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필브릭의 <바다 한가운데서>
나다니엘 필브릭의 <바다 한가운데서>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2.10.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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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海洋文學 순례 ⑤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어느 영문학자가 번역하면서 <바다 한가운데서>로 제목을 바꾼 이 책의 원제(原題)는 <바다의 심장(The Heart of The Sea)>이다. 어쨌거나 두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기록은 섬도 구조의 희망도 없는 한바다에서의 이야기인 동시에 고래잡이 선원들의 치열한 항해기록이다. 또 그들이 어떻게 난파(難破)를 당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94일 동안이나 표류하면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한 역사학자가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흔치 않은 해양기록물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기록은 곧 본지(本誌)가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소개한 멜빌의 해양소설 <모비 디크>의 구성(構成)을 가능케 한 미국인 포경선원들의 비극적이면서 야만적인 실제 표류기다.
 1820년 11월 20일 아침 8시경, 태평양 갈라파고스 섬으로부터 서쪽으로 1,500해리 이상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발생한 그 사건은 그로부터 180년이나 지난 2000년 미국 포경산업기지인 낸터컷 역사연구가인 나다니엘 필브릭(Nathaniel Philbrick)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그 같은 장구한 시공(時空)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오자마자 ‘미국 도서상’에 의해 ‘논픽션 부문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고, 아울러 <타임> 지(誌)도 ‘2000년 최우수 논픽션 작품’으로 선정하였을 만큼 세계 독서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같은 경이로운 반향은 ‘지난 날 소위 훌륭한 문학작품의 핵심을 이루어오던 시정(詩情)과 흥미성(興味性)은 배격되고, 이제는 오직 처절한 투쟁만이 요구된다’는 프랑스 문학평론가 알베레스(R. M. Alb?r?s)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 말은 제아무리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일지라도 골방에서 끄적거려낸 글이란 것은 다만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으로 만인(萬人)을 단합(團合)시키는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는 단언(斷言)이기도 하다. 곧 상상의 산물보다는 체험적 행동(行動)이,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픽션보다는 논픽션이 독자들에게 더 많은 흥미와 감동을 준다는 문학위기론(文學危機論)에 다름 아니다.
 주목할 것은 알베레스는 그 같은 문학적 실현은 곧 ‘행동주의문학’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단정하고 그것을 성취한 작가로 <백인대장의 여행>을 쓴 에르네스트 프시까리, <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 <왕성의 길>을 쓴 앙드레 말로, <배는 제 길을 간다>의 노르달 그리이그 등 여러 명을 꼽는다. 여기에는 물론 헤밍웨이나 콘래드도 포함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잠시, 우리나라의 한 문학평론가 선언(宣言)을 인용한다. 불문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인 그는 문학비평의 권위지 <문학과 지성> 1974년 겨울호에서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단연 이런 작가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외항선 선장으로 항해하며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 작가 천(千) 아무개가 비로소 현대 한국문학에서 최초의 행동주의작가라 할 수 있다’고 단언한 데 대해 독자들은 주목해 주시면 고맙겠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감히 행동주의문학(체험문학)에 대해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소회를 피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궤도를 이탈했지만, 그렇다면 <바다 한가운데서>의 어느 어느 대목이, 또 어떤 묘사가 그토록 사람들의 심성을 흔들어 놓았는가. 그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1821년 2월 23일’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린 ‘머리말’을 접하는 순간 독자들은 결코 생전에 경험한 적 없는 처절하면서도 끔찍한 실제상황에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핵심은 고래, 그 중에서도 가장 포악하고 지능도 높은 향유고래를 잡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미국 포경선 (Whale Ship) ‘에섹스(Essex)’ 호가 침몰하면서 선장을 포함한 20명의 선원들이 세 척의 보트에 나누어 타고 표류하는 동안 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기력을 다하여 죽은 동료선원들의 시체를 뜯어먹거나 혹은 제비를 뽑아 희생자를 선정하는 등 실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극악한 상황에서, 나중 두 보트에서는 각각 세 명이, 그리고 다른 보트에서는 두 명 등 모두 여덟 명이 끝까지 생존하여 구조되기까지의 소름 돋는 이야기다.
