. 인근에 있는 한 종교단체에서 아침밥을 무료로 배식하는 현장이다. 나이가 구분되지 않는 그들은 대부분 노숙자들로 보인다. 단 한번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있다. 남루한 옷차림, 핏기를 잃은 얼굴색, 허공을 쳐다보는 쾡한 눈빛들…. 맨날 그 세상과 마주치지만 이후로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왜일까?? 정서룡 기자 sljung9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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