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3.04.05 15: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海洋文學 순례 ①②

 1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태평양을 안은 섬나라 일본은 그 지리적 특성으로 진작부터 해양강국으로 부상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중세 이래 지속된 바쿠후[幕府] 체제의 폐쇄적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그 기회는 매우 늦어졌다. 그 역사적 진행은 조선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미국 등 유럽 어려 나라가 통상(通商)을 구실로 문호개방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강권하기에 이르자 일본은 더 이상 봉건적 사회구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가 에도(江戶) 시대인 1853년, 조용하던 일본의 도쿄 만에 느닷없이 출현한 거대하고 괴상하게 생긴 일단의 괴물체였다.
  “큰일났다! 봐라! 연기를 내뿜는 용이 나타났다!”
  미 해군 기록에 의하면, 등덜미로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물체가 나타나자 이를 본 일본인들은 이거야말로 신화에서나 봄직한 흑룡(黑龍)이 분명하다며 밭을 매다 말고 쇠스랑도 내던진 채 줄행랑을 치는 희대의 난리를 연출했었다(본지 2011년 8월호 <한국 어민사> 참조).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그 무시무시한 괴물은 용이 아니라, 쇠로 만든 증기선 ‘미시시피’ 호 등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의 네 척 군함이었다. 그 결과 미국 함대는 포 한 방 쏘지 않고 도구가와(德川) 막부를 압박하는 데 성공, ‘미·일 화친조약’을 성사시킴으로써 BC 4천 년 이래 조몬(繩文)과 야요이(彌生)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굳게 닫힌 문(門)을 활짝 열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개막과 함께 각종 무기를 비롯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운 나머지 대륙침략이라는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가속화시킨 사건이 곧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이었고, 그 전투에서 승리하자 일본 식 자본주의를 표방한 제국주의(帝國主義) 체제가 굳어지면서 이후 본격 해양진출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너무 앞서 나간 나머지 필경 미국과 영국 등 유럽연합 제국과의 대립을 자초함으로써 마침내 일본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른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전쟁은 4년만인 1945년 8월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한 발씩의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마감되었는데, 그 직후 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나오면서 패전국의 멍에를 뒤집어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반대급부로 해운과 조선 및 수산업 부문 등 전 해양 분야를 통틀어 비로소 일본은 지형적 특성을 살린 본격 해양시대에의 개막에 불을 붙이는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필자가 이처럼 일본의 현대사를 장황하게 되짚는 것은 그 과정이야 어떠하든 오늘날 보이고 있는 일본국의 제반 상황이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하나도 뒤질 게 없는 강대한 해양국가의 하나가 분명하다는 현실론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특히 문학(文學)이란 한 시대의 적나라한 투영(投影)임이 분명하다면 지금까지 반세기도 넘는 연륜의 일본의 해양력을 고려할 때, 필경 주목할 만한 해양 소재(素材)의 작품이 상당수 존재할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도 저버리기 어렵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참담하였다. 일찍이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설국(雪國)>으로(1968년), 그리고 뒤이어(1994년)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만년원년(萬延元年)의 풋볼>로 대망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력의 일본문학계가 제대로 된 해양문학을 갖지 못하고 있어서다. 그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지금과 같은 일본의 절름발이식 문학 족적은 그렇다면 아직도 일본의 해양역사가 일천(日淺)함에 근거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다소 도전적이지 못한 일본작가들의 소극적 대응 때문이란 말인가. 다시 말해 해양문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본지를 통해 소개된 멜빌이나 헤밍웨이, 혹은 조셉 콘래드의 예에서 보듯, 그것을 쓰려는 작가가 일정 수준의 실체험을 갖지 않고서는 그 범접이 전혀 불가능할뿐더러, 그렇지 않더라도 바다에서 극한의 사투를 벌인 어느 누구로부터의 엿들은 귀동냥이라도 가져야만 가능하다는 진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문학에서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달에 논하려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파도소리>가 그 하나다. 하지만 독자들도 곧 알게 되겠지만, 과연 이 작품을 해양소설의 하나로 지칭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2

