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⑮ 열강이 탐한 절해고도, 이젠 ‘쑥밭’이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⑮ 열강이 탐한 절해고도, 이젠 ‘쑥밭’이다
  • 김준 박사
  • 승인 2019.05.0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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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현대해양] 오늘 숙소는 ‘해밀턴입니다’. 가이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해밀턴’이라니. 거문도가 영국을 비롯해 외국에 알려진 이름이 해밀턴이 아닌가. 180여 년 전 영국함대가 거문도에 들어왔다. 2년여 세월을 거문도에 무단 점거하고, 주민들에게 인건비를 주며 기지를 구축해 조사하여 기록했다. 영국만 아니다. 러시아 함대도 머물다 갔지만 조선 정부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알고 나서 조치를 취한 것도 함대가 떠나고 난 뒤였다. 영국과 러시아가 물러간 뒤에 거문도를 차지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강들이 앞 다투어 거문도를 탐냈을까.

거문도는 옛날부터 삼도, 삼산도, 거마도로 불렀다. 이중 고도는 무인도였다. 일본인이 들어와 이주어촌을 만들고 치안과 행정을 위한 시설을 조성하면서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서도에 덕촌, 변촌, 장촌이, 동도에는 유촌, 죽촌 그리고 고도가 있다. 이를 합해 거문리라고 한다. 고도와 서도는 1992년 다리가 연결되었고, 동도와 서도를 잇는 다리는 2018년 완공되었다. 세 섬에 안고 있는 호수 같은 바다를 ‘도내해’라고 한다.

 

절해고도, 제국의 불을 밝히다

거문등대는 일본의 조선침략과 제국주의의 야욕이 만들어낸 불빛이었다. 거문도와 동도와 서도의 세 섬으로 둘러싸인 ‘도내호’는 최적의 어항이지만 일제에게 이보다 좋은 군항은 없었다. 주변 바다에 고등어와 삼치가 지천이니 일석이조였다. 거문도를 두고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이 앞 다투어 거문도를 탐한 이유가 있다. 해가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은 해양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조선 지도까지 준비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그 중요성을 깨닫기 전에 러시아도 호시탐탐 거문도를 노렸다. 거문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방인은 왜구였다. 다만 이때는 선박크기에 따라 세금을 바치고 정해진 뱃길과 어장을 이용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고기잡이를 허락해 주었다.

일본은 군대와 물자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서도의 수월산(128m) 남쪽 끝자락에 거문도 등대를 세웠다. 뱃길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시절에 암초를 피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항해를 하고 정박할 수 있는 곳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중요했다. 영국이나 러시아나 거문도를 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보다 한 수 위였다. 영국군이 주둔하던 때도 수산물과 생필품을 파는 영특함을 보였다. 영국군이 물러가자 고도에 일본인 이주어촌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사전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통해 수산자원을 면밀히 조사했다. 러시아와 영국이 서로를 견제하며 군사적 목적이 앞섰다면, 일본은 여기에 더해 조선식민이라는 야욕이 더해졌다. 학교도 만들고 신사도 만들고 서도에 있던 면사무소도 옮겼다. 그리고 일본인 이주어민의 안전을 위해 순천경찰서 거문도파견소도 설치했다. 이어 일본수산회사가 들어와 고등어와 삼치 등 수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갔고, 1918년에는 거문도 어업조합이 설치하여 주변 어장도 완전히 장악을 했다. 목욕탕과 유곽을 설치하고 수산물 가공공장도 만들어졌다. 여행객들은 잘 찾지 않지만 멀지 않는 곳에 일본인 신사 참배터가 있다. 일제는 거문도를 ‘다까라시마(寶島)’라고 불렀다. 일본인에게는 보물섬이다. 삼도 사이의 바다는 수심이 10미터가 넘는다. 천연의 양항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안전하게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거문도항(1938)도 완공하였다.

유촌과 죽촌 사이에 보기 드물게 바위를 뚫어 만든 동굴이 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일본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솔로몬제도에서 북마리아제도까지 태평양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시설물을 만들었다. 거문도에도 고도에 반공호와 서도 불탄봉의 참호시설과 함께 동도에 특공정(자살특공대) 동굴 등이 산재해 있다. 제주도 송악산과 수월봉에도 같은 기지들이 만들어졌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거문도에 일본 해군은 물론 육군까지 주둔했고, 곳곳이 군사기지가 되었다.

‘거문’ 이름으로 사는 식물들

삼도교를 건너면 서도로 이어진다. 거문도등대와 녹산등대가 남북으로 자그마치 직선으로 7㎞에 이른다. 거문대교가 완공되어 동도까지 걷는다면 세 섬은 총 10㎞를 훌쩍 넘는다. 1박2일로도 사실 부족하다. 이틀 밤 정도는 자면서 섬을 살펴야 한다. 힘들게 날씨와 시간을 살펴 힘들게 거문도에 들어와 후다닥 여행을 하고 돌아서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거문도에 들어와 날씨가 좋으면 곧바로 백도유람을 하고 다음날 거문도등대를 보고 나간다. 당일 날씨가 여의치 않으면 다음날 백도유람을 하고 우선 거문도 등대를 걷는다. 자투리 시간에 영국군묘지를 살펴보는 것이 끝이다. 이젠 거문도 여행패턴도 바뀌어야 한다.

