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10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10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 하동현 소설가
  • 승인 2019.04.08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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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대가의 격의 없는 제자 사랑...장수호 교수

남곡(南谷) 장수호 부경대학교 명예교수. 구순의(1929년 생) 원로로부터 향파 이주홍 선생과의 인연과 추억을 듣는다.

장 명예교수는 부산수산대학과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한 경제학박사로 부경대 교수(1961~1995), 한국수산경영기술연구원 고문, 남곡학술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수산업협동조합경영론, 수산경영학, 어촌계에 관한 연구, 어민을 위한 수산경영, 어촌과 어업 경영, 어장관리, 조선시대말 일본의 어업침탈사, 경영재무론 등 이론에 지우치지 않고 현장경영에 기반을 둔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 첫 번째 외화벌이 통로였던 수산부국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평생을 학계와 현장을 아우른 공적으로 부산시 문화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 상훈경력도 다양하다.

그는 격동의 시대, 6.25 사변을 겪으며 입학한 부산수산대학에서 향파를 스승으로 모셨고 후에 대학에서 선배이자 동료교수로 교류하며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했다.

 

전인교육의 주창자, 향파

3월 18일, 봄의 문턱에 류청로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과 함께 장 교수의 개인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며 남겨두었던 미발표 논문자료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노학자의 기억은 구체적인 수치와 년도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고 자신이 구상하는 해양수산 발전방안을 설명함에도 거침이 없었다.

향파 선생을 추억하는 회고담에 더해 어촌문화개발과 원양산업을 포함한 수산업의 제도적 정비까지, 평생 산학(産學)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두 분의 심도 있는 대화는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대학 입학하던 해 6.25사변이 발발해 한 달 정도 수업을 받고 바로 휴교였어. 나는 곧 학도병으로 종군했다가 부상으로 제대하고 전시연합대학의 영도 가교사로 복학했지. 천막가교사 시절 교수님들 중 두 분이 지금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있어.”

그 두 분이 수산경제학을 담당했던 표문화(表文化)교수와 교양인문학의 향파 이주홍 교수다. 표교수는 민족과 국가관 즉, ‘지정학적 불리함을 대륙과 해양의 가교로 보는 역발상과 수산업 발전과 수산경제연구로 자원부족국가를 수산해양부국으로 탈바꿈 시킬’ 호연지기를 강조했다.

향파 선생은 험난한 바다를 개척할 학생들에게 혹 결여되기 쉬운 인문학적 소양을 고취시켰다. ‘하면 된다’는 산업개발입국의 모토 하에 국민을 먹여 살릴 인재를 양성하며, 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삶을 관조하는 시각과 품격을 가르친 이른바 전인교육의 주창자였다. 다소 경직된 생계형 학문이 주를 이루는 이공계 대학에서, 인간 본질의 정수를 다루는 문학과 예술을 배울 수 있었으니 격변기 학생들의 타는 목마름을 채워준 스승이었다.

그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달리는 젊은 학생들 내면에 응어리진 울분을 발산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연극판을 마련해줬다. 처용가, 춘향전에 모비딕과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가루지기’까지 함께 어울리며 지도했다.

“학생학술단체인 ‘수산경제연구회’를 조직해 향파선생의 지도로 등사기로 밀어 ‘파도’라는 학교신문도 발간했어. 선생께서 제호를 써주시기도 했지.”

이어 교지편집 발간과 ‘수산타임즈’에서 ‘수대학보’로 제호를 바꿔가며 학보사 지도교수로 기사작성 요령과 문학적 소양도 가르쳤다. 교과서와 강의만이 아니라 인생을 감당하며 즐기는 방식을 격의 없고 소탈하게 일깨워줬던 추억담이 줄을 이었다.

“내가 스승 복이 있었나봐. 부산경남 문학의 양대 산맥 중 한 분인 요산 김정한 선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향파 선생은 대학에서 모셨지. 나중에는 같은 선생으로 대접하시며 자주 불러들 주셨어. 지사 풍인 요산선생은 강단이 있었고 향파선생은 문학과 예술의 모든 경계를 섭렵하며 술과 풍류를 아는 분이라 두 분과 같이 자리 했을 때는 정말 흥겨웠고 배울게 많았어.”

그가 직접 겪은 향파선생과의 일화를 하나 들려준다.

“젊은 학자로서 공부에 대한 부담과 이런저런 갈등으로 내가 의기소침해 있을 때야. 내 연구실을 찾아오셔서 오당지라는 한지에 낙천지명(樂天之命)이라 쓴 큰 휘호를 주시는 거야.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라. 말없이 제자의 성격과 마음까지 읽고 계셨던 거지.”

선생은 일체의 사심이나 명예욕도 없이 넓은 아량에 제자사랑이 깊었다. 무심한 듯 다가와 등을 두드리고 힘내라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장 명예교수는 그 휘호를 표구해서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며 쓴 글을 모은 산문집 ‘내 마음은 표준일까’라는 책의 표지 글씨로도 사용했다.

“기존의 경직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성 있는 안목으로 세상을 재창조하는 ‘르네상스적 인간형’ 교육의 효시가 향파야. 시대를 앞섰지.”

그는 아동문학, 시, 희곡, 소설, 장르를 넘나들던 향파의 발자취에 더해 특히 해양친화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여 ‘해양인문학’의 초석을 다졌음을 강조했다. 문학재단의 발전적인 운영방안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통팔달 어디에 막힘도 없이 수산해양전문지의 소명까지 일깨워주는 당부의 말씀까지 덧붙이셨다.

“찾아줘서 고마워요.‘현대해양’응원하리다. 진실에 기반을 둔 소신과 포용에 부드러운 강단, 수산해양을 알리고 발전을 모색하는데 이런 덕목을 항상 간직해야 해. 이건 우리 영원한 스승인 향파선생이 내게 물려주신 것이기도 하지.”

공부 한 번 제대로 한 셈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며 향파의 글 한 대목을 떠올렸다.

“인생을 조용히 관조하면서 인류영원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혈맥을 통해 암시해 주는 것이 문학의 본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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