  <파도소리> 도입부는 이렇다.
  - 인구가 1,400명 정도인 이세 만(灣)의 ‘우타’섬은 둘레가 400미터 남짓한 아주 작은 섬이다.……
  이어서 섬의 지리적 특유함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는데, 그 섬에서 경관이 가장 수려한 곳으로는 뱃길을 안내하는 언덕 위 등대(燈臺) 일대라고 하면서, 그곳 등대장은 드나드는 모든 선박의 움직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고베나 나고야 항만 당국에 전달함으로써 항해의 안전도모는 물론 원활한 화물의 양륙과 선적작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첫 장부터 이야기 전개가 이러할진대, <파도소리>는 일본이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뿜어낼 또 다른 내용과 형식의 해양작품이 틀림없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 어느 날 해질 무렵, 어부 하나가 큼지막한 넙치 한 마리를 들고 등대로 향하는 산길을 올라간다. 신지(信二)라는 이름의 열여덟 살 난 문어잡이배 어부로, 지난 해 학급 성적이 나빠 유급될 처지에 놓였으나 그렇게 되면 과부 해녀인 어머니 생계가 더욱 막막해진다고 판단한 등대장 부인이 교장에게 청원하여 가까스로 졸업장을 받아 낸 그렇고 그런 평범한 청년이었다(그 청년의 아버지는 종전을 앞두고 죽었다). 청년 어부는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매번 어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별도로 챙긴 싱싱한 물고기를 등대장 부인에게 선물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문어잡이 어부의 일생을 확 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이게 소설 아닌가?).
  섬마을에서 두 척 화물선을 운용하는 선주 미야다 테리요시라는 영감에게는 원래 네 명의 딸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딸이 너무 많다하여 막내딸(하스에)을 건너 마을 해녀에게 양녀로 보낸 다음 잇달아 딸이 모두 시집을 가고 설상가상 외동아들이 병사하자 너무 고적하다 하여 하스에 양을 복적(復籍)시켜 노후의 하루하루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영감은 마땅한 사윗감이 나타난다면 혼사를 치른 다음 통째 해운사업을 맡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문어잡이 어부 신지와 야스오라는 청년회 지부장 사이에 치열한 사랑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상황은 야스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그는 틈만 나면 건너 육지로 넘어가 부둣가 술집 작부와 놀아나는 난봉꾼으로도 소문났다). 딸이 귀환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에 선주 영감이 야스오를 초대한 게 그것. 그래서 마을사람까지도 머지않은 장래에 야스오가 선주의 데릴사위가 될 것이라 추측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인연이란 묘한 것. 땔감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신지가 어디서인가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보니 말로만 듣던 하스에가 아닌가. 그녀는 교사 출신인 등대장 부인의 예절강습에 참가하는 길에 남은 시간을 산책에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만 것. 그녀를 본 문어잡이 어부는 가슴이 울렁거렸고, 수인사를 나눈 끝에 길을 찾아주기까지 하여 두 사람은 자연 가까워졌다. 그 뒤로 신지는 그녀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거기에 또 다른 인연이 개입한다. 월급을 탄 신지가 집에 돌아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봉투가 없다. 이름이 적힌 봉투를 하필이면 착한 하스에 양이 발견하였고, 주인을 찾아 그녀가 신지네 집을 찾은 것은 둘 사이의 다른 행운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남몰래 한적한 곳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신지는 그녀와 폐허로 남은 사격 관측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도중에 비를 만나 후줄근하게 젖어버린 몸을 말리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는 쪼그려 앉았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한참 후 눈을 뜨고 보니 모닥불 건너편으로 발가벗은 하스에 양이 서 있지 않은가.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 몸매였다. 그녀 역시 비를 맞은 터라 옷을 벗어 말리던 참이었던 것이다.
  눈치 챈 하스에 양이 소리쳤다.
  “눈 뜨면 안 돼!”
  둘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왜?”
  “부끄러우니까.”
  “어떻게 하면 부끄럽지 않을까?”
  “너도 벗으면 되지.”
  스무 살이 다 된 두 남녀는 그렇게 철부지 말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결국 끌어안고 뒹굴기까지 하였으나 하스에 양이 시집갈 때까지 몸을 지켜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마. 난 너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고 있으니까.”
  그 와중에 마을 최고 난봉꾼이자 청년회 지부장인 야스오 녀석이 하스에 양을 범하기로 작정한다.
  섬마을은 원래 식수가 귀했다. 그래서 마을 처녀들이 돌아가며 물 당번을 서는데, 음흉한 야스오는 하스에 양의 당번 날 한밤중을 겨냥하여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이봐, 놀랐지?”
  “뭐야? 야스오 오빠 아냐?”
  “놀래 주려고 숨어 있었다.”
  한밤중 우물로 다가간 야스오는 당초 마음먹은 대로 하쓰에 양을 쓰러뜨렸다. 물통이 넘어지고 이끼 낀 땅을 적셨으나 야스오는 개의치 않았다.
  순간 야스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필이면 야생 벌 한 마리가 목덜미에 침을 쏘아버린 것(이래서 소설이다). 그럼에도 야스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다른 금색 날개(벌)가 야스오의 펑퍼짐한 엉덩이에다 침을 깊이 쏘아버렸다.……


