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09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09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 류청로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부경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19.03.10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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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무법자들 관조하고 포용한 향파
▲류청로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부경대학교 명예교수
▲류청로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부경대학교 명예교수

[현대해양] 필자는 70학번으로 부산수산대학에 입학하고서 20대 초반의 당찬 패기로 마치 무법자처럼 교정을 누비고 다녔다.

향파는 늘 하늘,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교정을 걷는 모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는 71년 8월 정년퇴임 하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남겨진 인상은 강렬했다. 이주홍 선생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격변기, 그리고 산업화 시대에 바다의 아들을 키워내던 부산수산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일생을 보낸 분이다.

그 시절 그는 수산-해양계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유일한 정교수였고, 전공학과에 소속되지 않은 유일한 교수였다.

아직도 부경대 교정에는 최고의 원로로서 50여명의 수산계 교수, 800여명의 학생들과 아낌없이 소통한 그의 흔적들이 흩뿌려져 있다. 어떤 교수가 대학에서 교육자로, 예술가로, 문학자로 이만큼 성실한 삶을 보여줄 수 있을까?

향파 선생의 삶의 방식, 교육의 방식, 문학과 예술의 방식은 매우 특별하였다.

그는 거칠고, 가난하고, 열정과 패기만 가득 찬 무법자 같은 수산대 학생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조자의 입장을 지켜 주었던 좋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자신이 문학의 모든 분야, 서화, 출판, 연극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재능을 몸소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전파하는 모습은 누구나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작은 대학 그러나 대한민국 유일의 수산대학, 그 시절 그는 우리를 무법자들이라고 부르며, 어루만지고 해양인문학의 샘물로 패기와 도전과 정의라는 무기를 장착해 주었다.

향파는 ‘수대학보’와 학예지 ‘백경’ 등 정기간행물은 물론, ‘백경극회’, 해양문학회 등의 동아리, 미술, 서예 부문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문학, 문예 분야에 일일이 관여하면서 지도와 지원의 틀을 짜 주었다. 필자가 연극부에 가입해 학생들은 ‘모비딕’, ‘탈선 춘향전’ 등 수많은 무대를 향파와 같이했지만, 왜 수산대생이 연극에 열심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우리 공연이 극찬을 받았을 때 우리 모두는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이 행사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당대 희곡-연극계를 선도했던 차범석 교수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백경-모비딕’이라는 대작을 공연한 것,

지금 생각해 보면 파격의 예술을 대학생들이 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극본 초보가 바다와 관련된 전공을 수행하고 있다는 패기 하나로 대본을 고쳐서
격을 파괴하도록 허락해 준 것부터가 향파의 포용이 아니었겠는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국연극을 반세기나 앞서서 시험하고 있었고, 겁 없이 극을 파괴하는 무법자들이었다.

향파 선생은 그런 모습조차도 관조하는 모습으로 지켜봐 주셨다. 아니 그렇게 철저하게 이끄신 것 같다. 향파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향파는 우리에게 인문학 시스템을 다 갖춘 대학 캠퍼스보다 훨씬 더 튼튼한 문학, 예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학생들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만 관여하였다.

뿐만아니라, 모든 학보, 학예지의 표지부터 서시, 연극 팜플릿부터 당대 최고위 수산학자들의 개인사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고 자상하게 좋은 글로 수산대학을 아니 바다를 예
찬해 주었다. 향파는 이 시대 진정한 해양인문학의 창시자고 지휘자였다.

 

그의 시, 소설, 수필, 아동문학에 등장하는 바다는 매우 다양하다. 향파의 바다는 새우부터 고래까지, 수평선에서 방파제까지, 섬과 갯마을에서 항구도시 부두까지, 행진곡에서 연가(갈매기처녀: 이미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향파 이주홍 선생이 만들어 놓은 마르지 않는 샘터에서 많이 즐기고 놀았던 무법자였다. 해양문학회에서 시, 소설, 희곡, 연극부에서 연출과 희곡을 손질하면서 대금연주를 특기로 하였다.

어떤 연극경연에서 당시의 유일한 음향기기인 녹음기가 갑자기 고장이 나는 바람에 극의 음향을 대금하나로, 그것도 무대 뒤에서 진땀을 흘리며 즉흥적인 연주로 극을 마무리 한 기억도 있다.

수산대생이 전국대학생 글짓기 대회에 당당히 입상하는가 하면, 대학학보라는 유일한 문학마당에서 수상한 학술상, 원양실습기 필화사건에 이르기까지 나는 향파가 마련한 무대를 마음껏 누리고 즐긴 무법자였다.

향파 선생이 없었다면 이런 마당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다. 향파는 그렇게 무법자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심어준 깊은 바다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고 구난 전문가였다.

“바다에 너희의 삶이 있고 바다가 너희들의 무대이니, 그곳에 반드시 바다문학이 있을 것이라.”

내가 수산대학의 마지막 제자, 마지막 무법자라면 이제향파를 세상에 좀 더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는 바다를 전문으로 하는 모든 이들과 가장 친하게 교분하고 소통한
아동문학가, 소설가, 예술인이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 자신이 이미 바다문학, 바다 예술가였다. 한국에 이런 교육자, 해양인문학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그가 우리를 관조하였듯이 이제 우리가 그를 관조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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