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⑰ 불편한 진실, 빛과 그림자
하동현의 양망일기 ⑰ 불편한 진실, 빛과 그림자
  • 하동현 소설가
  • 승인 2019.07.0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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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말한다. 영광 뒤에 숨은 치부를 감추고 미사여구로 칠갑된 승자의 기록. 하지만 그 민낯들은 불편하고 거북할 때가 있다. 대항해시대 선각자들의 빛과 그림자를 들춰본다.

대항해시대는 15~18세기 유럽인들이 대양을 무대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정복에 더해 해상국제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를 일컫는다. 대표주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십자군 전쟁 실패 이후,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육로 무역이 막힌 상황을 역발상으로 뒤집어 해상 루트로 인도와 중국에 이르고자 했던 나라들이다.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마젤란. 어릴 적 읽었던 위인 전기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는 한국판에 맞서 당당하게 외국판을 장식하던 간판스타들이다. 지구는 평평해 바다 끝으로 항해한다면 낭떠러지로 추락한다는 원시적 믿음을 갓 벗어난 꽉꽉 막힌 시대에, 목숨을 담보로 한 해상 탐험분야의 영웅들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다. 분야와 영역이 다르겠지만,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그 사람의 인생과 신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녕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찬란한 명예 뒤에 숨은 자연인으로서의 지고지난 했던 삶과 영욕의 그늘도 분명히 존재한다.

2먼저 콜럼부스(Columbus)를 보자. 신대륙을 발견한 불세출의 해상 영웅. 얽힌 매듭을 풀지 않고 과감히 칼로 쳐내버린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계란 밑동을 깨트려 곧게 세우면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과감히 시도하는 자, 실행하는 자’ 로서의 전설과 교훈을 남긴 인물이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육류가 메인인 유럽 식문화에서 쌀밥에 김치처럼 빼놓을 수 없는 향신료, 특히 ‘검은 보석’에 비유되는 후추에 대한 간절한 수요가 새로운 항로의 모색으로 이어졌다. 조선기술과 나침반의 활용이 뒷받침되었지만 실상은 무모한 ‘맨땅에 헤딩하기’식 여정이었다.

스페인 왕실의 지원으로 탐험을 진행했는데, 발견한 땅의 총독 직위, 거기서 창출될 이익의 1할을 옵션으로 내건 고용계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국익과 개인의 영달 같은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용병계약 같기도 하다.

‘유토피아’ 인도를 찾던 그는 일반 통념에 반해 과감하게도 서쪽으로 향해 바하마 제도에 도달한다. 대단한 명성을 누린 짧은 영광 뒤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고대하던 후추는 구경도 못하고 겨우 찾아낸 소량의 황금 말고는 내세울 만한 성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왕실을 끈질기게 설득해 4차까지 항해를 밀어붙였다. 후추를 대신한 엉뚱한 ‘빨대 꽂기’로 황금 채굴을 위해 토착민인 인디언들을 착취하고 노예화했다.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원주민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담배를 유럽에 전파하고, 풍토병인 각종 전염병을 대륙 간에 옮겼다는 등 부정적인 평가에다, 금 생산이 부족해 문책을 당하자 노예무역으로 눈을 돌렸다.

나중에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 본국으로 송환되기도 한다. 바이킹들이 훨씬 전에 신대륙에 닿았을 것이므로 사실은 그가 ‘최초’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말년에는 그를 시기한 세력들로부터 희대의 사기꾼이자 잔혹한 정복자라는 재평가로 폄하와 조롱을 당했다. ‘발견(Discovery)’이 아니라 ‘침략(Invasion)’이라는 말이다. 사망한 뒤에야 스페인은 마지못해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 믿었다 한다. 후에 그 땅이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인도가 아니라 아무도 몰랐던 신대륙이라 밝혀지고, 자신은 뒷방 신세에 되레 후배 탐험가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 명명되는 수모까지 당한다.

