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⑩ 취업준비생 후배에게
하동현의 양망일기 ⑩ 취업준비생 후배에게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8.12.10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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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요청이 왔는데 엉뚱하게도 ‘취업강의’란다.

섭외부서의 명칭이 낯설었다. 학생들의 자기개발을 돕고, 진로지도와 기업과의 산학협동을 지원하는 파트였다. 단연코 ‘취업’이 학생들에게 부동의 1위 관심사인 것은 알지만, 왜 하필 뱃놈출신에다 늦깎이 글쟁이인 나를 지목했을까.

담당자의 설명을 들으니 나를 천거한 이유가 어느 정도(?)이해가 된다. 대기업과 금융기관, 공공기업체에서는 우수학생 유치차원에서 자체 프로그램으로 대학을 방문해 선발요강을 강의한 단다. 뒤이어 나에게 한 말은 이랬다. 같은 학교출신 선배에다, 대기업근무경력에 더해 외국계 기업에도 몸담았고 수산물 유통과 무역업 종사경력에 ‘작가’ 타이틀도 있지 않느
냐.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인 취업전선에 오로지 ‘신의 직장’만을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시야를 ‘넓게’ 가질 때(이건 순전히 그의 말이고, 나에게는 ‘낮출’ 때로 들렸다)선택의 다양화를 위해서라는 내용이었다.

취지는 십분 이해했지만 좀 멋쩍었다. 어선선장에 운반선감독, 시운전 요원 같은 내 전공은 그렇다 치자. ‘XX해운’이라는 명칭만 대기업 간판을 걸친 회사에 속해 결국은 뱃놈노릇이었던 게 ‘대기업 근무경력’으로 둔갑되고, 직원 네명이 고작이었던 캐나다와의 소형어선 합작사업은 ‘외국계 회사 근무경력’이 되어버렸다. 하기야 돌이켜보니 ‘확때려 치고 다시 바다로 가버려’ 라는 속내를 억누르고 여기저기 호구지책으로 밥벌이를 했던 직장도 너 댓 군데다.

내 이력을 과대평가 하셨네요 어쩌고 하다 결국 수락했다. 자식 같은 후배들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내가 겪은 세상과 경험을 한 번 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2 학교에 도착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농구장을 지나면, 바로 바다에서 운명을 달리한 동문들의 영혼을 기리는 백경탑(白鯨塔)이 있다. 옷깃을 여미고 내 동기 하나를 포함한, 원양어업 개척시절 목숨을 바다에 묻은 선후배들의 넋에 예를 갖춘다. 탑신에 새겨진 향파(向破) 이주홍 선생님의 추모시도 다시 천천히 읽었다.

장한 넋들
교정을 메아리치는
종소리를 듣고 있는가
대서양에서 인도양에서
북양에서 남태평양에서
온 누리의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다 꽃으로 진
수대(水大) 남아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의 고귀한 뜻
대대 후배의 가슴에 심거진 채
오늘도 우리는 여기
한기둥 탑신이 되어
바다를 지켜보며 섰노니
길이 편안하여라
우리는 바다의 아들
그대들 용감한 뱃사나이는
영원히 우리들과 함께 있으리라

땀에 젖어 농구시합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니 싱그러운 젊음의 열기가 느껴진다. 문득 삶과 죽음의 묘한 대비가 슬퍼져 울컥했다. 시쳇말로 ‘뱃놈양성소’ 같았던 과거와 달리미래를 선도하는 첨단 학문들까지 갖춘 종합대학으로 탈바꿈했으니 한 번씩 방문할 때마다 선배로서 감회가 새롭다.

 

3 맞이하는 실무자의 눈치가 심상찮았다. 차를 권하더니 여러 군데 전화를 하고 옆 직원과 수군거리기를 한 십분. “강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수강생이 단 한명 뿐이라…….학생들이 바쁜지 공고도 하고 취업동아리에 연락도 했는데…….”

한명? 안 봐도 비디오다. 대기업 설명회도 참석하기 바쁜데 얼어 죽을 뱃놈선배의 취업 강의는 아예 영양가가 없다는 말이다. 심호흡을 했다. 표정관리를 해야지. 선배가 모교까지 와서 이깟(?) 일에 언짢아할 수는 없다. 강의실에 혼자 썰렁하게 앉아 곧 들어 올 강사의 일그러진 표정을 상상하며 앉아있을 그 한 친구가 보고 싶었다.