  3

  어느 날 신지는 하스에 양 부친의 소유 화물선인 우타시마 호 선장으로부터 한 가지 제의를 받는다. 이제는 나이도 됐고 하니 큰 화물선에 견습생으로 승선하여 정식 선원이 되는 게 어떠냐는 것. 국내 여러 항구뿐만 아니라 오키나와까지도 항해하는 화물선 선원이 되면 수입 면에서도 그렇고, 장래성도 보장되니 어떠냐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연적(戀敵)인 야스오도 승선하게 되어 있었다.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출항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나온 가운데 하스에 양이 신지 어머니에게 자그만 꾸러미를 건넸다(그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챈 선주 영감이 한사코 만남을 제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출항한 다음 신지가 꾸러미를 열어보니 하스에 양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 신지 씨가 무사하도록 기도하겠어요. 제 마음은 신지 씨 것이랍니다. 함께 항해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드립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으셨지만, 야스오와 함께 배를 타도록 한 것은 무슨 생각이 있어서일 겁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부디 성공적인 항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무슨 말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으나 신지는 힘이 불끈 솟아났다.
  후쿠시마 항에서 목재를 실은 우타시마 호의 목적항은 오키나와였다. 그 동안 배는 여러 항구를 거쳤다.
  항해 도중 신지는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였으나 야스오는 그렇지 않았다. 청소를 빼먹거나 당직을 회피하는 등 게으름만 피워 눈총을 받았다.

  갑판장이 야단쳤으나 엉뚱한 말만 했다.
  “이번 항해가 끝나면 나는 어차피 테리요시 영감의 사위가 돼요. 그러면 이 배도 내 거란 말이요.”
  갑판장은 더 이상 다그치지 못 했다. 어쩌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배는 오키나와에 도착하여 목재를 풀고, 다시 철광석을 실은 다음 귀항 길에 올랐다. 이제 본토를 향해 신나게 달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기상이 심상치 않았다(이래서 소설이다). 역풍(逆風)에다 점차 파도가 높아지면서 수은주가 마구 하강했다. 풍속은 초속 25미터를 넘고 있었다. 워낙 해황이 거칠자 선장은 뱃머리를 들리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로 돌아온 배는 다른 포경선과 함께 바람이 잘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두 가닥 와이어로프를 부표에다 연결했다. 배는 이제 부표로부터 20미터 거리에서 파도를 타고 있었다. 밤이 깊어서도 기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포경선도 그랬지만, 우타시마 호도 조를 짠 선원들이 당직을 섰다. 탱탱하게 긴장된 로프를 지켜보는 게 그들 임무였다.
  밤 11시, 신지는 야스오와 함께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쳐 로프의 한 단을 풀리게 했다. 이제 로프가 끊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보고를 받고 나타난 선장은 추가로 하나의 로프를 더 연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누가 이 로프를 부표에 연결하겠느냐?”
  항해사도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험한 노도 속에서 무거운 로프를 끌고 수십 미터나 헤엄치는 건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어서였다. 자칫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때 신지가 나섰다. 그는 누구보다 수영에 자신이 있었다. 고향 마을인 우타 섬을 다섯 번이나 돌 만큼 그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신지는 곧 로프를 허리에다 묶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포경선 선원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풍과 노도 속에서 헤엄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숨을 참으면서 한참이나 허우적댄 다음 눈을 떠보면 부표는 여전히 아마득한 거리에 있었다. 바닷물을 떠먹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사력을 다한 끝에 드디어 부표에 다다랐다. 파래가 낀 부표는 여간 미끄럽지 않았으나 가까스로 로프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되돌아보니 배는 나뭇잎처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고 있었다. 신지는 손을 들어 작업을 끝냈음을 알렸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되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기력이 쇠잔한데다 바람이 더욱 거세진 때문이었다.
  “정말 잘 했다.”
  밧줄을 타고 배에 오른 신지의 어깨를 선장이 토닥여주었다. 선원들의 부축을 받고 침실로 돌아온 그는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폭풍우의 격렬한 아우성도 그의 잠을 방해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신지는 현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맑은 햇살을 보았다. 태풍일과 후의 쾌청한 하늘과 그 서광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그의 손에는 아리따운 하스에 양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배가 고베로 돌아온 것은 추석도 며칠이나 지난 때였다.