여기 기록의 머리말 부분부터 발췌, 인용한다.


 2

- 고래잡이 배 한 척이 남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을 갈지 자 걸음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그 배는 미국 동부 해안의 낸터컷에 선적을 둔 포경선 ‘도핀’ 호로, 향후 3년간 예정된 항해에서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난 때였다(당시 태평양은 향유고래라 불리는 온혈동물의 광활한 회유지였다).……
그 날(1821년 2월 23일) 아침, 망대를 지키던 선원 하나가 전방에서 무엇인가 떠 있는 물체를 발견했다. 대양을 항해하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한 보트 한 척이 높은 파도를 타고 까닥거리며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원은 크게 소리쳤고, 보고를 받은 선장(짐리 코핀)은 곧 휴대용 쌍안경으로 표류물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선장은 그 배가 곧 일반 구명보트처럼 선수와 선미부 양쪽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25피트짜리 고래잡이 보트임을 알아냈다. 그런데 여느 고래잡이 보트와는 달리 양쪽 뱃전이 반 피트쯤 높여져 있었고, 두 개의 돛대가 세워져 있어서, 노를 젓는 고래잡이 보트가 극히 원시적인 스쿠너(쌍돛대선)로 변모해 있음을 알았다. 아마도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돛은 소금물에 절어 뻣뻣해져 있었고 햇빛에 색이 바래 있었다. 선장은 즉시 ‘키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키잡이는 속력을 줄이며 배를 표류하고 있는 보트 옆 가까이로 접근시켰다. 그러나 지금껏 순풍(順風)을 받으며 달려온 타력(惰力) 때문에 배는 멈추지 못 하고 매우 빠르게 보트를 지나쳤다. 그 몇 초의 찰나에 내려다 본 보트 안 광경은 도핀 호 선원들이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처참한 것이었다.
처음 그들은 두 명의 표류자와 함께 보트 바닥 여기저기에 사람의 뼈로 보이는 하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두 명의 표류자는 침몰선 에섹스 호 선장인 조지 폴라드 2세와 선원 찰스 램스텔이었다). 두 표류자는 각각 보트의 선수와 선미 쪽에 떨어진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피부는 온통 종기 투성이였고, 두 눈은 두개골의 움푹 팬 곳에서 툭 튀어나와 있었으며, 소금기와 피가 양 볼과 턱을 뒤덮은 수염에 엉킨 채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조선의 접근도 모른 채 사람 뼈의 골수(骨髓)를 빨아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생존자는 갑판에 끌어올려져 음식과 물을 제공받고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쥐고 있던 뼈다귀를 내려놓았다.……
……사나흘 후 그 중 한 사람이 기운을 차리고 자신들이 겪은 일의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상상 이상의 악몽으로 점철된 고래잡이 뱃사람들의 항해와 생사를 넘나든 사투(死鬪) 그것이었다. 뭍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먹거나 마실 어느 것도 깡그리 동난 상태에서 그들이 겪은 처절한 생존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 뒤에는 인간 이상으로 복수심에 불타고 음흉한 꾀를 가진 한 마리 고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3

 보다 닷새 전인 2월 18일 아침 7시, 에섹스 호 1등항해사 오웬 체이스는 2번 보트 바닥에 잠들어 있었고, 그 곁 어깨 높이의 뱃전에는 배에서 가장 어린(15살 ; 그는 표류하는 동안 한 살 더 먹었다) 사관실 급사 토머스 니커슨 역시 기력을 잃고 널부러져 있었으며, 키잡이 벤저민 로렌스 혼자만 고래를 추적할 때 자신의 자리인 고물 쪽 키 옆에 기대어 있었다. 키잡이는 표류를 시작하면서 나중 침몰선 에섹스 호의 유일한 증거물의 하나로 돛의 실오라기로 꼰 노끈을 갖고 있었는데, 그 즈음엔 길이가 12인치로 늘어나 있었다(그 노끈은 지금까지 낸타컷 역사학회에 보관되고 있다).