“좋습니다. 합시다. 그 친구는 남학생입니까? 여학생입니까?”

남학생과 여학생의 비율을 보고 적당히 톤과 농담의 수위를 가늠해야할 작정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남학생이란다. 남은 차를 마시고 강의실로 향했다. 태산 같은 거구의 안경낀 남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악수를 하는데 따뜻한 손바닥이 솥뚜껑만하다.

J군. 재학생이 아니라 만 25세로 작년에 졸업했고 지금은 고시원에 쪽방을 얻어놓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단다. 전공은 기계공학이며 작년에 대기업 S조선의 서류전형을 통과했으나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다네. 대 여섯 군데 전공과 연관된 기업에서도 9부 능선 까지는 넘었으나 단 한 군데도 취업이 성사되지 못했단다. 오늘도 바쁜 후배들을 대신해 자청해서 연락을 맡았는데 이렇게 파리를 날릴 지경이 될 줄 몰랐다며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송구해했다.

편하게 앉게. 강의실에 덩그러니 둘이 마주앉으며 강의록 초안을 덮었다. 원래는 젊은 후배들에게 이토록 비겁한 세상을 물려 준 기성세대를 대신해 사과를 하고, 밥벌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숙명, 그리고 내가 나이 들고 위치가 올라 직원을 선발할 때 눈여겨 봐뒀던 ‘자소서’ 내용의 첨삭과면접노하우 같은 것을 준비했으나 다 때려치웠다.

벌써 실패를 여러 번 맛 본 이 친구의 아픈 이야기를 먼저들어 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강의가 아니라 상담이다. 누구에게도, 친구나 부모에게도 터놓고 말할 수 없었을 내면의 응어리를 한 번 쏟아내 봐라.

아버지가 나하고 ‘갑장’인데 작년에 퇴직했단다. 흘러가는 세월과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청년이다. 나에게는 술과 찌질했던(?) 낭만까지는 남아있다지만 이놈들의 청춘과 세상은 버겁고 서늘한 것일까. 그놈의 ‘눈높이를 낮춘다’는 전재 하에, 해양수산 쪽이 쉽지 않은 사정이란 걸 알면서도 지나가는 말 삼아 선박회사의 견습공무감독 자리도 있지 않느냐는 내 말에, 그러지 않아도 벼랑 끝에 몰릴 때를 대비한 차선책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했다. 바다를 동경해 ‘승선근무예비역제도’를 노리고 배를 타는 쪽으로도 생각이 있었으나, 재학시절 승선실습기간 중에 경험해 본 배 생활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어 포기한 상태였다. 맞는 침대가 없을 만큼 큰 ‘떡대’가 핸디캡이 되어 승선의지의 발목을 잡은 거였다.

나는 이 친구에게 인생은 어차피 누구나 불공정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이 나이까지 살아 본바 운(運)이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뻔한 말부터 해줘야했다. 수 없이 마주칠 실패를 나름 초연히 받아들이고 재무장할 수 있는 내공을 쌓을, 이를테면 ‘명상’이나 ‘마이드콘트롤’에 관심 가질 것을 권했다.

스킬적인 충고는 단 두 가지였다. 자소서 취미나 특기 난에 ‘명상’과 군대를 마친 선배답게 ‘후배들과의 인생 상담’같은 항목을 집어넣어 차분하고 믿음직 할 것 같은 인상을 줘라. 또 하나 취미에 ‘노래 부르기’라 기록했다는 것에 더해 한 발짝만 더 나가 가곡이면 가곡, 클래식, 팝송, 또는 창(唱)이나 전래민요 같이 세분화해서 서류를 준비하라고. 혹심사자들 중에 그 방면에 필이 꽂힌 분이 있어 긍정적인 관심을 보일수도 있지 않겠냐.

한 시간 반 동안 이놈의 이야기와 내가 살아 온 인생을 주고 받으며 콧날이 시큰했다. 돌이켜 볼 수는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내 젊은 날과, 자식 같은 이놈이 떠안은 헛헛한 세상이오버랩되며 가슴이 아련했다. 십분 쯤 남기고 담당직원이 죄송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쪽지를 들이밀었다. 아니오, 감사합니다만 내 오늘 이놈 밥한 끼 사고 가리다. 돼지국밥집에서 순대 한 접시를 추가해 한 시간 만에 소주 다섯 병을 두꺼비 파리 삼키듯 하는 낮술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어느 단체에서 나를 ‘꼴등’으로 시상할테니 수상동의서를 메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바로수상을 거부했다.

