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바다이야기
두 가지 바다이야기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3.05.0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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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어느 교수의 해양사 인식

어느 교수의 해양사 인식 

“여러분들이 적(籍)을 두고 있는 이 대학의 뿌리에는 콩알보다 작은 후추 알갱이가 있습니다.”

한국해양대학교가 개강한 ‘월드비전 21’ 특강에서 필자가 한 말이다. 그 강좌는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일축을 담당할 해기사 지망생들에게 보다 폭넓은 사상과 이념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개설된 매우 의욕적인 커리큘럼 가운데 하나다(그 강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필자가 그 강좌에서 대학의 뿌리를 후추에 비견한 것은 그 알갱이를 획득하기 위해 일단의 해양모험가들이 산지(産地)인 동양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건 항해에 도전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향기롭고 맵싸한 후추는 생강·계피·육두구·정향(丁香) 등과 함께 우리의 미각(味覺)을 북돋우는 향신료 가운데 하나다. 옛적부터 육식성 음식을 선호해 온 서양인들은 그 알갱이를 황금 이상의 값어치로 거래했을 만큼 귀히 여겼었다. 그만큼 후추 값이 고공행진을 한 것은 그 열매가 인도 등 동남아 열대 지방에서만 산출된 반면 유럽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처럼 최고급 향신료인 후추가 유럽에 소개된 것은 지리상 대발견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간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여행기를 통해 인도와 중국 등 낯선 나라에 황금과 향신료가 지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후 유럽인들의 관심은 온통 동양으로 쏠리게 된 것이었다. 

가자! 동양으로!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살아 돌아온다면 평생을 먹고 살 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그게 당시대인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동양으로 가는 길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당시 동양으로 가려면 오로지 흔들리는 낙타의 잔등에 의지한 채 수만리 길의 아라비아반도와 이란고원이 중첩된 실크로드(Silk Road)가 유일했는데, 비단길이라는 화사한 명칭과 달리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열에 하나가 어려울 만큼 험난하고 모험적인 죽음의 길이었다. 그 결과 세상 땅끝인 이베리아 반도 해안에서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대서양)를 바라본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 일단의 선각자들은 ‘저 바다를 건너면 필시 동양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죽음의 여로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게 곧 지리상 대발견에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바다라고 해서 안온하고 편안한 여정이 아니었다. 지금도 달라진 게 없지만, 바다야말로 도도한 고집과 거부로 한사코 인간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은 경외의 대자연이 아니던가. 그 과정에서 도전자들은 조선기술 개발과 지도제작 등 관련 분야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고, 함께 항해술도 발달하면서 오늘날처럼 그들의 물레바퀴(조타륜)로 세계가 하나가 되는 ‘대해양 시대’가 개막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한국해양대가 자리하고 있다는 정의(定議)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강좌를 들은 K교수는 ‘작가 선생님이 우리 대학을 후추가루와 연관 짓고 있다’는 식으로 우회적 비판을 내놓았다. 도대체 우리 대학의 자랑스러운 역사 속에 웬 뚱딴지같은 후추 알갱이인가, 하는 불만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강정마을 

계절은 어느덧 상큼한 냄새의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다. 쉼 없이 굴러오는 파도에 발을 담그고도 싶고, 호화 크루즈선의 승객이 되어 세계의 바다를 주유하고도 싶은 계절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구온난화 덕분에 제주도는 아열대권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곳 정취 어린 남국에도 어김없이 여름의 전령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면 우리들은 그곳 강정마을에서 세계의 바다로 떠나는 크루즈선을 탈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세계의 바다는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 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현장은 퍽도 우울했다. 이른바 벼랑끝 전술로 나라의 평화를 저해하는 북한군의 공갈도 흐지부지한데, 난데없이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퍼지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수년 전부터 국방부는 우리의 해양영토 수호를 위해 해군기지를 확보하기로 하고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순조롭지 않았다. 일부 마을사람들이 환경보전 등 당치도 않은 이유를 내세우며 한사코 벌인 반대시위 때문이었다. 거기에 아무 관련도 없는 전문 시위꾼들이 합세하면서 갑(甲)과 을(乙)이 뒤바뀌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덩달아 주민 눈치 보기에 급급한 당해 지자체마저 어정쩡한 행보를 보이는 바람에 공사는 뒤뚱뒤뚱 오리걸음이었다. 

한시가 급한 국가적 사업인지라 국방 당국은 온갖 과학적 자료를 뒷받침한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이의 타당성을 설득한 끝에 드디어 지난해 제주도로부터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법적·행정적 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지난달 초순, 필자는 제주도를 방문하는 기회에서였다. 젊은 시절, 연근해 선망선(旋網船)에 승선하는 동안 자주자주 기항하여 정도 든 곳이었다. 성산 일출봉이며, 올레길이며 민속촌 등은 예전 그대로의 향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그 순간까지도 관광미항 공사장 입구에는 여남은 명이나 되는 외부 시위꾼들이 진입로를 점거한 채 여전히 공사를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 행투도 가관이었다. 

- 강정마을을 지켜주세요. 

의자와 책상으로 만든 바리케이드에 써 붙여진 신물나는 구호였다. 도로 한복판에는 아름드리 통나무가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그 용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바로 그 너머로 20여 대에 달하는 화물차와 레미콘 차량이 마치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도라산에서처럼 시동을 끈 채 제지선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물차에는 공사에 필요한 각종 자재가 하나 가득 실려 있었다. 시위꾼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씩 시간을 정해 화물차의 진입을 허용하는 해괴한 방식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는 600여 명의 경찰과 전경대원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댄 것은 바로 그 직전이었다. 하지만 허겁지겁 달려 나온 마을주민이라야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드디어 시위꾼들이 뒤로 물러섰다. 약속시간이 된 때문이었다. 그들이 허락한 시간은 겨우 10여 분간이었다. 줄지어 섰던 차량들이 모두 공사장 안으로 들어가자 바리케이드는 다시 구축되었다. 

해괴한 일은 다시 벌어졌다. 다시 통나무 더미가 도로 한가운데를 점거한 순간 한 대의 화물차가 허겁지겁 달려온 게 그것이었다. 시위꾼들은 그러나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운전사의 허망한 표정이라니! 

그 같은 시위꾼들의 월권적 어거지로 공사가 재개된 2011년 9월 이후 지금껏 공사업체들이 입은 피해액이 무려 300억 원도 넘는다는 관계자의 말이 수긍이 갔다. 

다시 바리케이드 설치가 완료되자 경찰은 가까운 마을 운동장으로 철수해 장구를 벗어던진 채 이리저리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필자는 ‘저러니 불법 시위꾼들이 공권력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물의가 일자 경찰은 최근 한 사람을 구속했다). 

참으로 암울하고 울분이 솟구치는 광경이었다. 낯선 이방인(필자)을 흘겨보는 그들의 눈매도 범상치 않아 절로 오금이 저렸다. 도대체 이곳이 국기보전(國基保全)의 최대 책무로 삼은 국가 공권력의 자유대한민국 땅이 맞단 말인가. “우리나라 성냥은 불도 잘 켜지지 않아요”라는 한 마디로 정치범이 된 어느 러시아인이 처넣어진 독재자 스탈린 시대의 강제수용소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자유 대한민국을 향해 연일 막말을 퍼붓고 있는 북한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강정마을 사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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