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漁村情談 ⑰ 조기는 칠산바다에서, 굴비는…
김준의 漁村情談 ⑰ 조기는 칠산바다에서, 굴비는…
  • 김준 박사
  • 승인 2019.07.0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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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

[현대해양] “부세는 중국산이제라. 국산은 없어라. 전부 중국산으로 만들제. 굴비는 국산조기로 맹글지만 부세는 전부 중국산이제라. 요것으로 거시기하요. 식당에서 굴비정식있제라. 전부 중국산 부세로 만들제라.”

단오제 구경을 위해 숲쟁이에 올랐다가 제법 큰 굴비상회에서 주인과 나눈 인사다. 가게 앞 걸대에 작은 조기들이 걸렸고, 옆으로 큰 부서가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틈새로 마른갈치 엮거리가 존재감 없이 걸려 있다. 법성포에 굴비상가만 200여 개가 있다. 큰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상가도 있지만 가정집에서 작은 규모로 이어가는 곳도 있다. 이중 150여 상가는 ‘법성포굴비특품사업단’으로 브랜드를 만들었다. 특품사업단에 가입하지 않는 상가는 전통방식으로 유통하며, 일부 대상인은 부산, 목포, 군산, 여수 등에서 직접 운반으로 옮겨온 조기를 구입한다. 다른 점은 40, 50년 전에는 명실공이 법성포는 굴비의 본향이자, 조기의 고향이었다. 지금은 조기의 고향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조기는 더 이상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잡기 않기 때문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법성포 어시장의 위판 모습
법성포 어시장의 위판 모습

법성포 어시장, 꽃게가 간간이 보이고 최근 몸값이 한껏 높아진 병어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대부분 양태로 채워졌다. ‘가을양태는 마누라하고도 바꾸지 않는다’지만 좀 심하다. 각시서대도 한껏 화장을 한 몸으로 상자에 갇혔다. 하지만 조기는 어디에서도 꼬랑지도 찾기 힘들다. 선창에서 막 잡아온 생선을 어판장으로 옮기는 선주들에게 조기의 안부를 물어도 손을 내저었다.

숲쟁이를 지나 목맥으로 향했다. 조기파시가 있었던 마을이다. 혹시 옛날 흔적이라도 찾지 않을까 싶어서다. 목맥은 홍농읍에 속하는 마을이다. 법성면과 홍농읍 사이에는 제법 너른 농지가 있지만 조기파시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갯골과 갯벌이 발달했던 바다였다. 칠산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다. 법성포와 홍농읍을 가르는 하천이 구암천이다. 1917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보면 구암천 갯골 안쪽에는 염전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천일염전보다는 소금을 굽는 화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소래염전과 주안염전 외에는 우리나라에 천일염전이 없던 시절이다. 법성포로 들어오는 많은 조기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진 소금으로 굴비로 가공되었을 것이다. 법성포이 서해안 최적의 굴비 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칠산바다라는 조기 산란장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최고의 천일염을 공급할 수 있는 적지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법성포에서 가까운 백수나 염산염전, 그리고 좀 떨어져 있지만 고창 삼양염전은 이후에 만들어진 근대염전이다.

목맥마을 당산나무

오래전부터 오가며 눈여겨 보아온 목맥마을 당산나무를 찾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옷 입혔다. 노인들 몇 명 없는 작은 마을에 저리 큰 당산나무 옷을 새로 마련하는 것이 만만치 않으리라. 이리저리 옮겨다며 톺아보고 사진도 찍었다. 인기척 때문인지 집안에서 노인이 나왔다. 백세를 몇 년 앞둔 노인이었다. 노인은 법성포 건너에 백수에 살다가 마을로 이사왔다. 당시 법성의 자갈금과 흥농 목맥을 잇는 제방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구암천과 바다를 잇는 물길을 가로막은 것이 100년쯤 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홍농읍 사람들은 모두 목맥에서 나룻배를 타고 법성포를 오갔다. 그렇지 않으면 고창을 돌아가야 했다. 그때 마을에는 조기파시가 한창이었다.

저 너매에 술집이 10개는 넘었어라. 조금이면 칠산바다에서 배들이 들어와 여기부터 작은목냉기 큰목냉기까지 배들이 꽉찼으니께. 안강망이었제. 조구가 말도 못하게 많이 잡혔응께.

그때는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고 당산나무에 줄을 감았지만 지금은 줄은 고사하고 당산나무에 술 한 잔 올릴 사람도 없다. 그나마 집을 엮어 둘러놓은 것만도 감지덕지다. 백수로 이어지는 영광대교가 개통되면서 목맥리 앞으로 지나는 자동차와 관광버스가 많아졌다.

