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⑬ 내게도 사랑이
하동현의 양망일기 ⑬ 내게도 사랑이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9.03.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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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가 아울렛(Outlet) 할인매장에서 구두 한 켤레를 사 준단다. 단벌 구두가 딴에 맘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월상품 떨이 행사장’에는 손님도 없었다. 중년의 판매원 여사님들이 전기난로 앞에 손을 부비며 나누는 잡담 위로 스피커에 노랫소리만 쩌렁쩌렁하다. 7080용 올드판 가요메들리. 짙은 브라운 색 키높이 구두 한 켤레를 집어들 때, 귀에 익은 비음 섞인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온다.

전주가기가 막히다. 아, ‘내게도 사랑이’, 바로 그 노래.

…… 긴 세월 흘러서 가고 그 시절 생각이 나면
못 잊어 그리워지면 내 마음 서글퍼지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시간이 흘러서 가면 아픔은 잊어진다고
남들은 말을 하지만 그 말은 믿을 수 없어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매장에서 전철 입구까지 이어진 벌판 같은 광장에 꼭 바다에서처럼 바람이 휘몰아치고,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파도 속의 출항 깃발 같이 펄럭거린다.

젊음이 좋긴 좋다. 이정도 날씨야 아랑곳 않고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는 친구들, 애완견들을 데리고 나와 뛰었다 걸었다 산책하는 청춘남녀들.

사랑이라. 바다와 배에서 청춘을 다 보내고, 늦은 나이에 중매결혼에다 이제 환갑을 노려보는 나이에 멋쩍고 어색한 단어이지만, 그 날 하필 그 노래와 풍경들이 뜬금없이 삼십 년도 더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게 한다.

 

2
뱃놈양성소 같았던 그 시절 대학에서 교육학이나 식품공학, 생물학 관련 전공으로 우리와 합류했던(?) 몇 안 되는 여학생들은, 자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희소가치로 인해(좀 미안한 표현이다) 대단한 인기들을 누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같이 멋대가리 없는 술꾼들은 동기나 후배 여학생들과의 교류자체도 어려웠다.

그저 바다에 저당 잡힌 미래를 기다리며 막걸리 잔만 비워대던 찌질한 젊음이었으므로.

첫 배 타고 6개월쯤 지나 뱃놈 티가 제법 배여들 때, 전혀 기대도 않던 분홍색 편지 봉투가 하나 도착했다.

편지라면 또 웃지 못 할 일이 하나 있다. 첫 배달된 편지 묶음에서 수신인이 실항사(견습사관) 이름으로 된 편지가 여러 통 나왔다. 가족 간 편지왕래를 위해 견본삼아 우리 선명과 대리점주소를 적고, 수신인 란에 실항사 이름을 예로 들어 영문으로 적어 식당 게시판에 붙여둔 게 문제였다.

그걸 샘플로 베껴서 집으로 보내고, 꼬부랑 글을 모르는 시골 선원가족들이 누구에게 부탁을 했던지 정작 선원 본인 이름은 빼고 실항사의 영문이름만 적어 부친 것이었다.

발신인이 정확하다면 임자를 쉬 찾겠지만 애매한 편지는 어쩔 수 없었다. 개봉해서 절절한 안부가 담긴 첫머리 몇 줄을 낭송하거나, 언급되는 가족들 이름으로 실제 임자를 찾아야 했으니.

여하튼 편지 하나에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어라, 분명 수신인은 나인데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이 주소가 서울이었다.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에 반말로 건강해라, 고생해라, ‘영웅본색’의 주윤발같이 버릇처럼 성냥개비를 물고 있는 너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느니, 짤막한 엽서 같이 도대체가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여자가 없었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나를 잘 알고, 심지어 술도 한잔 같이한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해 낼 수 없으니 자신을 밝혀주시지요. 반말 편지를 하는 여자에게 깍듯하게 존대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나 자신이 미안해 어쩔 수 없었다.

애타게 기다린 다음 편지에도 정확한 존재를 밝히지 않고, 술을 너무 마시지 마라는 충고 투의 짧은 내용에다 남반구가 한여름인줄도 몰랐던지 털실로 짠 목도리를 소포로 보내왔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몇 달을 끌던 미스테리는 네 번째인가 그녀의 편지에서 해답이 나왔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애간장을 태우다가, 에라이 이놈아 하는 식으로 순차적인 설명을 곁
들이고 있었다.