  4

  귀항하자마자 신지는 예전의 문어잡이배를 타고 다시 어장으로 나갔다.
  “네 공적이 이만저만 아니더군.”
  문어잡이배 선장은 화물선 선장으로부터 신지의 영웅적 활동을 익히 듣고 있었다. 신지는 그냥 뒷머리만 조금 긁었을 뿐이었다.
  등대장 부인은 이미 신지와 하스에와의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천생연분, 아니면 천정배필이라던가. 두 사람의 인연을 신의 뜻이라 여겼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테리요시 영감이 난봉꾼 야스오를 사위로 점찍고 있다는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건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등대장 부인은 담판을 짓기 위해 영감 댁을 찾았다. 그 뒤를 해녀 다섯이 따라붙었다. 모두 신지 쪽을 응원하는 우군(友軍)들이었다.
  “아, 등대장 부인이시군요.”
  가운 차림의 영감이 등대장 부인을 맞았다. 손에는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미인도 그림의 부채가 쥐어져 있었다.
  “다름 아니라 댁 따님 하스에 양과 신지 군과의 이야긴데요.……”
  그 말을 들은 영감이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 말이라면 벌써 정한 바 있소. 내 뜻은 이렇소. 신지 군이야말로 내 딸의 신랑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요.”
  마당에서 영감의 말을 들은 해녀들 모두 소리 안 나게 박수를 쳤다.
  “아직 나이가 있는지라, 우선 약혼이라도 성사시킬 생각이오. 처음에는 성에 차지 않아 둘 사이를 갈라놓았는데, 이상하게도 딸이 점차 기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소? 나는 그 이유를 얼른 알아냈소. 딸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일 아뇨? 그래서 마음을 돌리기로 했소. 다만 한 가지 시험을 거친 다음에요. 그건, 신지와 야스오를 견습생으로 함께 내 배에 타도록 하여 모진 항해를 하는 동안 둘의 의지나 열성이 어떠한가를 재보기로 한 거요. 그래서 은밀히 화물선 선장에게 지시했소. 그런데 항해를 마친 선장이 대세를 결정짓게 만들었소. 신지 청년에게 흠뻑 반했다고요.”
  그러면서 영감이 덧붙인 말은 이랬다.
  “남자는 무엇보다 강인함과 신념이 최대 무기요. 그거만 있으면 이 세상 어느 험한 파도도 이겨낼 수 있소. 우리 우타 섬의 남자라면 더욱 그렇소. 그래서 신지에게 딸을 주기로 한 거요.”


