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⑭ 다시, 그날.
하동현의 양망일기 ⑭ 다시, 그날.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9.04.0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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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이다. 어김없이 그 날은 또 온다. 떠올리기도, 다시 생각조차하기도 싫지만 꽃다운 넋들을 잃은 세월호 사고, 바로 그날 말이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슬픔과 비탄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한다. 버리다 시피 했던 외국 중고선들을 인수해 초인적인 능력으로 운항했던 선배들부터, 오대양 거친 바다를 휘저었던 이 땅에 차고 넘치는 뱃사람들이, 단 한번만 올라서 점검해보면 드러날 사고요인들을 밝히는데 걸린 헛된 시간까지도. 배출신이라 말하고 다니기도 부끄러운 치욕의 날들이었다.

현역 시절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피해 닻을 내리고 피항을 하다 그리스운반선 선장과 나눴던 교신이 생각난다. 만약에 배가 침몰한다면 당연히 배와 함께 운명을 어쩌고 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질 때다. 그 친구는 당연히 수장으로서의 기본적인 조치를 행한다는 전제하에, 가급적이면 살아남아서 사고 원인을 분석해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농담이 섞인 톤으로 반문을 했다. 사무라이 정신과 실사구시를 표방하는 뺀질이의 대결처럼 보이는 말잔치였다. 교신을 듣고 있던 선배 선장께서 결론을 내렸다.

-저 친구 말도 틀리지 않아. ‘기본적인 조치’ 만 충실하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에 입으로만 콩이야 팥이야 떠들지 말고, 말이 난 김에 당장 안전 점검과 퇴선훈련부터 한 번 더 실시하세.

2 세월호보다 앞선 2012년, 이탈리아 호화유람선 ‘코스타 콩고르디아’호의 침몰사고가 있었다. 예식기동(禮式機動 Salute maneuver-관광객들의 흥미를 돋울 목적으로 섬이나 육지에 근접하는 행위) 항해에서 뒤늦게 위험을 인지하고 급히 대각도로 변침하면서 발생한 좌초사고다.

신속한 구조작업이 이루어졌다. 승선인원이 4천이 넘었는데 32명 사망, 2명 실종이었다(최초 기사에 따름). 구조를 지휘하던 연안경비대는 3백여 명의 승객을 남겨두고 먼저 탈출한 선장에게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쌍욕까지 퍼부어댔다.

“입 닥치고 XX. 당장 배로 돌아가라. 남은 승객과 현황을 파악하고 구조작업에 임하라. 경고를 따르지 않을시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

이도 무시하고 배로 돌아가지 않은 선장은 바로 과실치사 책임 등의 혐의로 체포된다. 검찰이 선장보다 뒤쳐져 남았던 승객 300여명 1인당 8년씩 징역 2,400년, 실종 사망자 34명 8년씩 272년, 운항부주의, 과실치사로 25년, 도합 2,697년을 구형하겠다는 기사가 나왔다.

냉철한 법리를 따지는 법정에서 생물학적으로 치러내기 불가능한 엄청난 형량이다. 일벌백계와 안전불감증에 경종을 울리는 의도가 가미된 기사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후에 언론은 이런 천문학적인 징역형이 영미법계 국가에서 가능하며, 이탈리아 검찰은 현실에 기반을 둔 사실상의 무기징역인 26년을 구형하고, 재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16년 형이 선고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구조와 사후진행에 차이가 있다. 정치적 논리로 몇 년을 뭉그적대는 우리와 달리 책임을 통감한 선주측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인양을 서둘러 사체를 전원 수습했다. 끔직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를 대변하는 세력과 진실이 두려운 집단들을 편 가르기 하는 여론몰이 엉터리매스컴의 호들갑도 없었다. 정부와 해경의 갈팡질팡 적절하지 못한 대응이나 책임소재를 떠넘기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추태도 없었다. 함량미달 선장의 자만과 실수로 일어난 안타까운 사고는 돌이킬 수 없었지만 모두가 합심해 수습에 나섰다.

이래야 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한 때의 뜨거운 분노보다 경사에 지우치지 않는 시각으로 엄정한 원인규명과 ‘바로잡기’에 공권력을 아끼지 않아야 했을 것 아닌가.

 

 

3 결코 우리 전공과 무관하지 않다는 공감으로, 그해 동창회 만남의 자리에서 일체의 유흥과 웃음을 배제하고 추모의 예를 정중히 갖추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안타까운 슬픔과 비탄이 바로 내 곁에도 있었다. 작년 여름, 후배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우연히 마주친 것은 한여름의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는 휴일이었다. 병목현상이 빈번한 도로에서였다. 차선을 잘못 들어선 내게 비닐우의 차림으로 다가온 중늙은이 주차요원이 백화점 출입차량을 정지시키고 갈 길을 터줬다. 피곤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백화점 로고가 새겨진 카우보이모자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K선장. 대학 두해 후배. 북태평양 명태잡이 대형트롤선 선장이었던 친구. 인사를 건넬 경황은 아니었다. 가려진 차창으로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달쯤 뒤 갑작스런 그의 부음을 받았다. 급성 심근경색이라 했다. 달려 간 빈소에 늦장가로 만난 띠 동갑 나이차의 아내와 이제 소년티를 갓 벗은 늦둥이 아들이 울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세월호를 언급해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현역 시절 베테랑 선장 이력이 쌓일 때 쯤 이면, 고생한 후배항해사에게 선장자리도 물려주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외롭게 고생했던 아내와 가족 곁을 지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다. 이 친구도 과감히 해상생활을 접고 육지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어렵사리 연안여객선의 운항을 관장하는 해운단체의 관리직을 얻었다. 기초 발권업무부터 시작해 이력이 붙을 때 쯤 나라를 뒤집어 놓은 바로 그 사고가 터졌다. ‘침묵의 카르텔’, 해운관련 기관들의 방기와 관리감독 부실에 복합적으로 얽힌 비리가 밝혀지며 부산항 해역을 담당했던 그도 격랑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눈 막음용 희생양이었던지 혹은 도의적 책임이나 자책으로 자진해서 물러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사기관에도 수 없이 불려 다닌 것 같았다. 거친 파도밭인 북태평양에서의 짧지 않은 승선경험에 안전에 대한 경각심은 누구보다 깊었겠지만, 일개 운항 관리직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는지, 해역이 달랐고 또 어떤 직무연관성이 있었는지 내부적인 상황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로부터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으므로.

