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⑯ 어업유산과 농업유산의 에코뮤지엄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⑯ 어업유산과 농업유산의 에코뮤지엄
  • 김준 박사
  • 승인 2019.06.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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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

[현대해양] 청산도의 봄이 지났다. 섬도 바다도 검푸른 색으로 짙어지며, 여름이 달려가는 중이다. 밀물처럼 몰려오던 여행객들도 발길 잦아들고, 하루에 3,000여 명이 몰려들었다는 도청리 파시골목은 고양이만 일광욕 중이다.

“저 건너편에 보면 작은 바위굴이 있지요. 전복 아파트 실고 비나가는 배 뒤로 검은 구멍이 보이잖아요. 그곳에다 얼음을 보관해 파시 때 사용했어요.”

파시의 흔적이다. 냉장고는 물론 소금도 귀했을 시절이다. 빨리 상하는 고등어나 삼치를 보관하기 위해 얼음이 절실했을 것이고, 소금으로 초벌간만 해서 간독에 보관했을 것이다. 뒷골목에 간독 자리만 촌로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방치되고 있는 어업유산의 현장 ‘파시’ 골목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 청산도의 관문이다. 1949년 5월 31일 ‘동아일보’에 청산도 고등어잡이 기사가 올라왔다. ‘6월 중순의 고등어 성어기를 앞두고 거문도 초도 청산도 어민들은 만단의 출어 준비를 갖추고 대기’ 중이며, ‘건착망선 20척과 운반선 15척이 출동’하여 매일 약 10만 킬로그램이 잡힐 것으로 예측한다는 것이다. 그보다 앞선 1937년 11월 5일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청산도 근해에 삼치, 고등어잡이는 매년 육칠월간에 성히되고 8월만 되어도 어군을 보기 힘든 것이 통례인데 올해 역시 8월 한하고 모든 기관을 철폐하였는데 해양 수온의 변조로 인하여 때 아닌 9월 30일 경에 삼치의 떼가 동도 근해에 쇠도 하야 바닷물이 변할 만치 되었다는 좋은 시식을 접한 동해조 대곡조 대립조 빈강조 등의 삼치 배가 급행을 하여 이틀 동안 약 58만미의 풍획을 보았다는 바 지금도 계속하여 잡고 있다고 한다. 수온의 변화로 철지난 삼치 고등어 떼가 청산도 근해에 출현하여 풍어를 기록했다는 내용이다. 고등어나 삼치 파시를 잘 설명하는 기사다. 고기잡이배와 선원들이 몰려들자, 도청리에 잡화점, 여관, 수협, 고등어를 염장해 보관하는 간독, 어판장, 여관, 술집, 유곽까지 들어섰다. 성어기에는 하루에 약 3,000여 명이 오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 고등어파시는 건착망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어 한국전쟁 이후 삼치파시로 이어졌다.

파시문화의 거리를 만들고 면사무소를 개조해 느림카페와 갤러리까지 만들었지만 이곳을 기웃거리는 여행객은 별로 없다. 검은 고양이 두 마리만 진한 등나무꽃 향기에 취해 볕 좋은 돌담 위에서 졸고 있다.

 

세계농업유산 1호 ‘구들장논’

청산은 고기잡이 섬이 아니라 농사짓는 섬이다. 지금도 마늘과 벼농사가 중심이다. 특히 부흥리, 양지리, 청계리, 상서리 등은 바다가 없다. 마을어장이 없어 오롯이 구들장논에 의지해 수백 년을 살았다. 마을 앞에 있는 물길이 좋고 개답을 하기도 수월한 문전옥답은 초기 정착민들이 차지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산 아래 비탈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다. 흙 한 줌에 돌이 한 산태미인 자갈밭을 밭도 아니고 논을 만드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물은 귀하고 흙은 적고 자갈과 돌이 많은 최악의 조건이 만들어낸 것이 ‘방독논’이다. 구들장논이라 부르는 청산도 논이다.