  5

  자, 그렇다면 한적한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일본작가 미시마의 이 소설은 해양소설일까, 연애소설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저 한가한 어촌소설일까.
  1925년 1월, 도쿄 신주쿠에서 태어난 작가의 본명은 히라오카 키미다케(平岡公威)였다. 그러나 중등부(구제 5년제) 시절부터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라는 필명을 쓰며 <꽃이 만개한 숲> 등의 단편소설을 써 문예지에 발표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종식 전해의 열아홉 나이에 같은 제목의 창작집을 출간한 다음 그 1년 후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대대로 관료 집안 출신인 그는 부친의 권유를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전 열한 살이던 1936년 2월, 1천여 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벌인 ‘2·26 군사 쿠데타’가 그의 앞날을 확 바꾸어버렸다. 청년장교들은 만연한 특권계급을 없애고 천황을 받들어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며 자신들의 뜻을 천황에게 전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원대복귀하라는 천황의 명령으로 쿠데타가 미수로 끝나면서 주모자는 육군상 관저에서 ‘하라기리(割腹)’로 자결한 데 이어 나머지는 투항하거나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사건을 주도한 기타 잇키(北一輝)라는 자는 일본 극우파의 창시자로 꼽힐 정도로 억세었으나 정작 사형을 당할 때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고 한다.
  소년 미시마는 그 사건을 후일 <우국(憂國)>이라는 작품에 담았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충격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마흔 다섯의 한창 때이던 1970년 11월 25일, 스스로 하라기리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결말의 주인공이 된다. 그나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외침은 ‘평화헌법의 철폐’였다.
  앞서의 <우국>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이후 <검(劍)>과 <나의 벗 히틀러> 등 다분히 파쇼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 말고도 허다한 문학적 유산을 가진 그가 철폐를 요구한 평화헌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독자들은 최근 들어 거푸 외신 타이틀을 장식하고 있는, 극우 성향의 일본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일본헌법 제 9조 개정안에 대한 주장을 접했을 것이다. 그게 곧 미시마가 말한 평화헌법인 바,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으로 영구히 포기한다’는 조문은 1항을 장식하고, ‘육·해·공군은 물론 그 외의 전력도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2항에 압축되어 있다. 그 내용대로라면 일본은 원천적으로 군대보유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법에 의거, 일본은 가령 타국 군대가 자국으로 진주하는 등으로 주권을 침해당하더라도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할 뿐 군사적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작가 미시마와 같은 군국주의의 부활과 그 융성을 획책하는 극우파들로서는 헌법개정이 필연적이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고, 그 주장을 다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배를 가르는 할복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이었다.
  일본의 평화헌법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기 며칠 전(1945년 7월 26일), 미국(트루먼 대통령)·영국(처칠 수상)·소련(스탈린 서기장) 등 3개국 정상은 일본이 항복할 것과 대전 종식 후의 대처 문제 등을 담은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었다. 그 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와 함께 △군국주의의 배제 △일본군 무장해제 △전쟁 범죄자 처벌 △군수산업 동결 등 모두 13개 항에 달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럼에도 일본은 ‘최후의 1인까지’를 외치며 결사항쟁으로 저항하자 부득불 원폭이 투하되었고, 그 때서야 천황의 항복담화에 이은 포츠담선언에 따라 육군과 해군이 해체되면서 일본은 그만 군대를 갖지 못한 나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그 같은 공백상태로 일본 치안이 문제가 되자 맥아더 원수는 경찰예비대(7만5천 명 규모)와 해상보안청(8천 명)의 설치를 허가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게 일본 군부의 재정비 신호탄이었다. 곧 1951년 9월, 대일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체결로 주일미군이 일부 철수하는 것과 함께(54년 6월) 새로이 항공자위대가 추가되면서 육·해·공 3개 자위대 체제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역사가 말하는 그대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파도소리> 작가 미시마가 스스로 극우 편에 서면서 서서히 <우국>의 주모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계속 많은 작품을 양산해 온 그는 마흔 둘이던 1967년 봄 자위대 체험입대를 자청하였고, 이듬해에는 천황을 옹위하기 위한 ‘방패의 모임’을 결성했다. 그런 다음 1970년 11월 25일, 동경 주재 자위대 총감실을 점거한 다음 자위대 대원들에게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충동하였으나 지지를 얻지 못 하자 30여 년 전 2·26 쿠데타의 주모자처럼 예리한 칼로 배를 가르는 하라기리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특별한 승선경력이 없는 그로서 이만큼이나마 해양 혹은 항해를 주제를 한 작품(<파도소리>)을 소화해낸 것은 놀랄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의 짧은 생애는 치밀하게 계산되고 정연히 구획된 그만의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명료하고 광기에 가까운 낭만주의가 자웅동체처럼 동거해 왔었다고. 그런 시각에서 <파도소리>가 해양소설로서 다소간 함량이 부족할지라도 그에 대한 연구는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와 관련한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해양역사와 견주어 적어도 십 수 년이나 뒤지는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해양문학의 주소는 과연 어디까지 와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다. 이에 답변은 의외에도 간단하다. 고맙게도 한국문단은 일본과 달리, 금세기 들어 경이로울 만큼 수많은 해양문학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여간 고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한 고찰은 본 연재물의 최종회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을 약속한다.
  이에 덧붙여, 우리 독자들은 한국 해양문학의 본격적이면서 화려한 개화를 위해 보다 많은 관심과 성원을 아끼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전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