포르투갈은 ‘항해 왕’으로 불리는 왕자 엔리케(Henrique) 이래 신항로 개척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정작 왕자 자신은 심한 뱃멀미로 직접적인 항해와는 거리가 있었다지만, 국익을 위해 대담한 결정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는 신대륙 발견을 스페인에 빼앗겨 자존심을 구긴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로 원정 함대를 꾸려 리스본을 출발한다. 희망봉을 돌아 남아프리카의 몇 항구를 거치며 인도의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다.

그는 가로막힌 육로를 피해 해상운송으로 인도와 직거래하려 했다. 하지만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했던 기존 이슬람 세력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해 방해와 갈등이 고조되었다. 힌두 통치자로부터는 그들이 포르투갈에서 가져가 교환무역 품목으로 내민 물건들이 조잡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단순한 무역 차원에 더해 기독교 선교라는 신념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종교적 마찰도 빈번했다.

아예 후추의 종자를 얻어 본국으로 가져올 계획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경작에 적합한 기후가 맞지 않다는 뼈아픈 교훈도 얻었다. 큰 성과는 없었지만 첫걸음을 튼데 자위하면서 상당량의 후추를 싣고 귀국길에 오른다. 역방향 귀국 항로는 험난해서 석 달이나 걸린 데다 괴혈병으로 백 명 넘는 선원도 잃는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다. 왕은 그를 귀족으로 승격시키며 새 항로를 개척한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는 전 항차의 쓰라린 학습효과에 호승심과 탐욕이 더해진 두 번째 항해를 준비한다. 무장한 병사들로 채운 대 선단을 이끌고 도착한 인도 해안에서 이슬람 선대를 약탈하고 수장시키는 해적질을 일삼았다. 평화를 원하며 대항하는 인도 현지인들마저 살상하며 억압했다.

승리에 도취한 그는 향신료와 엄청난 재물을 갈취했다. 인도 남부 곳곳의 항구에 무역기지를 설립해 함대를 주둔시켰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제 집 앞 바다로 만들며 독점 무역으로 국력이 욱일승천하는 영광의 시절을 누리게 된다.

영국과 네덜란드까지 나라의 명운을 걸고 혼란의 도가니 인도로 뛰어들었다. 열강들의 가세에 대책도 없이 부정부패나 저지르던 공관을 바로잡고, 총독을 대신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그는 세 번째로 인도로 향한다. 자신이 개척한 대륙에의 향수와 자존감이 복합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총명을 잃고 늙어버린 그는 현지인들의 거센 저항을 진압하다 풍토병에 걸려 객지인 인도에서 쓸쓸히 사망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출세와 자국의 이권을 위해 공정한 무역 관행을 깨트리고 상대국의 평화를 짓밟는 식민지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포르투갈의 길지 않은 영화 뒤에 인도에서의 마지막 패권을 차지한 승자는 영국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도 서해안의 항구도시 고아(Goa)에서 물러나지 않고 점령권을 주장했다. 영토 반환을 거부하자 인도는 끈질긴 게릴라전에 이어 1961년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탈환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인도항로 개척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추진하며, 바스쿠 다 가마의 업적(?)을 치켜 세우려 하던 포르투갈은 인도인들의 사생결단 격렬한 반대 시위에 계획을 접어야 했다.

한쪽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지만 반대편에서는 ‘살인강도 침략자 수괴’ 쯤 되는 인식이었다. 덧없는 야욕이 몇 백 년 후에 치욕의 굴레에 빠지며 앙갚음을 당한 것이다.

 

3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의 위업을 이룬 마젤란의 말로도 비참하기 그지없다. 마젤란 해협이며 태평양까지, 최초로 항해한 곳곳의 바다에 이름을 붙여가며 전인미답의 항해를 이끌었지만 정작 본인은 살아서 귀환하지도 못했다. 필리핀 세부의 막탄섬, 억지 개종을 강요하며 벌어진 전투에서였다. 함포와 화승총이라는 압도적인 성능의 무기를 가지고도 원주민 군대의 인해전술과 치고 빠지는 게릴라 식 전법에 패배한 것이다. 결국 그는 창과 칼에 난도질당해 뼈도 못 추리고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선원들만이 귀환해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을 누린 것이다.