자괴감에 고통 받지 않았을까. 당시 여객업무에 몸담았다는 트라우마가 낙인처럼 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것은 아닐까. 마치 내가 현역 때 거친 파도 속에 조업을 밀어붙이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친 젊은 선원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가슴앓이 하는 것처럼.

이후로 그는 낭인처럼 살았다. 그 이력이 족쇄가 되어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밥벌이를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탄탄했던 몸에 살이 빠지고 예리하던 눈빛이 무디어졌다. 호탕하던 기질이 자꾸만 패쇄적으로 변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그와 마주칠 때면 평소 대화내용의 절반을 차지했던 바다와 배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른 젊은 나이에 해상생활과 병행하며 시인으로 등단해 바다와 낭만을 아는 친구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리 삶과 바다를 주제로 많은 글을 썼다. 나중에는 절필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돌이켜보니 나는 그가 어려울 적에도, 글쓰기를 멈추었을 때에도 따뜻한 도움과 위로를 주지 못한 것 같다. 마주치면 그저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어깨를 두드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추모 글을 하나 마련했다. 그가 힘들었을 때 썼던 시 한편에 현역 시절 주고받던 짧은 농담의 기억을 덧붙여 본 글이다. 문학단체에서 인연을 맺은 시낭송가 한 분에게 의뢰하여 추모 영상을 유투브로 문학동아리 후배들께 보냈다.

내가 첫 어기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이제 곧 자신이 부딪혀야 할 바다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사 달라 조르던 친구. 이 정도가 세상을 떠난 그에게 조그만 위로라도 될런지. 다시 희생자들에 더불어 이 친구에게도 추모의 고개를 숙인다.

그는 젊은 시절 현대해양의 기자이기도 했다.

‘캉캉의 바다’ 

- 뱃놈 후배, 시인 K 선장을 추모하며-

겨울비가 내리는 자갈치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고 너의 시 ‘자갈치’를 다시 읽는다.

자갈치

‘바다를 버리고 온지 거언 1년이 다 되어 갈 즈음,

태풍의 상흔으로 누렇게 뜬 자갈치 앞바다

종일 옆구리 사이에서

습한 땀 내음과 손자욱으로 얼룩진 취업서류봉투

그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그 바다는

침몰한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띠와

유독성 갈조류의 색깔처럼 죽어있다고,

죽어있다고 그렇게 웅얼거리며

부서져나간 방파제 둑에 걸터앉아 꺼내본

그 바다 속에는,

앳되게 보이는 선원수첩 속의 그 젊음은

어두운 표정 짓고 있지만

기억하네,

잠자리에서조차 소금기 서걱한 작업복 벗지 못해도

수 만 해리 바다를 건너온 꽃 편지봉투

몇 뭉치의 전보 쓸어안으며,

휘청거리는 선실에서

결혼 일주일 여 만에 울먹이는 아내를 등 뒤로

닻을 올리며,

사뭇 괴롭지만 우렁찬 호령으로 배를 몰아오던

거칠기 짝이 없던 동해의 밤처럼

설움덩이는 늘상 출렁이며 잠 못 이루게 했던 것을

실업의 세월은 길다 해도

나란히 자갈치 구석구석 누비며

저녁식탁으로 실어 나르는 우리 신혼의,

생활비 투정으로 마다하는 아내를 손잡아 끌고

산 꼼장어 한 접시와 소주 한 병 속에서

꿈틀거리는 바다는

항상 젖어있는 자갈치 아줌마의 손끝에서

새로운 해류와 신선한 바람으로

바다는 또 그렇게 살아날 것인데…….’

작년 여름, 재앙 같았던 폭염 속,

뭍에서의 덧없는 삶을 버리고

안개 속 항해처럼 일렁거리는

땅멀미 속에 너는 세상을 떠났다.

다시 징기스칸의 말발굽으로 내처 치닫던

바다를 그리워하며 몸살을 앓던 그 친구.

나이 들어도 변치 않던 개구장이 같던 눈웃음.

“형, 파도는 말이오, 마치 캉캉 춤을 보는 것 같아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 맹렬히 일어섰다

뱃전을 두들기며 거품으로 거세당하는 파도를 보며는요,

부챗살같이 좌우로 화끈하게 플레어 치마를 펄럭거리며

마룻바닥을 울려대는 하이힐 탭댄스에

동백처럼 입술이 붉은

물랑루즈 무희들의 캉캉 춤 말이요.

그물무늬 스포티한 스타킹 발길질에

언뜻언뜻 보이는 치마 속 팬티는

꼭 물방울무늬일 것 같아요.

어때요, 형은 그렇지 않았나요?”

바다와 시를 사랑했던 캡틴 킴,

하릴없이 꽃은 피고 또 지고

세상의 아득한 바람과 비의 시간을 지나

바라보면 온 몸에 붉은 물이 들던 북태평양의 노을 속

그 캉캉의 바다에 고이 잠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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