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⑪ 자연과 바다가 어우러진 어촌마을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⑪ 자연과 바다가 어우러진 어촌마을
  • 김준 박사
  • 승인 2019.01.1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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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시 갈남마을

[현대해양]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주 잘한 선택이에요. 우리마을 보물이고, 자손대대로 지켜야 할 보석이죠. 얼마나 좋아요. 저걸 없앴으면 정말 후회했을 겁니다.

마을 앞에 있는 무인도 월미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민들은 그 섬을 ‘큰 섬’이라 부른다. 마을 뒤에 큰 섬들이 얼마나 많은데 작은 무인도를 큰 섬이라 부르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다.


갈남마을 ‘큰섬’, 월미도

월미도는 주민들 옛날 기념사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배경이다. 방파제가 없었던 시절에 마을로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을 막아 준 것은 월미도였다. 월미도는 주변에 크고 작은 암초와 갯바위와 함께 파도와 바람을 막아 배가 접안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이들 바위 주변에는 돌미역이 잘 자라 바다숲이 만들어졌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주민들에게 미역밭을 선물해 주었다. 또 주변에 문어, 성게, 해삼, 홍합, 양미리, 도루묵 등이 어패류가 머물러 좋은 어장을 만들어주었다.

▲ 월미도
▲ 월미도

‘강원도로 가는 길’,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크게 개선되었다. 그리고 명징한 동해 바다는 해수욕은 물론 카약과 서핑 등 해양레저의 최적지로 떠오르고 있다. 어촌마을도 개발과 변화에 직면해 있다. 갈남은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이곳에 하루를 묵게 된 입도조 진씨는 일어나 보니 어제 보이지 않던 바위가 솟아 있어 가보니전복이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전복을 채취하며 생활하다 머물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마을에 전복 가공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어업 중심, 큰섬

마을 북쪽으로 장호항, 남쪽으로 임원항이 국가어항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갈남항은 어촌정주어항이다. 방파제가 만들어진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항이 없어 장호항에 배를 두고 어구나 잡은 생선을 지고 고개를 넘기도 했다. 국가어항이나 지방어항처럼 지정어항이 아닌 탓에 예산을 마련하는 일도 어려웠다. 주민들이 자력으로 자금을 모아 물양장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태근(1944) 노인회장의 노력으로 어항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혈기 왕성한 어촌계장이었다. 마을주민들은 기왕 만들 것 크게 만들자며 큰섬을 연결하는 방파제를 쌓자는 여론이었다. 전씨는 정씨는 반대했다. 갈남의 상징이고 보물인 섬을 없애는 것은 대대로 물려줄 보석을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을의 규모로 볼 때 섬을 그대로 두고 안쪽으로 쌓아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잘한 것 같다는 것이다. 큰 배는 멀리 나가서 그물을 놓지만 작은 배는 대부분 월미도 근처에서 조업을 한다.

월미도 섬 주변으로 물고기들이 모이는 것이다. 이런 바위를 삼척에서는 ‘짬’이라 부른다. 특히 미역이 많이 자라서 미역바위라고 한다. 그러니까 갯바위는 인간에게는 갯바위지만 바다생물에게 갯바위는 숲이 될 수 있다. 바다숲이다. 숲이 좋으면 서식하는 생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만약 그 월미도와 주변 갯바위를 연결해 방파제를 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논도 없는데 보릿고개가 없었다. 양식미역이 등장하기 전, 갈남은 큰 마을 장호리가 부럽지 않았다. 미역을 채취할 수 있는 큰섬, 애암, 잠암, 구릉암, 상벽, 작은암 등 모두 11개의 바위가 있었다. 당시 동해 어촌마을의 생계는 미역바위가 좌우하던 시절이었다. 이 미역바위를 ‘짬’이라 부른다. 짬은 동해 어촌을 상징하는 공동어장이다. 춘삼월이면 추첨을 통해 각 짬에 주민 열댓 명씩 배치한다.

지금은 50여 명이 미역채취권을 갖고 있지만 옛날에는 100여 명이 넘었다. 어촌계원도 줄어들고 백화현상 등으로 돌미역 채취량도 줄어들면서 새섬과 큰섬, 잠암과 구릉암, 흑암과 장벽, 하벽과 애암 등 4개 짬으로 통합해서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도 미역바위로 얻는 수입은 일 년에 약 200만 원 내외이며, 직접 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짬을 해녀에게 팔기도 한다.

미역은 세는 단위는 ‘폭’이며, 20폭을 ‘한 단’,두 단을 ‘한 통’이라 한다. 한 짬에서 160폭 내외의 미역이 생산된다. 미역 값이 좋았던 1960년대 한 철 미역을 채취하고 나면 40, 50만원을 벌었다. 당시 해녀보다 채취량이 더 많은 잠수부의 경우 한해 미역을 채취해 논 7마지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 봉급은 5,000 ~ 6,000원이었다. 덕분에 농사지을 땅은 부족했지만 보릿고개가 없었단다.

▲ 머구리라 불리는 잠수부의 작업 모습, 해녀들과 함께 동해에서는 미역을 채취하는 일과 함께 해삼, 홍합 등을 채취하는 일을 한다. 심해에서 오랜 시간 일하면서 얻은 잠수병으로 큰 고통을 받있고다.
▲ 머구리라 불리는 잠수부의 작업 모습, 해녀들과 함께 동해에서는 미역을 채취하는 일과 함께 해삼, 홍합 등을 채취하는 일을 한다. 심해에서 오랜 시간 일하면서 얻은 잠수병으로 큰 고통을 받있고다.