 이미 구조의 가망은 없어졌고, 이제나저제나 죽을 순간만 고대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당직’을 포기한 지도 오래였는데, 키잡이 로렌스는 표류 석 달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놀라울 만큼 강인한 인내력으로 수평선 한쪽으로 불끈 솟아오른 아침해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키잡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저기 돛대가 보인다!”
침조차 말라 모기소리만큼 한 쉰 소리였으나 잠들어 있던 체이스와 니커슨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돛이라고?”
“그래! 맞아요! 돛이 보인단 말입니다!”
체이스가 양미간을 좁히며 수평선 한 곳을 응시하니 아주 멀리로 보일까 말까한 흐릿한 갈색 점(點) 하나가 가물거리고 있었다.
“맞다! 돛이 맞다!”
체이스도 동의했다. 약 11km의 거리였는데, 자세히 보니 큰 범선의 주(主) 마스트에서 펄럭이는 돛폭이었다.
- 그 순간의 기쁨과 환희를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 구조되고 난 다음 체이스가 털어놓은 심경이었다.
이제 문제는 그들이 그 범선을 따라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보트는 마침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필사적인 경주를 시작하였고, 제법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드디어 세 시간 후, 그들은 범선의 보다 작은 앞돛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범선의 망대에는 사람이 올라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갑판의 누군가가 꼼지락거리며 다가오는 보트를 발견한 듯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광경까지 보게 되었다.……
마침내 체이스는 고물에 적인 범선의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 INDIAN, England London.
영국 런던 선적의 인디안 호였다.
메가폰을 들고 있던 범선 사관이 ‘누구냐?’고 물어 체이스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에섹스! 포경선! 낸터컷!”
하지만 혀가 바짝 말라 있어서 쉰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체이스가 걱정한 것은 과연 이 범선이 자신들을 구조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흔히 난파선 생존자 가운데는 자신들을 발견하고도 모른 체하고 제 길을 간 배들이 없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빠듯한 식량 문제와 표류자들이 행여 전염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이유였다.
어쨌거나 1등항해사 체이스 등 생존자 세 명은 영국 상선의 구조를 받는 데 성공했다. 위치는 남위 33도 45분, 서경 81도 03분으로, 에섹스 호가 침몰한 지 89일째 되는 날이었고, 그날 정오 무렵 그들은 칠레 연안의 마사푸에라 섬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은 고래잡이 보트를 타고 당초 목적지로 삼은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장장 2,000마일도 넘게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항해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에섹스 호 선원 20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여덟 명이 되었다.
미국 포경선 에섹스 호 난파와 선원들의 표류 이야기는 비단 포경선원들만 아니라 일반 사회인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다. 우선 그들의 표류기간이 석 달이나 되었다는 것, 표류 거리가 4,000마일도 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죽거니 혹은 제비뽑기로 희생된 동료들의 인육(人肉)으로 갈증과 굶주림을 이겨내며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등이 바다를 모르는 육지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4

 그 동안 시중에 떠돈 에섹스 호의 조난 이야기는 생존한 1등항해사 오웬 체이스에 의해 나온 <포경선 에섹스 호의 난파 이야기>에 의한 것이었다. 체이스가 한 작가(作家)에게 자신의 체험을 구술(口述)하여 대필(代筆)한 것으로, 출간된 것은 구조되고 아홉 달이 지나서였다.
따라서 에섹스 호가 난파하고 무려 190년이나 지난 2000년도에 낸터컷 역사학자 나다니엘 필브릭이 출간한 <바다 한가운데서>는 전혀 다른 자료에 근거한 것이어서 그 내용도 더욱 자세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료를 찾아낸 과정도 매우 극적이다.