문학서클에서인가 커피숍(그때는 다방이다)에서 시화전을 개최했고, 그녀는 주인인 친척 어른의 부탁으로 부산에 내려와 그 다방의 지배인(이것도 당시 우리식 표현 그대로 쓰면 ‘새끼마담’)격이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하, 맞다 그 여자. 이니셜이 L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장소를 빌려줬다. 일주일인가 손님도 별로 오지 않는 시화전을 열고, 저녁이면 몇이 둘러앉아 쥐포에 소주를 마셨다. 동네 건달 하나가 들러 술주정하는 걸 내가 왈칵해서 쫓아낸 적이 있고, 당시 유행대로 장발에 턱수염까지 기른 나를 나이든 복학생정도로 보았으며, 후배들 술자리에 모자란 술값을 그녀에게 빌리고 근로장학금 나오는 날이면 그걸 갚으며 커피에 또 술 한 잔 씩에……. 그렇게 너 댓 번을 마주쳤던 기억이 났다. 술이 취하면 내가 그랬단다.

바다와 결혼할 것이니 나에게 세상의 여자는 필요 없다고. 꼴에 온갖 허세와 똥폼은 다 잡았던 모양이다. 자신보다 두어 살 많은 복학생인줄 알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바다를 동경해 껍데기만 늙어버린, 자기보다 두 살 어린 귀여운(?) 뱃놈지망생의 사투리가 그렇게 웃기더란다.

그냥 립서비스였겠지만 배 타러 갈 때면 들러 인사 하겠다 해놓고 연락도 없길래 이리저리 안면 있던 후배에게 부탁해 벌써 한국을 떠나버린 내 기지 주소를 얻었다했다.

서울로 다시 일을 얻어 돌아가면서 자기도 어린(?) 주제에 훌쩍 만리타향 부산에서 어찌 알게 된 남자였고, 그것도 인연이랍시고 격려편지나 보내자 마음먹었단다, 뜬금없이 발신지가 서울이 되고 짧았던 마주침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가벼운 안부정도로는 나로서는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던 것이다.

카운터에 앉아 찻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던 그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직하게 내뱉던 그녀의 표준어 음성. ‘시화전 마치면 작품하나 나 줘요. 방에 걸어 놓게.’ 선회창밖으로 소금을 뿌린 듯 별이 빛나는 헛헛한 밤하늘에 젊은 뱃놈의 심장이 벌컥 뛰었다.

나에게 별 다른 감정 없이 이토록 정성을 들여 편지를 쓸 수는 없다. 게다가 정성을 다해(?) 짜서 보내 준 목도리는 또 뭐냐. 나는 바로 그녀를 사랑해버렸다. 그때부터 줄기차게 선실에서나 이국의 카페에서 반쯤 술에 취해 바다에서 겪은 지난한 일상과, 가슴 속에 엉망으로 날뛰는 뼈아픈 젊음의 넋두리 같은 것들을 장문의 편지로 써서 보냈다.

글이나 편지가 바로 자신을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 답장은 언제나 그랬듯이 담담하며 차분했다. 누구에게나 젊음은 버겁고 힘들 것이니 불같은 가슴을 잘 다스리라는 투의 짧은 격려 같은 문장들.

28개월 걸린 첫 어기였다, 그런데 염병할, 남태평앙을 가로질러 뉴질랜드에서 남미로 어장이동을 하고, 떠도는 자의 주소가 헷갈렸는지 귀국 삼사 개월 정도를 남길 때 쯤 답장이 뚝하고 끊겨버렸다. 왜였을까. 전화번호는 아예 없었으니 국제전화를 해 볼 수도 없었다.

천방지축 날뛰며 무례하게 성큼 다가서는 내가 힘들었을까. 아니면 결혼이라도 한 것일까.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일까. 마음만 있다면 내 주소를 추적 할 수 있을텐데. 화약통을 들쑤시듯 피 끓는 젊은 뱃놈의 심장을 뒤집어 놓고, 내 헐떡대던 젊음을 지켜줬던 그녀는 어디로 숨어 버린 것일까.