나도 폭풍우 속의 마젤란 해협을 마주했을 때 안전항해를 기원하며 마음속으로 대선배인 그에게 경의를 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최초로 발견하고 건넜다는 해협을 누군가가 먼저 항해했고, 이미 그 해도를 소지하고 있었지 않았냐는 의문이 대두된다.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의 잠수함 함장 출신 영국인 저자 ‘멘지스’는, 콜럼버스보다 70년 앞선 때 중국 명나라 정화의 함대가 이미 세계 지도급인 항해도를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친 명나라 영락제의 대규모 세계 원정이 효시라는 말이다. 역사적 문헌들을 살피고 오래된 해도들을 취합해 고증작업을 거쳐. 4개의 선단으로 나누어 오대양 육대주를 탐사한 흔적과 지도 같은 기록들을 찾아냈다.

일례로 마젤란이 남위 52도의 해협과 태평양 해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스페인 왕의 대리상인 ‘세바스티안 알바레스’의 편지 같은 사료들을 제시한다. 대륙 간 농작물의 전파경로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으로 당시 중국 난파선들의 존재까지 거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먼저 세계의 전 해역을 항해하고 해도를 만든 이들은 ‘머리가 검은 황색인’ 즉,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빅토르 위고가 ‘배의 영혼’이라 불렀다는, 별자리로 선위를 가늠할 수 없는 흐리고 안개 낀 날에도 방위를 알려주는 나침반의 발명도 중국이지 않은가.

신대륙으로의 항해가 서구인들이 암암리에 입수한 그 해도를 바탕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를 든 선각자들의 업적들은 서구 중심 시각의 뻥튀기 과대포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4대 선배 격인 옛날 항해자들의 어두운 뒤안길을 파헤쳐 보니 짠하고 서글프다. 인생무상이다. 업보(業報)란 단어도 떠오른다.

나이 들면서 터득한 불변의 진리 두 가지를 대입해 보자. 세상 어느 누구든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결국 칭찬만 할 수도, 비난만 할 수도 없게 된다는 사실과,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신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또 하나다.

그들은 용맹한 기질과 지혜로 무지몽매한 세상을 일깨우고 인류의 미래를 앞당긴 선각자들이었을까. 국가나 자본의 이익에 고용되어 그 죽일 놈의 승부욕과 자기과시의 야망에 사로잡혔던 기회주의자들이었을까.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당대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린 그들의 탐험과 정복에 대의와 신념은 뚜렷했을까.

그들을 지원했던 국가 차원의 시각도 재고해야 한다. 식민지 개척과 노예무역 같은 약탈경제에 몰입하는 바람에, 자체 생산기술이나 내부 혁신에는 소홀하여 역사 속에 ‘반짝 해양강국’의 영예로만 그친 점은 아쉬운 대목이 아닌가.

지금의 바다를 보자,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힐링공간으로 부각되는 연안과 어촌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대양만을 두고 볼 때는 그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의 욕망에 덜미를 잡힌 바다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몸값을 노린 해적이 출몰하고, 강대국들이 자국의 권리 확장에 힘의 논리를 들이밀어 도처의 해역을 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식량안보와 수송의 터전인 바다가 전쟁터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역사적인 교훈 같은 것은 접어두자. 두 가지 마음이다. 바다를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본 서구의 시각으로 문명의 발달을 앞당긴 개척정신도 높이 사지만,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으로 보고 융화하려 했던 동양적 사고에 더 가치를 매겨야 하지 않을까.

대 선배 항해자들의 그늘진 삶의 흑역사를 후벼 파본 몇 백 년 쫄따구 후배로서, 그들의 지난한 삶에 예를 갖추어 위로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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