때는 1960년, 뉴욕의 어느 집 다락방에서 오래된 노트 한 권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노트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트가 낸터컷 역사학회의 필브릭에게 넘겨지기까지(1984년) 다시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트의 주인은 선장(조지 폴라드 2세)과 키잡이(벤자민 로렌스)와 함께 런던 선적의 범선 인디언 호에 의해 구조된 사관실 급사 토머스 니커슨이었다. 구조 당시 열다섯 살이 된 그는 그로부터 75년이 흘러 아흔 살이 되었을 때(1896년) 자신이 살아온 회고담(回顧談)을 썼다. 그 무렵 그는 낸터컷에서 하숙집을 열고 있었는데, 투숙객이던 레온 루이스라는 뜨내기 작가로부터 에섹스 호 조난사고를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이다.
작가도 아닌 니커슨이 쓴 글은 문장도 조잡하고 구성도 산만하여 웬만한 사람들은 쉽게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흔의 나이에도 악몽의 순간순간을 놀랄 만큼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해냈다. 거기에 다른 생존자들에게서 들은 증언까지 보완하고 있었으니 자료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 노트가 바로 이 책의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노트를 전해 받은 뜨내기 작가는 원고를 다듬는 등의 작업도 하지 않은 채 이웃사람에게 읽어보라며 넘겨주었는데, 어영부영하던 그 사람이 노트를 소유한 채 죽고 말았다. 미국 포경산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니커슨의 노트가 100년도 더 넘게 사장(死藏)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세기의 최우수 논픽션작 <바다 한가운데서>를 정리한 필브릭은 작가라기보다는 평생을 미국 포경산업 본거지였던 낸터컷 역사를 연구한 학자다. 피츠버그대학교 영문학 교수인 그의 부친(토머스 필브릭)은 특히 멜빌의 <모비 디크>를 비롯한 여러 해양소재의 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필브릭이 에섹스 호 조난과 관련한 글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기로 한 것은 아마도 그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필브릭은 에섹스 호를 다룬 체이스의 글 말고도 고래잡이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다 읽었다. 바다에서의 생존 방법, 굶주림의 심리학, 거기에 해양학을 포함한 포경선의 조선술과 향유고래의 습성에다 심지어 세계의 식인풍습(食人風習)까지도 광범위하게 취합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늘 날 미국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히는 <모비 디크>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에섹스 호의 조난사건에서 영감(靈感)을 얻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모비 디크>를 쓰면서 멜빌은 다만 고래가 눈처럼 하얀 껍질을 가졌으며, 배 이름도 에섹스가 아닌 ‘피쿼드’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럼 이제부터 <바다 한가운데서>의 가장 핵심적인 에섹스 호 조난 순간(<모비 디크>의 클라이맥스 부분)과 표류하는 동안 생존을 위해 어떻게 동료들의 시체를 차례차례 먹게 되었는가를 재현해보도록 하자.


 5

- ……운명의 11월 20일(1820년) 아침 8시, 맑은 날씨에 약간의 미풍이 불고 있었다. 고래잡이하기에는 그럴 수 없는 호조건이었다.
그 시각, 에섹스 호는 갈라파고스 군도 서쪽 1,500마일 이상, 적도로부터 남쪽으로 4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서 일단의 고래 무리가 세차게 물을 뿜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고래다!”