 

제주 큰애기, 갈남에 머물다

갈남미역은 진도, 신안 등 조차가 큰 지역처럼 썰물에 드러난 갯바위에서 낫을 이용해 베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해야 채취할 수 있다. 해녀가 없었던 초기에는 직접 제주에 가서 해녀를 모집해 왔다. 이렇게 해녀를 모집하는 사람을 ‘해녀사공’이라 부른다. 미역철이면 5, 60명의 제주해녀들이 갈남에서 물질을 했다. 이들 중 일부 제주해녀들은 마을 총각과 결혼을 했다. 갈남에는 11명의 해녀가 있었다. 제주출신은 6명이며 지역출신 중 물질을 배워서 해녀가 된 사람은 5명이다. 지금 활동하는 해녀는 7명이다.

짬은 미역 외에 톳과 우무가사리도 많이 채취했지만 지금은 내다 팔만큼 없다. 갯바위에 자라는 양도 줄었지만 백화 현상으로 붙어 자랄 수도 없다. 동해안 김이라 부르는 ‘고로매’도 있었다. 갯바위에 붙어 자라며 철사를 다발로 묵은 도구로 긁어 채취한다. 미역을 제외한 해조류는 여건이 되는대로 채취할 수 있다. 짬에 붙어 자라는 홍합, 따개비도 훌륭한 식재료였다. 홍합은 지금도 해녀들이 즐겨 채취한다.

해녀 외에 미역을 채취하는 ‘머구리’라 하는 잠수부도 있었다. 투구, 신발, 납, 신발 등 60㎏에 이르는 작업복을 입고 수심 30m 이상에서 호스를 통해 산소공급을 받아 몇 시간씩 미역, 해삼, 홍합 등을 채취한다. 이들도 16명이나 있었다. 일반적으로 잠수부는 10명 중 5명은 포기하고, 3명은 죽고, 1명은 병들고, 단 1명만 살아남는다는 극한직업이다.

갈남마을에서 9명이 잠수병으로 사망하고, 4명은 잠수병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심해의 수압을 천천히 감압하면서 물밖으로 나와야 한다. 급하게 올라오면 호흡을 하면서 체내에 축적된 질소가 기포가 되어 혈액으로 흘러들어 마비, 통증 등 고통을 수반한다. 심하면 자살을 원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게 잠수병이다. 마을에서 잠수병 없이 생을 마친 사람은 단 두 명뿐이며, 최근까지 현역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개발과 보전의 틈새를 보자

아침 일찍 물량장이 소란스럽다. 막내 해녀가 남편이 그물에서 건져온 물고기를 손질하는 막내 해녀 어깨 너머로 갈매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기세다. 양은 많지 않지만 도치, 고등어, 가자미, 오징어 등 어종이 다양하다. 갈남마을 앞 바다에 잡히는 어류로는 봄철 청어, 겨울철 곰치, 겨울에는 임연수어, 양미리, 도루묵, 도치가 있다. 모두 겨울철에 맛이 좋다. 철없이 잡히는 가자미도 있지만 역시 겨울에 맛이 좋다. 모두 장호항에서 위판을 한 덕에 선창은 오히려 한산하고 비릿함도 없다. 대신에 모래밭이 깨끗하고 물이 좋아 여름철에는 선창 안에서 해수욕이 가능한 귀한 마을이다. 투명보트나 카누를 탈 수도 있다. 뒷개에도 모래밭이 좋다. 봄철에 민박집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다.

▲ 떼배. 가까운 짬에서 미역을 채취하거나 갯바위에서 홍합 등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전통 배다. 어촌체험마을에서 체험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떼배. 가까운 짬에서 미역을 채취하거나 갯바위에서 홍합 등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전통 배다. 어촌체험마을에서 체험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모래밭에 있는 떼배도 인상적이다. 옛날에는 오동나무를 잘 말려 엮은 떼배를 타고 나가 미역을 채취했다. 지금도 공동채취 구역이 아닌 외진 미역바위에서 약간의 미역을 채취할 때 이용하기도 하고 손자들을 태워주기도 한다.

성황당이나 할망당도 여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위해 마을제의를 잊지 않고 있다. 관광어항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장호와 임원 사이에서 갈남은 오래된 전통을 붙잡고 느릿느릿 바뀌고 있다. 멍게 양식 배양장을 마을박물관은 바꾼 것도 내력을 잘 설명해준다.

갈남마을도 변하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숙제다. 이웃마을처럼 개발을 원했던 마을주민들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큰 시설보다 기존 민박을 살리는 방법과 좁은 골목이지만 삶의 흔적을 지키는 어촌활성화를 고민하고 있다.

장호항과 갈남마을을 함께 걸었던 외국인들은 오히려 작은 어촌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렇다고 옛날 삶을 고수하며 불편을 감수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편을 개선하는 것과 개발을 하는 것은 다르다. 어촌의 모습을 도시나 관광지로 바꾸는 것을 발전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멈추자는 것이다. 갈남마을은 노인회장이 지키려 했던 마을 앞에 작은섬, 왜 노인회장은 그렇게 그 섬을 지키려 했을까. 자꾸만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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