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⑭ 고등어 파시, 그 영화가 그립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⑭ 고등어 파시, 그 영화가 그립다
  • 김준 박사
  • 승인 2019.04.0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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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도 좌부랑개 마을

[현대해양] 좌부랑개가 한눈에 들어오는 동항마을 언덕에 숙소에 짐을 놓고 ‘시금치’ 재로 향했다. 도동, 덕동, 유동 등 욕지도 서쪽에 사는 주민들이 여객선을 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길이다.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천황산(329m)과 약과봉이 남북으로 솟아 있다. 시금치를 이고 이 고개를 넘으면 도깨비가 나타나 뺏어간다고 한다. 오히려 고개를 넘어갈 때 쉬엄쉬엄 쉬면서 갈만큼 험하다고 해서 ‘쉬어가는 고개’가 ‘쉬엄-치’가 된 것이라는 말에 더 공감이 간다.

욕지도는 통영에 있는 44개의 유인도 중 가장 큰 섬이다. 외해에서 통영으로 들어오는 길목 먼 곳에 있다 해서 두미도, 연화도와 함께 ‘원삼면’이라 불렸다. 욕지도는 조선시대에는 민간인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고, 대신에 조정에 진상하는 사슴을 기르는 목장이 있어 통제영 수군들이 관리했다. 통제영이 폐지(1885년)된 후 1887년부터 민간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일통어장정(1889년)이 체결된 후에는 많은 일본인 어부들이 욕지도로 들어왔다. 그 중심이 욕지항에 있는 좌부랑개마을이다.

 

욕지바다를 탐한 일본인

자부랑개, ‘자부포(自副浦)’라고도 한다. 주민들은 ‘자보랑개’라고도 부른다. ‘근대어촌발상지’로 일본 우익단체인 흑룡회에서 발행한 <한해통어지침>(1903)에는 ‘욕지도에는 6개 마을이 있다. 그 중 2곳이 욕지도 항구 안쪽에 있었다. 당시 골개(읍동)에는 30여 호가 흩어져 있었고, 자부포에 4호가 있었다’고 했다. 1910년 발간된 <한국수산지>를 보면, 욕지도에 읍동과 좌부랑포 2개 마을이 있고, 주변에 논과 밭이 많다고 했다. 당시 가호수는 801호이며, 어선은 15척으로 해조류 채취와 챗배로 멸치를 잡는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인 도미우라 외 1호가 살고 있었다. 20년 후, 욕지도는 일본인 98호, 조선인 870호로 크게 증가했고, 일본인은 대부분 가가와현 출신들이었다.

욕지도서 고등어 잡이가 불야성을 이룬 것은 1920년대이다. 대형선단을 꾸려 고등어 잡이를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후부터다. 일본인 이주어민들이 마을을 이룬 좌부랑개에는 주재소(1911년), 우편소(1912년), 어업조합(1924년) 등 주요 기관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을이름도 자부포로 바뀌었다. 마을 이름을 두고 해석도 분분하다. 일본인 이주어민 중 도미우라 가쿠타로(富浦覺太郞)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중심인물로 떠오르면서 ‘부포’와 자부랑개의 한자 표기 ‘좌부포(坐釜浦)’에서 ‘자부포(自富浦)’가 되었다는 설이다. 어쨌든 좌부랑개를 중심으로 욕지도는 일본인 이주어촌 형성되었고, 학교, 유흥업소, 어판장, 목욕탕, 신사, 화장터 심지어 당구장까지 있었다. 모두 고등어가 불러온 변화였다. 1929년 7월 12일 동아일보 기사다.

“욕지도 근해 고등어업은 매년 수백척 이상이 출입하는데 지난 2일 10만미, 3일에는 15만미 4일에는 50만미를 포획하여 근년에 처음보는 풍어를 기록하자 어민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당시 기뻐하는 어민들은 토박이 욕지도 주민이었을까. 아마도 일본인 이주어민들이었을 것이다. 무동력선의 조선어민들은 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욕지도에 들어온 일본인 이주어민들은 어장을 선점하고 최첨단 동력선인 건착선으로 고등어를 싹 쓸어 갔다. 고등어 잡이배가 500여 척이었다. 운반선만 25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라진 비린내, 그 흔적들

욕지바다는 1970년대 중반까지 고등어의 고향이었다. 고등어 경매도 이어졌다. 1968년 욕지도 일대를 가공과 유통시설을 갖춘 ‘어업전진기지’로 지정했지만 바다는 고갈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욕지도에는 냉장시설이 없었다. 집집마다 화장실 옆이나 처마 밑에 한 두 개씩 ‘간독’을 만들어 고등어를 염장해 보관했다. 큰 간독에 고등어 4만미까지 들어가는 간독이 있었다. 간독은 고등어를 염장 보관하는 창고다. 가마니를 깔아 놓고 사다리로 내려가서 소금과 고등어를 번갈아 채웠다. 고등어 파시가 한창일 당시에 좌부랑개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동전을 한주먹씩 주었다고 한다. 간독에 보관한 고등어는 통영, 마산, 사천 그리고 영덕까지 갔다. 그리고 산 너머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경상북도 안동 간고등어도 욕지도 간독에 보관된 간고등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다는 화수분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남획이 문제가 되었는데, 해방 후 1970년대 이후 욕지도 바다에서 고등어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싹쓸이 어업은 지속되었다. 고등어 비린내가 사라진 욕지항에 다시 고등어가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고등어양식이 시작되면서다. 아일랜드에서 배운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홍순진씨가 내파성가두리 양식시설을 이용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고등어 가두리 양식에 성공한 것이다.