폴라드 선장은 고래 떼가 노는 곳에서 8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베를 정지시키고는 뱃머리를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돌려 역풍을 받게 했다. 그런 다음 곧 세 척의 보트를 내렸고(보트에는 각각 여섯 명씩 나누어 탄다), 1번 보트의 키는 선장이 직접 잡았다. 고래 떼는 아직도 에섹스 호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물을 내뿜은 고래 떼가 잠수를 하자 2번 보트 정장인 1항사 체이스는 작살을 움켜쥔 채 키잡이 로렌스에게 한 지점을 가리키며 보트를 그 쪽으로 몰도록 지시했다(고래가 잠수할 때 머리 방향을 보면 다시 떠오를 위치를 정확히 알아낸다). 그러나 첫 번째는 작살을 던지지도 못 했고, 두 번째 작살을 명중시켰으나 너무 가까워 깜짝 놀란 고래가 꼬리를 휘두르는 바람에 보트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체이스는 부득이 손도끼로 밧줄을 잘라버리고 선원들에게 셔츠를 찢어 구멍을 막으라고 지시한 다음 수리를 위해 모선으로 돌아갔다. 그 때는 1번 보트와 2등항해사 매튜 조이의 3번 보트는 각각 한 마리씩의 고래에 작살을 꽂고 있었다.……
구멍 뚫린 체이스의 2번 보트가 연신 물을 퍼내면서 모선으로 다가가자 배에 남아 있던 선실 급사 니커슨은 키를 돌려 1번과 3번 보트를 향해 배를 몰고 있었다.
니커슨이 모선 좌현 방향에서 무언가를 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래였다. 앞머리가 바위처럼 뭉툭한 특이한 형상에, 체장이 80피트가량 되고 적어도 80톤은 됨 직한 엄청나게 큰 향유고래였다. 모선과의 거리는 약 30미터 가량. 크고 뭉툭한 대갈통에 새겨진 여러 개의 상처가 또렷이 보였다.
니커슨은 수면으로 머리통을 내민 향유고래가 에식스 호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다른 고래 같으면 줄행랑을 쳤을 텐데 녀석은 장거리 주자가 마치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조용히 분수공(噴水孔)으로 물을 내뿜고 있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두서너 차례 물을 뿜고 난 녀석이 갑자기 물속으로 잠수하더니 잠시 후 에섹스 호 좌현 쪽 10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불쑥 떠올랐다. 그 때는 모선 갑판으로 구멍 난 보트를 끌어올린 다음 수리에 바쁜 나머지 체이스는 고래를 보고도 별로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고 나중 술회했다.
그러다 갑자기 녀석이 20피트나 됨 직한 꼬리를 펌프질 하듯이 뭉장구를 치더니 그대로 에식스 호를 향해 돌진해 와서는 철판이 덧대어진 좌현 선수부를 들이받았다(고래의 고의적인 충격으로 선원들이 모두 갑판에 나가 떨어졌다). 그런 다음 고래가 배 아래를 지나가면서 가로 15cm, 세로 30cm에 이르는 거대한 용골을 떨어져 나가게 했다.
다시 반대편에 떠오른 고래는 자신도 놀랐는지 한 길 거리에 멈추어 있더니 200미터 정도 헤엄쳐 갔다가 다시 몸을 돌려 ‘분하고 화가 나서 미치겠다는 듯이 입을 딱딱 벌리고 수면을 마구 도리깨질을 했다.
고래는 다시 에섹스 호를 공격했다. 키를 돌려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고래는 아까와 반대편인 우현 선수부를 재차 들이받은 채 그대로 한참을 밀어부쳤다(충돌시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미리 대비하고 있던 선원들의 머리를 뒤로 홱 꺾었을 정도였다고 니커슨은 회고했다).
“배에 물이 차오르고 있다!”
어느 선원이 소리쳤다. 그리고 에섹스 호는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6

그게 미국 포경선 에섹스 호의 최후였다. 총톤수 238톤이나 되는 목재범선은 덩치가 3분의 1에 불과한 고래에 받혀 으깨지고 만 것이었다.