서도에는 덕촌, 변촌, 장촌 세 마을이 있다. 중학교가 있는 덕촌이 가장 큰 마을이다. 덕촌 마을 뒤로 불탄봉이 있다. 국립공원 주요 탐방로이다. 거문도등대로 향하는 날, 휘파람새가 방향을 알려줬고, 운 좋게 황금새가 앞장을 섰다. 겨울과 봄에는 동백꽃이 만발하고, 봄과 여름에는 하얀 찔레꽃과 참나리가 반긴다. 동백 터널로 이루어지는 숲길은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세심로이다. 다도해국립공원에서만 맞볼 수 있는 행복이다. 하룻밤 머물며 몰려온 여행객이 빠져나간 시간을 이용한다면, 주말을 피해 주중을 택한다면 더욱 좋다.

녹산등대 가는길
녹산등대 가는길

가장 반가웠던 것은 길을 걷다 만난 ‘거문딸기’이다. 거문도에 오롯이 거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식물은 거문딸기, 거문누리장나무, 거문닥나무 등이 있다. 이렇게 지역이름을 달고 있는 생물은 흥미롭다. 생물다양성과 문화다양성은 미사여구가 아니다. 섬의 가치를 높이려면 이런 생물종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역사와 문화의 근간도 이로부터 시작된다.

기왕에 거문도등대를 다녀왔으니, 녹산등대길도 권한다. 그 길에서 인어를 만날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등대 밑 바다에는 ‘신지끼’라는 인어가 살았다. 거문대교 다리 아래쯤 될 듯하다. 날씨가 좋지 않고 파도가 높아 위험한데도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는 배가 있으면 돌을 던져 뱃길을 막았다. 이를 무시하고 나갔다가 변을 당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많은 상상을 했는데, 큰 동상을 보니 오히려 상상력을 거세한 느낌이다.

울릉도와 거문도의 교류 주목해야

고도 한 식당에서 아침에 전복죽보다 좋다는 ‘따개비죽’을 내놓았다. 내가 생각한 따개비가 아니라 배말이다. 울릉도에서도 ‘따개비수제비’를 내놓았을 때 같은 배말을 확인했다. 생각해보니 울릉도이 어장을 개척한 사람들이 거문도 사람들이다.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를 보면 그가 만난 조선사람 140명 중에는 삼도인 38명, 초도인 56명으로 전라도 출신이 82.1%에 이른다. 1900년 이전 울릉도 재개척 시, 울릉도 거주민 구성의 절대 다수가 전라도인이었다. 그 중 삼도는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로 초도는 여수시 삼산면 초도이다. 이외에도 흥양(고흥)과 낙안출신도 확인되었다. 뱃길로 자그마치 575㎞에 이른다. 바람을 읽어야 하는 풍선으로 어떻게 가능했을까.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로 갈 때는 하늬바람이나 맞바람에 의지하고 올 때는 샛바람에 의지했다. 지금도 나로도나 거문도 지역의 베테랑 어부들 중에는 울릉도 무용담을 들을 수 있다. 강진에 유배생활을 한 다산이 쓴 <탐진어가> 중에는 ‘治帆東向鬱陵行(돛을 달고 동쪽 울릉도로 간다네)’라는 가사도 있다. 서도출신 오성일은 1890년(광서16) 올릉도 도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전라도사람들은 울릉도로 들어갈 때 소금과 식량을 가지고 들어가 울릉도에서 배를 짓거나 해초를 채취해 돌아왔다. 서도 장촌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제 1호 <거문도뱃노래> 전시관이 있다. 거문도뱃노래 중 ‘울릉도로 나는 간다, 고향 산천 잘 있거라’, ‘울릉도 가서보면, 놓은 나무 탐진미역, 구석구석 가득찼네, 울고간다 울릉도야’는 가사가 후렴으로 불려진다. 거문도와 울릉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고기잡이 보다 쑥밭이다

여수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거문도로 들어와 첫 번째로 머무는 곳이 동도 유촌마을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문대교를 지나온 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선착장에 머물렀다. 방파제 위에서 보니 10분 이상 머물렀다 떠났다. 배를 붙잡아 놓은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거문도 해풍쑥이다. 동도의 죽촌과 유촌 두 마을은 가두리 양식과 쑥재배로 살아가는 마을이다. 서도의 장촌이나 덕촌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삼치나 갈치보다 더 유명하다. 어장을 하는 사람들은 젊은 층이지만 쑥재배는 나이가 중요치 않지만 대부분 나이가 든 주민들이 쑥재배에 의지한다. 이 쑥을 뭍으로 보내는 유일한 방법이 쾌속선이다. 죽촌의 망향봉 자락 아래는 온통 쑥밭이다. 거문도쑥의 중심은 서도였다. 공장도 있고 주민들이 만든 회사도 있다. 죽촌이나 유촌은 작목반이다. 서도에 비하면 영세한 수준이지만 노인들에게 쑥밭 의존도가 더 높다.

기왕에 다리를 건넜으니, 유촌마을 거유 김유(1814-1884)의 사당 ‘귤은당’도 들러볼 일이다. 초등학교 바로 위 자리다. 거문도가 낳은 근세 유학자로 거문도와 청산도 등 절해고도에서 강학으로 활동했다. 1854년 러시아 푸차진 제독이 러시아함대를 이끌고 와서 거문도에 머물렀던 것 등 열강이 거문도를 탐하던 상황을 <해상기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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