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관형향배(觀形向背), 강홍립, 김응하

2015-03-02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충무공(忠武公)은 이순신장군의 시호라는 것,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 500년을 통해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이는 모두 9명에 달합니다. 그 중에 김응하(金應河)장군도 있습니다. ‘충무(忠武)’는 무인에게 내리는 최고의 시호입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해 요동의 요충지인 무순을 함락시킵니다.

이에 명은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후금에 대응하게 됩니다. 명의 기본적인 대외방침은 이이제이, 지속적으로 조선왕 광해군에게 병사의 출병을 요청합니다. 광해군은 ‘피폐한 군대를 호랑이굴에 보낼 수 없다’며 명의 요청을 듣지 않았습니다. 명의 요동태수 양호가 요청을 넘어 강요를 해 왔지만 왕은 버텼습니다.

황제의 칙명이 아니면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는 사절을 양호에게 보냈습니다. 북경으로는 우리의 사정을 전하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대소신료들은 난리를 쳤습니다. 왕을 비호한다고 자처하던 정홍과 이이첨조차 군대파견에 동의하며 왕을 압박했습니다. 모두 명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왕은 차선책을 제시했습니다. 압록강까지만 군대를 보내겠다. 더 이상은 안 된다. 태수 양호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으로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광해군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조선 파병군이 편성됐습니다. 전투병력 1만, 비전투병 5천오백, 제반 군수물자는 8도에서 징발했습니다. 지휘부도 구성했습니다. 중국어에 능하고 사고가 유연한 강홍립을 도원수로, 병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 선천부사 김응하 등 장수들로 사령부를 구성했습니다. 그래도 왕은 안심하지 못했습니다. 따로 강홍립을 불러 밀지를 줍니다. ‘관형향배(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유리하게 행동하라’

강홍립은 이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세를 보아 불리하면 항복하라는 것이 주상의 뜻 아닌가.
결사항전해 후금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상의 판단에 의하면 필시 명나라 군대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면 조선군도 피해가 막심할 것인데. 강홍립은 조선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홍립의 군대는 임진난의 파병장 유정의 휘하에 배속됩니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집니다. 유명한 1619년의 ‘사르후(深河)’ 전투입니다. 명나라 군사는 경솔히 행동하다 포위에 빠져 패배하고 장군 유정은 자살을 하고 맙니다.

조선군도 6만의 후금군에 포위됐습니다. 급박한 전황 속에서 김응하가 다가와 말합니다. “도원수, 중과부적이오. 우리가 모두 항복하고 살아난다면 나중에 황제에 대한 주상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오. 난 조선무인의 기개를 보일 것이니 뒷일은 도원수에게 맡기오.” 김응하는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우다 전사합니다.

강홍립은 5천여 명의 남은 군사와 함께 투항했습니다.

명은 강홍립의 항복을 조선의 배신으로 의심했지만 김응하의 항전은 이를 무마시키기 충분했습니다. 명(明)은 김응하에게 요동백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상금을 보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도 김응하는 영의정으로 추서하고 충무공 시호를 내립니다. 고향 철원엔 그의 사당 포충사가 있습니다. 강홍립은 1627년 67살의 나이에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정 신하들은 변절한 역신(逆臣)이니 참수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강홍립은 그해 7월 병사(病死)합니다.

김응하의 죽음을 두고 학계에서는 명나라와의 명분외교에 희생양으로 썼다고 해석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전투에서 강홍립은 후금을 달래는 데 사용한 카드였고 김응하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카드였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강홍립의 항복에서 찾고 있지만 사실 실리외교를 완성시킨 비장의 카드는 김응하라는 것입니다.

소위 ‘사드(THAAD)’와 관련된 외교가 불꽃을 튀기고 있습니다. 외교는 총성없는 전쟁이라 하니 거의 전쟁 양상입니다. 사드는 고도 미사일 방어체제라고 하는데 전문가 아닌 이상 잘 알 수 없습니다. 패트리어트 보다 훨씬 더 발전된 탄도탄 요격 미사일이라는 것, 근접폭발 방식이 아니라 정확하게 미사일을 명중시킨다는 것, 뭐 그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드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중국이 이 사드의 한국배치를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당연히 사드 배치를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언론이 보도합니다.

1992년 수교이후 중국은 우리의 최대 무역국이 됐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중요한 관계가 됐습니다. 그러나 최근 한중간의 군사외교도 중요해졌습니다. 사드 문제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중관계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작년 7월 북한엔 한 발짝도 내딛지 않은 시진핑 중국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서울에 온 시 주석은 사드의 한국 배치에 강력한 반대를 나타냈다고 보도됐습니다. 최근 방한한 중국 국방부장도 사드의 배치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고 언론은 전합니다. 중국은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미국의 중국봉쇄 전략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사드에 대해 한 다리를 걸치고 나섰습니다. 작년 7월에 이어 올 2월초에 한반도 사드 배치가 지역국가간 불안정을 가져오고 있다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북한의 핵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중요한 안보문제입니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무인이 주중대사로 내정됐습니다. 한중간 사드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풀어야 하는 숙제를 밀지로 받았다고나 할까요?

400년 전, 밀지를 받아든 강홍립은 착잡했습니다. 그렇게 인선이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긴다는 주상의 눈빛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천부사 김응하는 듣지 않아도 도원수 강홍립의 심사를 헤아렸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감당합니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한 사람은 치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