귀국해서 날 잡아 서울의 그 주소로 무작정 찾아갔다. 찻집과 카페가 늘어선 거리였다.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몰랐다. 모두 사투리 범벅의 희한한 내 설명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그 주소와 번지가 일치하는 카페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귀담아 듣지도 않고 그저 응응 건성으로 응대만 하며 꾸벅꾸벅 졸던, 고모뻘 되는 주인 마담과 마주앉아 소맥에 노가리를 뜯다가 억병으로 취해 쓸쓸히 부산행 밤 열차를 탔다.

도대체 짐작도 할 수 없는 연유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여자. 가슴 한구석이 아련했다.
내 청춘에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지는 듯 깜깜한 밤이었다.

 

3 사랑이 아니라 연민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마흔쯤 일 때, 아르헨티나 시골 부두에서 배 스케줄이 꼬여 일주일간 머물렀다. 호텔과 레스토랑을 겸하는 건물의 주인은 일본 이민 여성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을 했다가 암으로 아내를 잃고, 머리칼과 눈동자가 새카만 혼혈 외동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혈통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를 알고 나서 자신이 아내에게 죄를 지었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행동거지에 우울이 뚝뚝 묻어나던 중년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철부지 열 네 살짜리 딸을 깨워 한 바퀴 돌면 1시간 쯤 되는 산책코스를 거닐었다. 아이는 기억에도 없는, 사진으로만 남겨진 젊고 예쁜 엄마를 그리워했다. 방파제 건너 갈대밭에서 떠돌이 개를 만나 겁에 질린 아이를 업고 오며 지구 반대편 엄마의 나라 일본과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해 주고, 내 발이 닿았던 세상의 기묘한 경치와 관습들을 초롱거리는 눈망울의 아이에게 들려줬다.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를 찾기가 글렀다는 아이에게 동양에는 인구비례상 남자아이들이 더 많아 계집아이들이 대단히 해피하다는 썰렁한 농담을 했고, 담배를 배우려는 아이를 호되게 야단치기도 했다.

또래 남자아이들의 축구시합에 심판이나 봐주면서 무료한 시간을 죽여 없애다가, 덜컹거리는 동작으로 독학으로 익혔다는 아이의 탱고 연습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반주 음악은 ‘엘 디아 케 메 키에라스(El dia que me quieras-그대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 로 기억한다.

출항 이틀 전 날, 주인의 심부름으로 요리용 숯을 받으러 해변의 도매공장에 들렀다가 백사장에서 잠시 쉴 때, 한참을 바다 쪽을 바라보며 앉았던 아이가 갑자기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까삐딴 하(하선장), 당신 떠날 때 나 좀 어디 먼 곳으로 데려다 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어떤 결의나 비밀을 털어놓듯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눈가가 젖어있었다. 우리 숙명 같은 방랑과 떠남의 피가 이 어린 계집아이의 가슴에도 자라고 있음이 나는 무서웠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백사장에 앉아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아이는 자신이 나를 따라 떠난다면 혼자 남을 아버지가 불쌍하다며 나에게 매달리듯 안겨 펑펑 울었다. 아무런 해줄 말도 없어 나는 그저 아이의 어깨만 토닥거렸다.

출항전야에 주인과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해군출신인 그는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도는 나를 부러워했다.

“바다와 배가 언제나 여자처럼 너를 기다리지?”

엄마도 없이 늦둥이 외동딸을 키우는 중늙은이 아비에게는 무심한 악수와, 인연과 헤어짐의 아픔을 알아가는 사춘기 소녀에게는 그저 마음으로만 예쁘게 잘 자라라는 기원을 하며 나는 그 시골항구를 떠나야했다.

이십년 옛날이니 그 아이도 이제 서른 중반일 것이다. 나이를 먹고 사랑을 하고 아파하며 삶은 견디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을까.

그 때 내 목적지는 언제나 바뀌었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어야 할 곳에 잊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발을 딛었던 항구마다 끈적대고 질펀한 그 밤들과 분위기를 누리고 즐겼다. 세상을 떠돌며 항구의 풋사랑이야 없었겠냐만 사랑과 연민이라면 이 두 가지가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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