표절확인차 올려둔 글들을 보니 전문용어의 오기(誤記)정도는 직접적인 해상체험이 없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현란한 상상력만으로 바다를 그려낸 듯한 것들이 있어 이것 봐라 하던 참이었다. 해양문학이란 것이 반드시 승선 체험이 있는 뱃놈들만의 ‘르포’형태를 발전시킨 전유물은 아니지만, 바다나 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미사여구를 짜깁기해서 단순한 바다에 대한 동경(憧憬)이나 감상만으로 해양을 이해하고 있다 여겨 비위가 거슬려있던 터였다.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저런 상이라고 몇 번 받아본 터에, 서툴고 거친 내 능력은 가늠도 못하고 낮술도 얼큰한데 그저‘가오’가 있지 ‘꼴등’이라는데 억하심정이 작용했지 싶다. 뱉어낸 말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해양친화사상 고취’라는 넓은 의미의 취지도 모르고 미천한 글을 천거해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큰 결례를 범한 셈이다. 나는 ‘거부’라 표현했는데 절차상 ‘포기’ 사유서를 보내 달라 했다. 거부나 포기나 좋은 뜻을 가지고 진행한 분들에게 생각이 짧아 깨춤을 춘 격이다. 뼈저리게 후회되는 건이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겸허히 평가받고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젊은 후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두 달치 소주 값으로 충분한 상금마저 팽개쳐 쓰라린(?) 내 속마음은 모르고, 소신이 뚜렷해 행동거지가 거칠 것 없이 터프한 선배를 우러러보는 경외의 눈빛이었다. 본의 아니게 술판에서 포기할 것은 쾌도난마처럼 훌훌 털어버리는 산교육을 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부모님께 자주 안부 여쭙게. 주위 사람들을 덩달아 힘들게해서는 안 돼. 사나이 칼을 뽑았으니 될 때까지 해 보겠다며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만주벌판으로 떠나는 선구자처럼 비장한 어투로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느 시한까지 도전해보고 그때 진로를 다시 생각해보겠다 말씀드리게. 미래는 알 수 없지. 그때 상황은 그때 가서 또 보면 되고. 울어봤자 모두 속만 쓰리지 제 코가 석자라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어.

인생은 우리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는다. 침울한 분위기 만들지 말고 즐기듯 살아야지. 마지막 잔을 삼킨 이놈도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조심스런 다짐을 했다. 덩치답게 취한 기색도 전혀 없이 다시 도서관으로 가겠다했다. 헤어질 때 포옹은 고목나무에 매미가 매달린 꼴이었으리라. 이놈아, 이는 닦고 가야지.

 

4 며칠 뒤 또 다른 취업준비생 후배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어찌어찌 내 존재를 안 것 같은 데, 황감하게도(?) 대단한 선배로 보였던지 깍듯이 예의를 표하며 선후배간의 소통에 더해 취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성실하게 이 친구의 질문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답신을 보냈다.

그런데 ID가 낭인(浪人)을 뜻하는 ronin이었다. 현재의 암울한 상황에 빗대 제 딴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거두어 줄 주군을 찾지 못해 방랑하는 사무라이를 칭하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 친구야, 떠돌이 느낌을 줄 수 있으니 이것부터 긍정적인 닉네임으로 다시 바꿔봐라.

낮술 퍼 먹이며 상담을 했던 J군을 다시 떠올렸다. 기관 관련 기계전공이니 이 친구도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조선소며 선박이며, 넓은 의미에서 나와 같은 바닥, 그러니까 바다언저리에서 놀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후배야. 뱃놈 노릇만이 바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 열정으로 다가서봐라. 바다는 끝없는 도전을 받아주던 미지의 영역이었고, 무자비한 운명의 희생도 강요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단다.

언제고 취업이 되거들랑 실패한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너무 기뻐하며 날뛰지 말고 차분히 가족과 여자 친구부터 먼저 챙긴 후에, 그 돼지국밥집 좋더라, 거기서 이 늙은 퇴역뱃놈 선배에게도 소주나 한잔 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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