구들장논은 크게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밑의 하부축은 1-1.5m정도 굵은 돌을 넣어 다진다. 최고로는 3m까지 쌓았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돌이 운반했겠는가. 그 위에 20-30㎝정도로 작은 돌과 흙으로 버무려 물이 빠지지 않도록 덮는다. 이를 ‘밑복굴’이라 부른다. 마무리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좋은 흙으로 20-30㎝를 덮는다. 이를 ‘윗복굴’이라 한다.

핵심은 하부축에 물길(통수로)를 만들고 구들을 놓는 납작한 돌을 얹어 수로를 만든다는 점이다. 다랭이논과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양지리에서 만난 임노인은 ‘구들장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1982년 대홍수때 논이 무너져 내려 안을 보니 꼭 구들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기억했다.

구들장논은 폭을 넓게 할 수 없다. 주변에서 돌과 흙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멀리 운반하기 어려웠고, 하부축이 지탱하기 어려웠다. 산비탈을 따라 길게 구불구불 만들어진 이유다. 지금도 트랙터 등 무거운 농기계로 작업을 하려면 조심스럽다고 한다.

구들장 논의 핵심은 통수로이다. 통수로는 물을 공급하는 역할, 홍수방지, 저수지 역할을 한다.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된 후 외국인도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덩달아 무논에 자라는 긴 꼬리투구새우, 메뚜기, 소금쟁이, 미꾸라지까지 대접을 받고 있다. 동부천을 따라 펼쳐진 구들장논, 마을, 갯벌, 바다로 이어지는 모습은 청산인이 400년 동안 지키고 가꾸어온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경관이다.

구들장논은 국가농업유산으로 지정된 후 세계농업유산에도 등재되었다. 하지만 보전 및 관리는 거의 방치수준이다. 지난해부터 주식회사 명소(대표, 황길식)에서는 지역주민으로 이루어진 구들장논보전회와 함께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 구들장논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묵논으로 바뀐 논의 잡목을 풀을 베어내고 유채를 심었다. 앞으로 구들장논의 생태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모니터링과 연구를 지역 학생들과 함께 준비 중이다.

 

산 자를 위한 씻김, ‘초분’

구들장논과 함께 청산에서 살펴야할 것은 초분이다.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 초분이 청산에서는 지속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중흥리 한 집안에서는 망자를 문중 산에 들이려면 반드시 초분을 거쳐야 한다. 아예 초분을 하는 자리(덕대)를 만들어 놓았다.

초분은 관을 돌이나 통나무 위에 얹어놓고 이엉과 용마름으로 덮어 놓는 임시무덤이다. 초빈, 빈소, 촐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땅에 묻지 않고 풀로 무덤을 만들어 초분(草墳)이라 했다. 초분을 한 후 사정에 따라 몇 년 후, 유골을 수습해 땅에 묻는 것을 ‘원장’ 혹은 ‘본장’이라 한다. 이러한 장례풍습을 두 번 장례를 모신다고 해서 복장제 혹은 이중장제라 부른다.

청산도에는 전시용 초분을 만들어 전통장례풍습을 여행객에게 설명하고 있다. 초분을 자식의 마지막 도리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산 자의 씻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들장논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초분이 되어 자신이 일궜던 구들장논 곁에 묻혔다.

청산도는 구들장논, 초분, 돌담 그리고 어업문화유산이 꽃인 파시까지 모두 갖춘 보물섬이다. 어느 섬에 이렇게 섬살이의 유산이 모두 갖춰 진 곳이 있던가. 그런데 겨우 돌담 정도만 관광자원으로 접근할 뿐 섬살이의 오래된 미래 무형유산에 대한 관심은 초라하다.

슬로시티라는 구호만 요란할 뿐 그 가치를 찾는 여행은 없다. 더 많은 여행객을 불러오기 위한 이벤트만 난무하고, 섬은 관광상품을 위한 대상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섬살이에 대한 존중없이 관광지가 되어가는 슬로시티 청산도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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