법성포단오제 기간에 풍어와 선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낸다
법성포단오제 기간에 풍어와 선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낸다

목냉기 작부야 몸단장 말아라

법성포에는 다랑가지파시와 목냉기파시 그리고 법성포 맞은 편 응암바위와 계마포구 근처에도 크고 작은 파시가 있었다. 노인들이 이야기하는 파시는 술집인 경우가 많다. 애초 파시는 바다에서 서는 시장이다. 운반선이 잡은 고기를 사고, 필요한 생필품을 파는 바다시장이다. 칠산바다 안에 송이도, 낙월도, 안마도, 위도에도 파시가 있었다. 그 중 법송포 다량가지와 목냉기 파시가 으뜸이었다.

목냉기 작부야 몸단장 말아라/돈 없는 건달들 다 녹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오/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목냉기에서 나와 돔배섬을 지나면 칠산바다다. 돔배섬을 지나 안으로 들면 높은 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든다. 길고 긴 조기잡이로 지친 뱃사람들은 이 섬을 지나 법성포가 보이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이 실하게 밴 조기를 다랑가지에 내려놓고 선주로부터 받은 술값을 들고 곧바로 목냉기로 향했다. 그곳에 배를 정박하고 막걸리 잔을 돌리며 모처럼 분냄새도 맡을 생각을 하니 벌써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솟았다. 당시 ‘목냉기’ 모습이 이랬을 것이다. 하루에 200-300여 척 배가 정박하면 큰목냉기에서 작은목냉기까지 징검다리 삼아 건너다녔다. 법성포에는 마땅히 배를 정박할 곳도 없고 수심이 낮아 무시로 배를 띄우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목냉기는 칠산바다로 가는 나들목이자 수심도 좋고 술집이 있어 뱃사람들이 좋아하는 숙박지였다.

마을이 개미목처럼 잘록하게 생겨 항월(項越, 項月)로 표기했지만 주민들은 ‘목냉기’라고 한다. 칠산바다를 향한 큰목냉기는 대항월, 법성포을 향한 작은목냉기는 소항월이라 부르는 전통선박들이 정박하기 좋은 천연포구였다. 목맥언으로 물길이 막히면서 걸어서 법성으로 오가는 길이 수월해졌다. 지금은 차들이 달린다. 자갈금에서 해안쪽으로 돌면 백제불교 최초의 도래지이고, 법성포 선창 다랑가지이다.

다랑가지에도 파시가 있었지만 진짜는 작은 목냉기 파시다. 참죽나무 잎이 파릇파릇 나기 시작하면 작은목냉기에 아가씨들이 들어와 삼치파시가 끝날 때까지 머물다 떠났다. 일부 상인들은 조기파시가 끝나면 연평도로 조기를 따라 올라가기도 했다. 마을주민들은 술집을 반기지는 않았지만 조기를 따라 어김없이 찾아왔다.

조기는 안강망과 유자망으로 잡았다. 안강망 조기배는 사리에 조기를 잡고 조금에 포구로 들어오지만, 유자망 투망배는 반대였다. 달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번갈아 드나들었기 때문에 목냉기 작부들 몸단장은 쉴 새가 없었을 것이다. 어장을 챙길 때는 ‘여자들 옷고름 돈도 끌러다 쓸 정도로 돈이 말랐다’지만 조기잡이가 시작되면 법성포에는 돈이 굴러 다녔다. 그만큼 목냉기 불빛도 밤늦도록 꺼질 줄 몰랐다.

이제 조기는 이제 칠산바다가 아니라 육로로 들어온다. 제주도 남쪽에서 겨울을 나며 잡힌 조기는 목포, 여수로 들어오면 법성포로 가져와 염장을 해서 굴비로 변신한다. 옛날처럼 소금을 뿌려 염장을 하고 걸대에 걸어 말리지 않는다. 물간을 해서 곧바로 냉동실로 들어가 보관된다. 목냉기에 정박해 있는 배도 몇 척되지 않는다. 칠산바다로 나가 병어, 꽃게, 장대를 잡는다. 언제까지 없는 조기만 기다릴 수 없다. 남은 것이라도 잘 지켜야 한다. 텅빈 바다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지 않는가. 마침 고급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더니 트렁크를 열고 큰 닻을 실었다. 민어를 잡으로 가는 법성포 주민이다. 민어는 살아있는 중하를 좋아해 잡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칠산바다에 조기는 사라졌고, 굴비는 제주에서 잡은 것으로 대신하지만 장대와 민어와 병어가 남아 있다. 꽃게도 잡힌다. 없는 것 찾지 말고 있는 것 잘 지켜야 한다. 장대마저 사라지고 텅빈 바다에 플라스틱만 둥둥 떠다니면 어떡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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