욕지항에 어둠이 내리자 가장 먼저 붉을 밝힌 곳은 해녀촌이다. 이어 ‘여관’, ‘다방’, ‘세탁소’ 등이 어둠을 밝혔다. 모두 옛날 고등어 파시의 흔적들이다. 이 골목이 한 때 뱃사람과 작부들이 밀고 당기며 흥정을 하고 풋사랑을 나누었던 곳이리라. 나이든 해녀가 운영하는 선술집에서 고등어회를 시켜놓고 술을 마시던 사내들이 부산여관 상호가 별처럼 빛나는 골목길로 사라졌다.

고메밭에서 쟁기질 소를 만나다

칠월쯤으로 기억된다. 자부랑개를 지나 북쪽 노대도를 벗 삼아 해안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에는 도동에서 자부로 통하는 일부 구간과 노적과 통단으로 가는 길이 비포장이거나 차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고갯길에서 황토밭을 갈고 있는 황소를 만났다. 주인 말을 잘 듣는 쟁기질 경력이 상당한 귀한 소였다. 쟁기질을 한 이랑에 어머니 두 분이 고구마 순을 옮겨 심고 있었다. 그때는 고구마, 욕지말로 ‘고메’가 얼마나 귀한 음식이었는지 몰랐다. 쌀농사를 지을 수 없어 식량을 해결할 목적으로 심었던 고구마다. 뿌리는 식량으로 줄기는 소 먹이로 버릴 것이 없었다.

그때 배가 닿는 동촌 선창 허름한 가게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던 것이 ‘빼떼기죽’이었다. 말린 고구마를 갈아서 죽을 만든 욕지도 음식이다. 통영에는 ‘충무김밥’, ‘꿀빵’, ‘시락국’, ‘도다리쑥국’과 함께 ‘빼떼기죽’도 이름을 올렸다. 고구마는 욕지도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 섬사람들에게 특별한 음식이다. 겨울은 물론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는 식량이었다. 하지만 욕지도 ‘빼떼기죽’처럼 지역음식을 넘어서 식단에 이름을 올린 경우는 흔치않다.

말린 고구마를 잘 씻어 냄비에 넣고 물을 붓고 팥과 쌀을 넣고 끓인다. 주걱으로 잘 저으면서 빼떼기라 부르는 ‘말린 고구마’를 으깬다. 설탕을 넣고 소금을 간을 하면서 끓인다. 조리과정이 어렵지 않지만 고메에 삭힌 섬사람들의 이야기는 깊고 깊다. 이젠 빼떼기죽만 아니라 할매바리스타가 만들어 준 ‘고구마라떼’도 인기다. 덕분에 묵혀 있던 밭들도 일궈 고구마농사를 짓고 있다. 다만 주민들이 나이가 많아 고구마 농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고등어에서 참다랑어로

좌부랑개를 돌아보고 시금치재를 너머 도동마을 바닷가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고등어와 참치양식장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참다랑어 양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통영 욕지도에서 시도되고 있다.

세계 참다랑어 어획량이 최근 10년 사이에 절반으로 감소하였지만 소비량은 급증해 양식이 4배 정도 증가했다. 자연산 참다랑어 어획량은 다랑어류 전체 어획량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고갈위기를 맞고 있어 어획량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할당된 어획량은 전체 6만1천톤의 3.4%인 2천여 톤에 불과하다. 최근 수온의 변화로 강원도 일대에서 잡히는 참다랑어를 놓아줘야 하는 상황이다. 일찍 참치양식에 나선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참다랑어 완전양식에 성공했다. 세계 양식량의 40%를 점하고 있다. 일본 외에도 호주, 멕시코 몰타, 스페인도 양식을 하고 있다. 우리는 치어를 가져와 양식을 하는 수준이다.

참다랑어가 좋아하는 먹이는 고등어다. 욕지도에서 양식한 참치는 서울 일식집 최고급 횟감으로 공급되고 있다. 자연산은 바다에 로또라고 할 만큼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이젠 고등어 파시로 유명했던 욕지도는 고등어 양식을 넘어 참다랑어 양식으로 바뀌고 있다. 비록 참다랑어 회는 맛보기 어렵지만 욕지도 선창에서 고등어나 방어회는 맛볼 수 있다. 특히 물질하는 해녀 김씨가 건져 올린 자연산 돌미역과 성게를 넣고 끓인 미역국이 맛이 있다. 운이 좋으면 문어숙회도 맛볼 수 있다. 붉은 황토와 파란 바다, 대비되는 색감만으로 욕지도는 매력적이며 가고 싶은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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