배는 앞머리부터 가라앉아갔다. 침몰을 앞둔 배가 앞머리를 수그리기 시작하자 선장과 2항사 보트가 잡은 고래를 포기한 채 달려와 선원들을 시켜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을 보트로 옮기게 했다. 270kg의 건빵과 물통이 먼저였고, 몇 가지 보트 수선용 도구 및 권총 등이었다. 배는 다음 날 오후 4시경 완전히 침몰했다. 배가 침몰하기 전 돼지 두 마리와 여러 마리의 갈라파고스 거북들이 보트로 헤엄쳐 왔다(나중 모두 식량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 구조될지 모를 기약도 없고 정처도 없는 표류의 길로 들어섰다. 목적지는 남아메리카 대륙 쪽이었다. 보다 가까운 곳에 마르키즈 제도가 있었지만, 그 섬 원주민들이 식인종(食人種)일지도 모른다고 겁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최악이었다.……
표류 50일이 넘었을 때, 세 척의 보트는 각각 흩어진 채 그들은 겨우 한 컵씩의 물과 80g의 건빵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것은 사람이 연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맨 먼저 죽은 사람은 표류를 시작한 지 59일째가 되는 1월 8일, 원래 병약하던 2항사 매튜 조이였고, 다른 보트의 두 선원도 차례로 죽아갔다. 사인은 당연히 지나친 탈수증과 굶주림이었다.
그 중 1항사 체이스 보트에 타고 있던 선원 피터슨은 앞서의 조이와 마찬가지로 태평양이라는 광활한 묘지에 고요히 수장(水葬)되었지만, 2번 보트의 흑인 선원 로슨 토마스는 달리 취급되었다. 이제 남은 식량이라야 겨우 사나흘치인 850g에 불과한 상황이어서 시체를 수장시키는 대신 먹어야 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데는 지난 19세기 초까지 구조된 허다한 생존자들이 인육을 먹고 연명했다는 말을 무수히 들어온 때문이었다. 논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보트 바닥에 놓인 돌판 위에다 불을 피워놓고 내장과 살코기를 구워 먹었다’고 나중 폴라드 선장이 보고했다.
2번 보트에는 흑인 선원이 모두 네 명 타고 있었는데, 그 중 세 명이 일주일 사이에 차례차례 죽었다(기아와 갈증 속에서 백인보다 흑인이,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이 더 오래 버틴다는 사실은 체내에 더 많은 지방분을 함유한 때문이라고 한다).
- 사람 고기맛을 보자 굶주림의 고통이 완화되는 대신 더 먹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리고 먹으면 먹을수록 시장기가 더해졌다.……
책 중간에 나오는 설명이다. 그리고 드디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가장 야만적이면서 처절한 식인현장이 폴라드 선장의 1번 보트에서 목격되었다. 노트를 남긴 니커슨보다 한 살 많은 선원 찰스 램스텔이 감히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말을 꺼낸 것이었다.
“우리가 구조될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 살 사람은 살아야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비를 뽑아서 죽을 사람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죽을 사람’이란 곧 ‘식량 대용(代用)’을 뜻한다. 이를 두고 ‘폴라드 선장은 처음에는 그 제안을 일축했다’고 니커슨이 노트에서 증언했다.
“그건 안 돼. 하지만 만약 내가 먼저 죽으면 자네들이 내 시체를 먹어도 좋아.”
폴라드 선장의 말이었다.
하지만 폴라드 선장의 이종사촌동생인 선원 오웬 코핀이 이에 동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렇게 하여 제비뽑기를 한 결과 하필이면 동의한 코핀이 가장 짧은 종이쪽지를 뽑아냈다.
“안 돼! 안 돼!”
폴라드가 소리쳤지만, 그 상황에서 그는 이미 지휘권을 상실한 선장일 뿐이었다.
“걱정 마세요. 제비뽑기는 아주 공정했어요.”
희생자로 뽑힌 코핀이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조용히 뱃전에 머리를 얹었다. 표류보트에는 권총이 한 자루 있었다. 방아쇠는 희생자의 친구인 찰스 램스텔이 당겼다. 그 역시 제비뽑기로 악역(惡役)의 장본인이 된 것이었다.……
(다음은 딘 킹의 <사하라 사막의 난파선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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